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자 그럼, 여기서 이만 해산! 안뇽!”
홍희가 발랄하게 박수를 짝 쳤다. 카리나는 이미 다해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일대를 떠나는 오토바이 시동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송류진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여는 우반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라앉은 얼굴은 뚫어지게 차해준을 보고 있었다. 백루찬이 끌어안고 있는 차해준을.
“…형 제발, 이번엔 보내 줘. 이번만 있는 건 아니잖아.”
우반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뺨이 움찔 떨렸지만, 우반희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래, 어차피 신문할 길은 많이 있다.
설마 막판에 그 모르젠트가 나설 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럼 저들도 알고 있나. 차해준이 바로-.
우반희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송류진은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각본의 황태자로서 백루찬의 경험에 뒤진다고 하지만, 같은 S급인데도 차해준을 너무 쉽게 빼앗겼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손안에 아쉬움이 진득하게 남았다. 마음에도.
백루찬은 홍희와 함께 차해준을 데리고 갔다.
몬스터 같은 나비를 부리던 소년도 백루찬을 따라갔다.
송류진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
“…목적은 이뤘어요?”
커다란 오버 핏 후드 티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워커를 신은 소녀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카리나 앞으로 다가왔다. 카리나는 짜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말이 진짜야. 느껴지는 마력이 달라.”
“와, 진짜 S급? 옆에 꼬맹이도?”
“2급을 각성자 혼자서 깬다는 게 S급 아니면 말이 안 되지. 그 꼬맹이도….”
카리나는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에 멀리서도 몸을 못 가누는 남자가 보였다.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어린 소년도.
카리나는 쓰게 웃었다.
“…개짜증 나게. 그놈 말이 다 맞아 들어가잖아.”
이 주 전 카리나를 찾아온 검은 로브의 남자.
자칭 미래시(未來視)를 가지고 있다는 남자는 수상한 몰골로 카리나에게 접근해 게이트를 예언하고, 거기서 S급 각성자 둘이 나온다는 것을 말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서 잡아 족쳐 보려고 했는데, 남자는 예언을 하고선 픽 기절하더니, 자신이 여기 왜 와 있는지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더 수상해져서 한동안 길드 건물에 감금해 놓고 지켜봤지만 남자는 덜덜 떨며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정신 감응 스킬이 있는 각성자가 그의 머릿속을 뒤져 봤지만,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딱 끊긴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각성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이 남자를 조종해서 카리나를 만나게 한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카리나가 아는 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소녀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맞아 들어가도, 우리 입장은 변함없잖아요. 사이비랑 붙어먹기엔 우리 크기가 너무 크지. 그럴 필요도 없고.”
소녀의 말에 카리나는 말없이 떠올렸다. 남자의 로브에 새겨져 있던, 검은색의 해 모양 엠블럼을.
잠시 생각하던 카리나는 소녀의 말에 피식 웃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맞아. 짜증 나니까 신경 쓰지 말자고. 지랄 나면 확 뒤집어엎으면 되니까.”
“까아- 역시 우리 길마. 생각이 척척 들어맞는다니까!”
소녀가 신나서 카리나의 뒤에 올라탔다. 곧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뿜으며 거리의 어둠을 뚫고 사라졌다.
***
열이 오르고, 몸이 달달 떨렸다. 식은땀이 폭포수같이 흘러내린다.
차를 타고 길드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는 기절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읽을 때면 잘만 기절하더니 지금은 왜냐, 엉?
시나리오를 읽고 받는 상태 이상 고통이 이것보다 더 심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도긴개긴 또이또이라고. 씨발….
백루찬이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요. 지금 포션 쓰면 제대로 안 아물어서 나중에 더 고통스러워.”
그 말에 이를 꽉 깨물었다. 케르베로스에게 씹혔던 허벅지가 아리다. 백루찬은 여유가 가득했다. 그 꼴이 얄미워 미칠 것 같았다.
“한솔아, 너는 더 다친 곳 없어?”
정희수가 백루찬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멍하니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니 화들짝 놀라며 한솔이에게 말했다.
한솔이와 정희수는 어쩌다 보니 모르젠트 가는 길에 합류하게 되었다. 각성한지라 등록도 해야 하지만 한솔이가 아직 어린아이다 보니 각본도 쉽게 손을 써서 끌고 갈 수 없었다. 그사이 홍희가 치고 들어와서 정희수에게 같이 가자고 꼬드긴 것이다.
정희수는 한솔이가 나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홍희의 제안을 수락했다.
지금도 한솔이는 나만 보고 있었다. 나만 졸졸 따라다니고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게 아무래도 각인 부작용 같다.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정희수는 한솔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담요를 끌어서 목까지 덮어 주며 또 나를 힐끔댔다.
새끼야, 뭘 보냐… 환자 처음 봐?
신경질이 잔뜩 났지만, 간신히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체감상 20분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차가 멈췄다.
우리는 고층 빌딩으로 된 모르젠트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홍희가 미리 연락한 길드원 몇이 로비부터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백루찬은 나를 들쳐 엎고 병동까지 함께 갔다.
중간에 한솔이도 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해서 따로 보내고, 홍희가 이를 갈며 각본 욕을 하더니 길드원 증명해야 한다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백루찬만이 남아 나를 병실로 데려다줬다.
병실로 들어서자, 백루찬은 나를 푹신해 뵈는 침대에 내려놨다.
등이 닿기만 해도 따갑고 통증이 몰려와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하 씨발… 진짜 뒤질 것 같다….
몇 번이고 한 생각을 반복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야, 백루찬 갔나?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앞을 보는데, 숨소리조차 죽인 백루찬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표정 없이 나를 빤히 보던 백루찬이 웃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새롭네요. 근데 어떻게 볼 때마다 다쳐 있을까, 우리 형은.”
“윽….”
우리 형은 개뿔이….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눈을 감았다.
대답할 힘도 없었다. 끙끙대며 앓고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를 꾹 누르는 손길이 있었다.
“악…! 흐으, 읏!”
고통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백루찬이 손을 뻗어 상처 난 옆구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발작하듯 몸을 떠는데도, 백루찬은 상처를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미, 친놈아! 악!”
나를 끌어안으면서, 백루찬은 이제 내 뒤로 팔을 뻗어 등을 더듬었다.
축축하게 핏물이 배어 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고통에 놈의 팔을 움켜쥐곤 파르르 떨었다. 이 미친 새끼가…!
“흣- …아, 아프다고, 씨발아….”
이제 턱도 덜덜 떨려 말하는 데 힘이 쭉 빠졌다.
간헐적으로 떨면서 백루찬의 가슴에 머리를 박았다.
씨발놈… 환자 데리고 뭐 하는 거야.
화가 나는데 고통이 극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리 위로 백루찬이 피식대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하네.”
“아흑- 야, 그만…!”
팔을 뻗어 놈을 말려도 놈은 상처 난 몸을 주무르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움켜쥐고 건든 다음에야 놈은 나를 놔줬다.
좁은 침대에서 몸을 뒤로 빼며 난 헉헉댔다.
씨발놈이 환자 가지고 무슨 장난질이야….
백루찬은 자신에게 멀어지려 애쓰는 나를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였는데 입술은 말려 올라가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짜증 났다.
베개를 들어 놈에게 집어 던졌다.
백루찬은 가뿐히 받아 들곤 다시 탁탁 털어 내려놨다.
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치료 물품을 들고 허둥지둥 들어왔다.
“형, 푹 쉬어요. 여긴 안전하니까.”
백루찬은, 마치 안심하라는 듯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병실을 벗어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새끼가… 눈치는 더럽게 빠르지.
게이트에서의 전투 여파로, 나는 아직도 긴장하고 있었다.
몸이 아픈데 신경 줄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발사될 총알 같았다.
…미친놈, 어떻게 알아챈 거야.
나는 마치 그 한마디를 기다렸던 것처럼 꼿꼿이 긴장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제야, 가물가물하며 정신이 멀어지고 눈이 감겼다. 기절이었다.
***
백루찬은 병실을 뒤로하고 복도를 빠져나왔다.
모르젠트엔 헌터들을 위한 수준급 의사와 힐러,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차해준에 대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심하게 다쳤지만, 그래도 금방 회복할 것이다.
안 죽었으면 된 거지. 백루찬은 태평했다.
밖은 이제 저녁이었다. 오가는 길드원들에게 웃으며 인사해 준 백루찬은 긴 복도를 지나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옅게 피가 묻어 있는 손에선 혈 향이 진하게 났다.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백루찬은 손바닥을 코앞에 대곤 살짝 혀를 내밀었다.
살결을 훑는 감촉과 함께 비릿한 맛이, 입 안에 감돈다.
백루찬은 이것 참 곤란하단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심각한 상처였는데, 더 헤집고 싶어지면 이건 무슨 감정이지.
가학심인가?
백루찬은 생각했다. 아파서 내는 신음인데도 정신을 홀려서 저도 모르게 더 심하게 건드려 버렸다.
잔뜩 찡그려진 표정, 바들대는 몸뚱어리.
힘도 쓰지 못하고 제 팔을 밀어내지도 못하던….
차해준.
더 보고 싶다. 끙끙대는 것을.
제 손으로 그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신음을 내뱉게 하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 끓어 올라왔다.
감정의 변덕이 근래 죽 끓듯 하더니, 차해준을 보고 더 심해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누가 소리 지르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빨리 저놈을 죽여, 아니 저놈을-.
백루찬은 여상한 얼굴로, 웃었다.
제 코트에 피 묻은 손을 쓸어서 닦아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든. 지금은 또 제 손에 들어왔다. 짜증 나게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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