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칼 단발 소녀는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눈을 반짝 빛냈다. 볼이 발그레 물든 얼굴은 수줍으면서도 기대에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대체?
“이 오빠가 철벽같은 울 길마의 마음을 뺏어 간 남자란 말이지?”
발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빙그르르 돌아서 슬금슬금 다가온다. 뿜어내는 기세가 상당히 저돌적이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오금이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칼 단발 소녀는 내 앞으로 바짝 붙어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백루찬한테 길마라더니 길드원도 어쩜 이리 똑같이 얼굴부터 들이대냐.
말랑말랑할 것 같은 볼을 가진 소녀는 중학생 정도로 보였고, 눈이 무척이나 컸다. 가까이서 보니 홍채가 주황빛을 품고 있었다. 오, 한국인에게선 절대 볼 수 없는 눈빛.
여긴 소설 속이라 좀 다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동안에도 나를 빤히 보던 소녀가 뒷짐을 지고 배시시 웃었다.
백루찬이 소녀를 소개했다.
“홍희. 우리 길드 부길마.”
“안 궁금했다.”
“아잉~ 우리 길마님과 러브러브하는 오빠인데 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홍희가 수줍게 웃으며 볼에 양손을 대고 몸을 꽈배기처럼 비틀기 시작했다.
“일단 러브… 그런 거 아니고. 단단히 오해를 했나 본데-.”
“길마가 회사까지 데려왔는데 아니라고? 말도 안 돼에~ 우린 원래 사내 연애 금지인데, 오빠는 잘생겼으니까 허락해 줄게~.”
“허허….”
어이가 없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부끄러운 척하면서 나를 힐끔힐끔 보며 말하는데 일부러 멕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백루찬도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좋은 분위기 내가 방해해서 어쩌나~. 이제라도 비켜 줄까? 응?”
자리를 비켜 주겠다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 행동이 궁금한가 본데! 원하는 걸 보여 줄쏘냐. 일단 그런 사이도 아니라고!
아니 그보다 사내 연애는 무슨 소리야.
“무슨 사내 연애야, 난 길드 가입한 적도 없는데.”
“에이 다 알아~. 여기까지 와서 뒤로 빼기는!”
음흉한 얼굴로 웃던 홍희가 볼을 부풀리며 팔짱을 꼈다.
“근데, 내가 아무리 어려 보여도 초면에 반말은 실례죠. 아저씨!”
어…. 그, 그쵸.
“아,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19살!”
……그래 인마. 어리잖아 어리잖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깐 오빠라더니 이젠 아저씨냐. 아저씨란 말은 약간 타격이 있었다.
“그래서 오빠, 우리 길마님과 러브러브 인정? 야리꾸리한 자세로 둘이 뽀뽀라도 하려고 했는데 내가 방해해 버렸잖아.”
“무슨 소리야. 날조하지 마!”
“으아아앙 귀여워! 길마가 이래서 반했구나! 이건 사기야!”
“뭐가 사기야!”
“잘생기고 귀여우면 사기야! 내 마음의 사기꾼!”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하, 이젠 대꾸도 지친다. 홍희는 지치지 않고 떠들며 몸을 흔들었다. 한쪽 팔이 붙잡혀 내 몸도 같이 흔들렸다. 그걸 무해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백루찬이 말했다.
“희야, 네가 원하던 사람이야.”
“내가 원하던 사람?”
“한야.”
“헉? 진짜 한야?”
나는 떫은 표정으로 홍희와 백루찬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한야는 내 검 이름인데, 왜 갑자기 한야를 찾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내가 랭킹 1위 그놈인 걸 아는 건가…. 역시 검이 특정되긴 하지. 그래도 꺼낸 건 잠깐이었는데 말이다. 고심하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백루찬과 홍희가 나를 빤히 보고 서로 눈을 맞췄다.
“음… 모르는 거 같지?”
“모르는 거 같네, 희야.”
“모를 수가 있나?”
“그럴 수도 있지.”
“둘만 얘기하지 말고 말해 봐.”
“우리 길마가 함부로 사람 줍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 데려왔길래 설마 했지. 그런데 정말 한야였다니…! 근데 자기가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니! 아아- 졸라 러블리해서 쓰러질 것 같아~.”
아무래도 차해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알려진 검 이름을 따서 한야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어떻게 불리는지도 모르고 관심을 안 두고 살았었냐? 그게 가능해? 정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니면 기억의 공백일 수도 있다. 이놈의 시스템, 하여간, 기억을 넣어 줄 거면 제대로 넣어 주든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자꾸 빠트리잖아!
홍희가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짚으며 백루찬에게 슬쩍 몸을 기댔다. 백루찬은 웃으면서 그런 홍희를 받아 줬다. 러블리…. 시꺼먼 스물다섯 아저씨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니냐?
하, 나도 모르게 아저씨란 말을 담아 두고 있었는지 뾰족한 반응이 나와 버렸다. 나는 이마를 벅벅 긁다가 물었다.
“내가 왜 한야야? 나 아닌데.”
“한야! 빙룡 나탈리스를 한 방에 날려 버린 차가운 밤의 주인! 한국을 구한 영웅인데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아무도 몰라! 그래서 나탈리스가 뱉어 낸 검 이름을 따서 한야라고 칭하지! 보통 한느님이라고 불러! 우리 한느님을 모른다니 당장 사살… 아 본인이지.”
“……나 아니라니깐.”
홍희의 흥분에 찬 외침에 작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홍희는 전혀 듣지 않고 다다다 설명했다. 온갖 오글거리는 단어들이 지나간 거 같은데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니 당황스러웠다. 칭호가 차가운 밤의 주인이더니, 이 뜻이었나.
아까 여기가 길드라고 했었다. 헌터물에서 길드가 빠지면 안 되긴 하다.
백루찬이 길마로 불리는 곳…. 길드 마스터 정도는 할 것 같은 캐릭터긴 했다. 근데 무슨 길드인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끙 신음을 내뱉고 홍희에게 물었다.
“질문, 그래서 여긴 무슨 길드인데?”
“와- 이 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문명 세계랑 단절되기라도 했어여?”
“…자의식이 장난 아닌데. 모를 수도 있지.”
“우와아아……. 진짜 이단인가?”
“뭔 소리 하니….”
이제 받아치기도 힘들었다. 홍희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백루찬이 길마로 있는 길드 이름은 한국 삼 대 길드 중 하나로 이름은 ‘모르젠트’, 줄여선 몰젠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해 줬다. 나머지 삼 대 길드의 이름은 얼라이브, 다해, 등등이 있는데 몰라도 된다…고 말하는데, 자기 길드만 알라 이거 아냐…. 수작질이 너무 뻔했다.
“근데 왜 모르젠트야? 전기 피카츄라길래 벼락, 썬더볼트 그런 거 쓸 줄 알았는데….”
“전기 피카츄 말고 국산 피카츄. 오빠, 작명 센스 완전 구려.”
홍희의 일침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구리긴 했다.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서 시나리오와 이 세계를 제대로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메인 캐릭터도 찾지. 근데, 백루찬이 메인이면, 시스템은 뭐라 표시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저런 놈이 메인 주인공이 아닐 리가 없는데.
그리고 그때, 내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떴다.
[‧˚₊*̥⸜(* ॑꒳ ॑* )⸝‧˚₊*̥]
뒤늦게 나타나서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퀘스트: 초전 박살의 메인 캐릭터들을 구하라!
다섯 명의 메인 캐릭터! ‘신’인 작가가 만들어 낸 이 캐릭터들은 세계를 구축하는 기둥이다. 이들이 죽으면 초전 박살 게이트! 세계는 부서지고 마는데-!
: 원래 시나리오를 통해 캐릭터들의 주요 에피소드를 보고 그들의 죽음을 막으십시오.
메인 캐릭터 – 백루찬, ●Å■,■■■….
보상: 세계 평화, 귀환
실패 시: 세계 멸망, 죽음]
[메인 캐릭터, ‘백루찬’을 확인했습니다! 캐릭터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그를 죽음에서 구해야 합니다!]
[※각인 주의: 대상의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컨트롤 비정상 확률: 50%]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5%]
너무 순식간에 많은 창이 눈앞에 떴다. 메인 퀘스트 밑에 백루찬의 이름이 박혔다. 캐릭터를 찾으면 이름이 생기는 건가? 그리고 각인은 또 뭐지?
진행률은 눈곱만큼 올랐다. 진짜 쩨쩨하게 이러기냐. 세계의 기둥이라는 캐릭터를 한 명 찾았는데…. 엄연히 말하면 찾았다기보단 내 앞에 나타난 거지만.
각인이란 말은 좀 어감이 그랬다. 상대방에게 나를 각인? 이름이라도 새기라는 건지…. 그리고 주의 사항도 상태 이상에 필적할 만큼 좋지 않은 내용이었다.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라면, 만약 백루찬이 나에게 분노를 느낀다면 그게 50%의 확률로 조절이 안 된다는 거 아냐….
그리고 왜 각인 방법은 안 알려 주냐고!
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홍희가 내가 보는 곳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각인, 각인이라…. 일단 앞에 있을 때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백루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 안 했지?”
“해야 해요? 형은 제 이름 아시잖아요.”
“내 이름은 모르잖아.”
“한야인 걸 아는걸요?”
백루찬이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펄럭이는 것처럼 내려갔다 올라간다. 음, 이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데…. 백루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내 고개가 위로 들리는 것을 보니, 백루찬의 키가 한 뼘은 더 큰 거 같다. 차해준도 작은 키는 아닌데 말이다. 가까이 다가와 나를 빤히 보는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참 알 수 없는 표정이라고 생각하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차해준이야, 내 이름.”
백루찬이 눈을 내리깔고 내가 내민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나는 좀 뻘쭘함을 느꼈다. 야, 빨리빨리 좀 그냥 좀 잡아 봐라.
계속 보고만 있길래 결국 내가 백루찬의 팔을 당겨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악수.”
“흐응.”
“내 이름이 뭐라고?”
“차해준.”
…손을 한참 흔들어도 각인되었다는 시스템창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씨부랄 뭐냐고…. 방법이 뭔데! 뭐 포옹 같은 거 해야 하나? 이거 미연시야? 현판이잖아! 보통 이름 말하면 아-! 하면서 눈이 반짝반짝 아롱아롱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손을 흔들며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자, 백루찬은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모야 모야, 이거 모야. 분위기 이상해.”
옆에서 홍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흠, 남자끼리 이러는 거 좀 그런가? 시스템창은 곧 죽어도 나타나질 않았다. 에휴, 하며 손을 떼려 힘을 푸는데, 갑자기 백루찬이 내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이제 놔도 되는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백루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백루찬이 한 발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빠지자, 백루찬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예쁘게 웃으면서, 수줍은 듯, 고백하는 듯 말했다.
“형, 우리 길드로 와요.”
“어?”
…와, 얼굴 보고 한순간에 오케이 할 뻔했다. 나는 되물었다.
“가입하라고?”
“네. 형도 각본부 눈을 피하려면 피신할 지붕은 있어야 하잖아요.”
홍희가 끼어들며 말했다.
“각성자 관리 본부도 모르는 건 아니지, 오빠?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는 위험인물로 분류돼. 특히 오빠같이 강한 각성자는 요주 인물로 추격도 받고 있어. 잡히면 아주아주 귀찮아진다고! 소문에 듣기론 군에 있는 각성자 연구소로 빠진다는 얘기도 있는데…. 아무튼, 그동안 어떻게 각본부의 눈을 피했는지는 모르지만, 길드에 들어오면 귀찮은 애들이 들러붙지 않게 잘 케어해 줄게.”
저들 말로 한국 삼 대 길드 중 하나가 나에게 가입하라고 제시를 한다…. 가입이라기보단 입사겠지만, 근데 어쩐지 좀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홍희가 말을 덧붙였다.
“월마다 10억씩 쏜다. 큰맘 먹고 결정한 거야.”
“컥-”
돈 얘기를 듣자마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고 말았다. 10억? 말이 되냐? 월급이 10억이라고? 놀라서 쳐다보자 홍희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근데, 보통 헌터물 보면 쓰는 돈의 단위가 다르던데…. 일 년으로 따지면 120억…. 보통 던전이나 게이트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그 정돈 우습게 벌던데. 다른 소설에서. 적은 거 아닌가?
“이런, 눈치챘다. 희야.”
백루찬이 내 표정을 보더니 혀를 차며 눈을 굴렸다. 홍희가 따흐흑하는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세상 물정 모르길래 10억으로 퉁치려 했더니만!”
“사기 그만 쳐, 이놈들아!”
그럼 그렇지, 단위가 다르니 10억은 껌 값인 거다. 아오, 속을 뻔했어! 혹할 뻔했다고! 자본주의 세계의 쓴맛을 한껏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나는 홀라당 넘어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이렇게 강압적으로 이유 설명도 없이 데려가려는 곳은 신뢰를 못 하겠다. 무엇보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시스템이 내 준 퀘스트가 떡하니 버티고 있단 말이다.
“절대 싫어. 네버. 절대로.”
“으에엥, 뭐가 그렇게 강경해!”
백루찬은 여전히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내가 팔을 털어 내자 그제야 느리게 놔준다.
홍희가 앓는 소리를 하며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빠르게 몸을 피해 문 앞으로 가 문고리를 잡았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서 집에 가서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이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홍희가 그렇게 소리쳤다. 뒤에서 백루찬이 손뼉을 짝짝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랭킹 1위이고 그걸 아는데 덤비겠다는 거냐. 후후, 그럼 본때를……이라기엔 아직 스킬도 다 써 보지 못했는데.
내가 주춤대자 홍희가 씩씩거리며 양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러자 차라랑- 하며 던X 앤 파이터에서나 보던 화려한 건틀릿이 팔꿈치까지 이어지며 나타났다.
오, 개멋있다….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홍희의 양 건틀릿에 주홍빛의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권 찌르기 같은 동작으로 내가 있는 방향에 날렸다!
나는 기겁하며 창가 쪽으로 몸을 피했다.
-콰아앙!
비싼 원목으로 된 것 같은 양 문이 박살 나고 입구 쪽 벽면이 둥그렇게 도려내진 것처럼 사라졌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미친, 진심이냐!”
저거 맞았으면 죽었잖아! 백퍼 죽었다고!
내가 와락 소리치자 홍희가 씨익 웃었다. 백루찬은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길마 놈이란 게 자기 길드가 망가지고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냐!
홍희가 다시 또 자세를 잡는다. 건틀릿이 이번엔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
“자, 또 간다앗!”
“아오, 저게!”
피할 곳이 없었다. 나는 짧은 순간에 판단해서 창문을 깨기로 결심했다. 결심과 동시에 소파를 뛰어넘고 몸을 날렸다. 큰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져 나갔다.
백루찬이 소리쳤다.
“여기 30층인데….”
씨바아아알, 그건 좀 진즉에 말하라고오!
허공에 1초 정도 떠 있다가 내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몸을 휘감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뒤에서 백루찬이 소리쳤다.
“형! 나는 백루찬이에요!”
백루찬이 그렇게 말하자,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던 내 눈앞에, 시스템창이 떴다.
하지만 볼 새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그림자 밟기(Lv.99) 발동.]
순간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과 함께 눈 깜박하는 사이 지면에 발이 닿았다. 나는 무릎을 굽히며 착지하곤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빠르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음을 옮겼다. 몸이 삐거덕거리며 걷는 게 어쩡쩡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면 졸라리 놀랐거든, 씨발…. 하하 넋 빠진 표정으로 손과 발이 같이 나가는지 따로 나가는지도 모른 채 일단 걸었다.
집, 집에 갈래….
***
깨진 창문에 건틀릿을 끼고 팔을 괸 홍희가 발을 까닥거리며 밑을 내려다봤다. 순식간에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홍희는 고개를 돌려 백루찬을 바라봤다.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서늘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잠겨 있었다. 저럴 땐 꼭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홍희는 한숨을 푹 쉬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진짜 한야 같아?”
“…….”
“스킬 보니 진짜인 거 같긴 한데, 생각보다 무방비하긴 해.”
“…진짜 같아.”
“어떻게 할 거야?”
홍희의 질문에 백루찬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죽일까?”
홍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차니차니 루차니.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던 고얌? 그렇게 찾았으면서~.”
감았던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리며, 백루찬은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눈동자가 열렸을 때가 떠올랐다. 광신도 무리인 ‘검은 해’가 자신의 엄마를 그곳에 끌고 갔던 날이.
“사랑하지.”
그리고, 그 게이트를 가차 없이 닫아 버렸던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어서 미치겠는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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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