21화
우반희
정희수와 홍희의 주접은 모르젠트 길드원이 제발 일 좀 하라며 병실을 찾아오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홍희는 잔뜩 울상인 얼굴로 길드원을 따라 나갔다. 축 처진 어깨가 참 안타깝지만 원래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디라 했다.
K-드라마의 훌륭한 조언을 되새기며 나는 홍희를 배웅했다.
근데, 부길마인 홍희가 이렇게 바쁜데 너는 왜 안 가?
백루찬이 내 눈길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원래 고용주는 일 안 해요.”
“…….”
“이 건물 제 건데.”
…오케이 납득.
병실로 점심이 배달되어 왔다. 백루찬이 시킨 거였다.
라지 사이즈 피자 두 판이 들어오자 짭조름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희수는 백루찬이 사 준 음식에 감격하며 피자를 먹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묽은 죽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위장에 꼬르륵 소리가 울린다.
말짱해졌는데 죽이 웬 말이냐 하면, 삼 일 동안 잠만 자서 위장이 놀랄 수도 있다고 정희수가 말렸기 때문이다.
백루찬은 ‘먹고 싶음 먹어요^^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지.’라며 웃었다. 딱 저 이모티콘 웃음이라 진짜 재수 없었다.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좀 쉬세요. 한솔이랑 내일 또 올게요!”
“후응….”
정희수가 발랄하게 인사했다. 한솔이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다고 내내 같이 있기엔 정희수도 쉬어야 하고, 한솔이도 제대로 쉬어야 한다. 나도 그렇고 모두 일상생활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지.
나는 시무룩한 표정의 한솔이를 잘 달래어, 정희수와 함께 보냈다.
둘이 사라지자 병실에 적막이 찼다.
개인 VIP 병실이라 소파에 TV까지 있어서, 백루찬은 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연신 채널을 돌려 댔다.
표정이 무료한 걸 보니 어떤 것도 재미가 없어 보이는데….
“루찬아.”
“네, 형.”
내가 이름을 부르자 살짝 눈이 커지더니 이내 순순히 대답한다.
슬며시 웃으며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난 백루찬은 내 옆으로 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가까이 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 부담스러워 상체가 뒤로 빠졌다.
“게이트 잘 닫혔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백루찬은 주삿바늘이 꽂힌 내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뜬금없는 간질거리는 행위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게이트가 잘 닫혔는지 궁금했다.
분명 시스템창에선 목을 땄지만 퀘스트는 실패했다고 했다.
그리고 게이트 붕괴가 데빌루데스의 등장으로 멈췄었고.
그 틈에 한솔이랑 빠져나왔던 거라, 게이트가 제대로 닫혔는지 불안했다.
데빌루데스… 그놈 진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단 말이야.
“보통 보스 몹을 처치하고 나면 게이트는 삼 일 내로 마력 파장이 점점 줄어들면서 닫히잖아요? 운 좋을 땐 한 번에 사라지기도 하고요. 근데, 이번 게이트는 삼 일이 지났는데 사라지기는커녕 마력 파장이 그대로예요.”
“…그럴 수가 있나?”
“게이트 터지고 처음 있는 일이죠. 그래서 각본이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고. 근데 아무리 2급이라도, 우리 같은 등급의 각성자들은 다칠 수가 없거든. 내가 궁금한 건 형이 왜 이렇게 다쳐서 나왔냐는 건데. 혹시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머릿속에 데빌루데스가 떠올랐다. 마계의 후작이라고 했었지.
그놈이 다 처치했던 몹들을 다시 되살려 키메라로 만들어 내 공격을 가했다.
물론 한솔이랑 사람들을 지키느라, 내 몸 살필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심하게 부상을 입은 이유는 키메라가 생각 외로 강한 이유도 있었다.
칼질 몇 방에 처치했던 케르베로스보다 훨씬 강력했다. 마치 등급이 올라간 것처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동안 들어간 게이트에서, 마계… 관련된 얘기 들은 적 있어?”
“게이트 들어가면 호출기에 알림창이 뜨긴 하죠. 게이트 이름이나 보스 몹 이름, 등급도 나오고. 하지만 마계는 처음 들어 보는데.”
나는 데빌루데스를 만난 것을 백루찬에게 설명해 줬다. 마계의 후작이라는 명칭. 그리고 게이트 악몽의 참견.
아직도 닫히지 않은 그 게이트는 닫히지도 않았지만 안에서 몹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절반만 닫힌 거나 마찬가지랬다. 그 부분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볼 테니, 형은 이만 쉬어요.”
백루찬이 살살 눈웃음치며 링거가 꽂힌 손등에 쪽 뽀뽀했다. 소름이 와다다 돋아서 난 기겁하며 손을 빼냈다.
“미친놈아. 뭐 하냐.”
질색한 얼굴로 쳐다보니까 또 성자처럼 예쁘게 웃는다.
내가 네 얼굴에 약하긴 한데, 그냥 넘어갈 줄 알았다면,
“빨리 나으라는 나의 마음의 표시?”
“…….”
정답이다.
…졸라 잘생겼어, 하여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서 백루찬은 병실을 나갔다.
나는 그제야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아까 애들이 있을 땐 눈치 보여서 열지 못했던 시스템창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나는 일단 퀘스트창을 열었다.
[퀘스트: 게이트 ‘악몽의 참견’
데빌루데스의 애완견, 수문장인 케르베로스를 처치하라!
-케르베로스 처치: 완료
-제한 시간 내 생존: 실패 (생존자:8/8)
-데빌루데스가 던전 ‘악몽의 참견’을 닫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애완 인간을 기다리며 악몽의 참견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게이트를 완전히 닫으려면 ??? 하세요.]
퀘스트창을 본 순간 내 머리에도 온통 물음표가 떴다. 게이트를 닫으려면, 뭘 하라는 거야?
아니 그보다 애완 인간 어쩌고 하면서 소름 돋게 하더니 아직도 그러고 있어?!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미친. 아무리 봐도 저 물음표에 숨겨진 내용이 평범하거나 괜찮을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불안하다고…! 데빌루데스 이 변태 새끼 뭐야, 왜 이렇게 지독해. 마계 놈들은 다 그렇게 집착적이야?
나는 전혀 그 게이트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막혀 있다며. 그럼 안 가도 괜찮지 않을까.
“끄응….”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졸라 질척거리네 그놈 새끼. 하…. 일단 이건 좀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징그러웠던 키메라도 그렇지만 데빌루데스 그놈은 진짜 피하고 싶었다.
그 변태 새끼 위압감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백루찬의 말대로라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마계’라는 것도 나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일단, 이 내용은 뒤로하고 나는 메인 퀘스트창을 살폈다. 여전히 변한 내용은 딱히 없었다. 메인 캐릭터에도 백루찬만 떠 있고.
[퀘스트: 초전 박살의 메인 캐릭터들을 구하라!
다섯 명의 메인 캐릭터! ‘신’인 작가가 만들어 낸 이 캐릭터들은 세계를 구축하는 기둥이다. 이들이 죽으면 초전 박살 게이트! 세계는 부서지고 마는데-!
: 원래 시나리오를 통해 캐릭터들의 주요 에피소드를 보고 그들의 죽음을 막으십시오.
메인 캐릭터 –백루찬, ●Å■,■■■….
보상: 세계 평화, 귀환
실패 시: 세계 멸망, 죽음]
시나리오 쪽도 살펴봐야 하는데, 독서 스킬을 사용하기엔 지금 몸 상태가 좋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용만… 확인 안 되나… 라고 생각할 때, 시스템창이 내가 원하는 내용만을 담고 떠올랐다.
[‘종전의 기록’ 현재 페이지 수: 20/451
※!주의!※: 종전의 기록에 걸린 저주가 스킬 시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6%]
[시간 내로 일정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할 시, 당신의 수명이 단축됩니다.]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358일]
“…하.”
뒤늦게 확인한 스토리 진행률은 겨우 1%로 올랐고, 수명은 무참히 깎여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깎이진 않았다. 난 한 열흘 줄었을 줄 알았는데.
스토리 진행률 너무 처참한데. 역시 메인 캐릭터를 못 찾아서일까.
겪은 게 뭐가 많은 거 같아서 더 진행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 나는 시스템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메인 캐릭터라 생각했던 정희수가 아닌 정한솔이 각성한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단단히 꼬였다, 꼬였어. 정희수를 각성시켜야 하나? 어떻게? 그리고 각성했는데 메인이 아니면 어떡해?
한솔이가 각성할 때, 시스템창이 오류가 나긴 했어도 앞에 정씨가 나온 건 기억이 난다.
정말 둘 중의 하나라는 건데…. 하, 돌겠다 진짜. 일단 이건 정씨 형제랑 자주 보면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이제 각인 내용을 눈앞에 띄웠다.
[※각인 주의: 대상의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컨트롤 비정상 확률: 50%]
[각인 대상: 백루찬, 정한솔]
각인 대상을 알려 주는 창이 새로 떴다. 나는 당황했다. 뭐야? 한솔이는 알겠는데 백루찬은 대체 언제? 아니 무엇보다 나는 각인 방법도 모른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각인, 각인…. 한솔이와 백루찬이 겹치는 게 뭐가 있지. 그러다가 나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둘 다 시도했던 게 하나 있었다. 통성명.
백루찬과는 모르젠트 사무실에서 통성명을 했다가 그때, 창문으로 뛰어내리면서 시스템창이 떴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땐 너무 정신없어서 볼 생각도 못 했는데. 혹시 각인에 대한 내용이었던가?
한솔이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주의를 돌리기 위해 꺼냈던 말이 하필 각인 시동어 같은 거였다.
통성명으로 각인이라니, 각인이란 게 원래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어? 백루찬과 얽히기 위해 껴안고 난리 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통성명같이 간단한 거였으면 진즉 알려라도 주든가…. 하여간 시스템 너무 불친절하다.
어쨌든 그래서 한솔이랑 백루찬이 각인이 되었다 이 말이지…….
한솔이는 나에게 애착심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지는 한솔이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50%의 확률이라지만… 매번 사기 치는 시스템창이 순순하게 그 확률로 컨트롤에 관여하진 않을 거란 거에 내일 아침을 걸 수 있었다.
분명 그냥 100%로라고 봐도 무방할 테지.
한솔이는 그렇다 치고…. 그래서 백루찬은 나에게 느끼는 게 뭘까.
어쩐지 다시 만난 백루찬은 좀 느낌이 이상했다. 이상하게 다정한데, 내 감각은 묘하게 싸하다고 부르짖고 있달까.
컨트롤되지 않는 감정. 아무리 생각해도 좀 위험한 거 같았다. 나한테 어떤 감정을 느껴…. 라고 물어보는 것도 존나 이상하다.
무엇보다 백루찬은 지금 유일하게 확인된 메인 캐릭터였다. 더 친해지고 잘 붙어 있어야 이놈이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구출할 수 있었다. 그래야 세계 멸망을 막으니까!
근데 이놈이 과연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가 올까…. S+급인데.
아, 갑자기 막 연기 내뿜고 그러고 싶네.
이전 세계에서도 친구 따라 아주 가끔 담배를 피웠었지만, 차해준은 담배를 아예 피우지 않았기에 나도 손대지 않았다.
답답할 땐 또 니코틴 한번 빨아 줘야 하는데….
그래도 이 몸은 한 번도 피우지 않은 순정이니까…. 참자.
나는 담배 대신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환하게 트인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진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악몽의 참견 앞에서 과민 반응 보이던 우반희가 떠올랐다. 그놈…. 피한다고 피해질까. 각본인데. 그래도 모르젠트가 보증한다고 홍희가 호언장담을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송류진은 또 어떻게 하지?
유일무이한 친구에, 학교도 같이 다닌다. 송류진은 특히나 사람 죽일 것처럼 쳐다보던 우반희랑은 또 직장 동료다.
아니 얼굴을 어떻게 보지? 학교 가면 당연히 만날 텐데. 피한다고 해도 매번 피할 순 없을 거 아냐.
…또 휴학?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그건 싫었다.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는 건 ‘차해준’의 오래된 목표였다. 그걸 방해하긴 싫었다. 사실 각성자라고 이미 들켜서… 큰일이긴 한데.
아, 머리 아프다. 나는 다시 벌러덩 뒤로 누웠다.
…한야인 것만 최대한 숨기면 되지 않을까. 이번 게이트 일도 사람들 살리려고 나섰던 거니까….
나 아니었으면 진짜 다 죽었을 거라고. 이 정도면 ‘차해준’도 조금 이해를 해 줘야 해. 너도 항상 남모르게 사람들 구하고 다녔잖아.
각성자인 걸 들켜서 미안하다, 과거의 차해준. 어떻게든 무사 졸업까지 가 볼 테니까, 걱정은 마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깊은 잠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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