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차해준은 용을 마주 보고 있었다. 산양의 그것처럼 구부러진 뿔을 단, 거대한 괴수는 피막으로 된 날개를 펴고 소름 끼치는 괴성을 사방에 뿌려 댔다. 괴성에 담긴 살기가 공포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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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포한 울음이 땅을 가르고 하늘을 뒤집을 것 같았다.
악마의 눈동자,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수들조차 나탈리스에게 짓밟혀 곤죽이 되었다.
펄럭이는 날갯짓, 부서지는 빌딩 숲. 황폐해진 도시.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서서, 차해준은 검을 빼 들었다.
금이 가고, 날이 모두 닳아 빠진 낡은 검은 그의 키보다 길었다. 거기에 새파란 마력이 덧씌워졌다.
무엇이라도 베어 버릴 듯, 시퍼렇게 빛나는 장검을, 차해준은 똑바로 세웠다.
검날 사이로 날카로운 눈매가 보였다. 불그스름하게 젖은 눈은 결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코앞에 든 검을 손목을 돌려 밑으로 뻗는다. 그리고 차해준은 허공에 몸을 날렸다.
차해준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막을 거야.’
…무엇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하얀 LED 등에 눈이 부셨다. 씨팔 이건 또 무슨 개꿈이냐… 라고 하기엔 차해준이 나왔다.
나탈리스와 싸울 때면 초전 박살 게이트의 프롤로그일 텐데, 꿈에서 영화처럼 재생된 것은 생판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뜨문뜨문 이어진 기억의 공백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여 주는 건가.
이상하게 차해준이 존나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도 차해준을 따라 눈시울이 붉어질 것처럼. 생판 모르는 곳에 떨어졌더니 공감 능력이 비대해졌나…….
라고 생각할 때, 나는 누워서 흠칫 놀랐다. 옅은 회색빛 천장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이상했다. 내가 기절했던 곳은 도로 한복판이었는데, 천장이 하늘이 아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자 웬 낯선 방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으으음….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안 그래도 낯선 곳에 떨어져서 어린 양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또 낯선 장소라니. 나 낯 많이 가린다고.
시스템아, 배려 좀.
“…….”
눈앞에 아무런 창도 뜨지 않는다.
하여간, 꼭 이럴 땐 답이 없더라.
나는 조용히 덮어져 있던 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바닥을 딛고 일어나는데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각혈로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그런가.
잠깐 휘청이다가 중심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흐릿했던 눈앞이 그제야 또렷해졌다.
내가 일어난 침대 옆엔 파티션 같은 벽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옆엔 문 없이 뻥 뚫려 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으며 그곳으로 나갔다. 그리고 펼쳐진 풍경은 탁 트인 사무실이었다.
두어 칸 정도 되는 계단이 있고 동그랗게 난 계단 밑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집무를 보는 듯한 책상은 훤하게 뚫린 창문 앞에 있었다.
어우, 창밖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고층 빌딩의 외벽만 보이고 뻥 뚫린 게 답답한 내 속까지 뚫어 주는 것 같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는데, 소파 사이로 작은 신음이 들렸다.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쓰고 있던 모자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앞을 살짝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엔, 천사가 있었다.
“…….”
미친, 나는 입틀막하고 숨을 참았다. 천사, 아니 백루찬이, 졸라리 곱디고운 얼굴로 코트를 이불처럼 덮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백루찬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나 보다. 안 그렇게 생겨서 잔정이 있구나, 네가. 불쌍한 사람에게 온정도 베풀고. 나는 감사를 듬뿍 담아 백루찬의 얼굴을 살펴봤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귓불이 벌게지는 느낌과 충격을 받았다.
다 큰 성인(이 맞겠지) 남자 놈 자는 모습이 이래도 되냐. 얼굴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아니 왜 그냥 눈 감고 자고 있는데 성스럽냐고!
머리 뒤에서 후광이 번쩍이며 비너스를 따르는 빨가벗은 꼬마들이 나팔을 불어 댈 것만 같았다.
아니, 아까 도로에선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뭐지 이 후광. 이 효과.
세심하게 빚은 것 같은 이목구비, 날렵한 눈썹. 우아한 입매. 존나게 정성 들여 만든 세공품 같았다. 피부가 무슨, 도자기인 줄. 이거 사람 맞나.
본능적으로 한 발 다가가 백루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솜털이 이는 뺨이 보드라워 보인다.
와, 만져 보고 싶다. 이런 변태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내 안의 얼빠 본능이 이미 한참 자극당한 뒤라,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다.
손끝이 살짝 떨리며 뺨을 찌르려는 순간, 백루찬이 눈을 떴다.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이는 데 1분이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뺨을 찌르려던 손이 잡혔다.
백루찬이 내 손을 덥석 잡고 잡아당겼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돌려 빼낸 다음 쳐 냈다.
그러고선 제 손이 허망하게 비껴갈 줄 몰랐다는 것처럼 얼음처럼 굳어 버린 백루찬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아니 이게…. 이게 뭐야.
“아하하….”
아니, 내가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백루찬이 팔목을 붙잡고 한발 늦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
“아이고, 미안.”
굽신대며 허리를 굽히고 때린 부위를 살폈다.
흰 피부가 마치 벌칙으로 때린 것처럼 빨갛게 부어올랐다.
씨부럴 거, 차해준 인생 어떻게 살았길래 그냥 잡는 것도 이런 반사 신경으로 쳐 내냐고….
이걸 그냥 잡지도 못하고, 허둥대며 보고 있자니 백루찬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풉- 웃었다.
살포시 휘어지는 눈초리는 아까 자고 있었을 때의 후광을 뒤집어쓰고 졸라게 반짝였다.
“엉…?”
나는 졸지에 개멍청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백루찬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휘어졌다.
“아프진 않은데.”
“…엉?”
“그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질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요?”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남의 자는 얼굴이나 감상하고.”
백루찬이 눈을 흘기며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변태같이.”
윽, 직격탄이다. 속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나도 내가 변태 같다고 생각은 했어….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졸라 쪽팔리고 면목이 없었다. 근데 그런 찹쌀떡 같은 뺨을 보면 누구든 한번 찔러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라고 끝내주는 자기합리화가 변명했다.
나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크, 크음, 네가…. 나 살펴 준 거냐…요?”
분명 아스팔트에서 쓰러져서 깨어나면 응급실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백루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펴요?”
“동작역에서 말이야…요.”
내 말에 백루찬은 흘러내린 코트를 집어 들어 소파 등받이에 걸었다. 그러곤 다시 나를 바라봤다.
“뭐 그냥…. 그렇다고 해 둘까.”
백루찬의 대답에 나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어휴, 고맙다, 야. 나는 또 어떻게 거기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을 때였다.
순간 빠르게 움직인 백루찬이 내 어깨를 잡고 내 몸을 돌렸다.
시야가 돌아가면서 백루찬이 내 목을 움켜쥐려는 것을 팔목으로 막았다.
몸이 원래 백루찬이 누워 있던 소파에 쓰러졌다.
내 움직임을 구속하려는 듯 몸을 덮쳐 오는 백루찬을 밀치려 했지만, 놈은 체중을 실어 내 위로 올라왔다.
팔꿈치를 쇄골에 대고 목을 꽉 누르는 자세. 다른 손으론 내 팔을 부여잡고 꺾었다. 순식간에 당해 버린 일이었다.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리며 생각했다. 지금… 이게 모지?
“…지금 화내는 거? 뭐, 뭐 때문일까.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고작 그거 좀 찰싹, 했다고?”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자니 놈이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바짝 선 솜털까지 구경할 정도였다.
내가 인상을 구기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던 백루찬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서늘한 빛을 띤 눈동자가 번뜩이며 내 얼굴을 훑어 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살기가 어린 것도 같은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번갯불이 튈 것 같았다. 이 새끼, 감전 능력이 어디까지였지?
백루찬의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섞였다. 점점 살기에 바짝 올라왔던 긴장이 가라앉고,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다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허벅지 사이에 가둔 백루찬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난 또 혼자서 변태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내가 낮게 숨을 내쉬며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백루찬은 쥐어짜듯 팔목을 꾹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씨발… 야, 안 때릴 테니까 놔.”
“욕도 하네.”
“그럼 인마, 내가 부처라서 존나 욕도 안 하고 착하고 고운 말 쓰면서 폭력, 멈춰! 이럴 줄 알았냐?”
사람이 아무리 변태 같기로서니 취급이 이런 식으로 저질이면 구해 줘도 고맙다고 못 하지!
버럭 대며 따지자 백루찬은 빤히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난 형이 엄청 착해서, 오해했지 뭐야.”
“착해? 내가?”
“사람들 막 구해 줬잖아요. 오늘도 그랬고, 이 년 전에도.”
“시부랄 그게 착한 거냐. 걍 눈앞에 보이니까….”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는 입을 헙 다물었다. 내 얼굴을 보고 백루찬이 실실 웃었다.
“당신 맞잖아.”
무슨 얘기일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년 전이면 나탈리스가 나타났던 때다.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이 년 전 얘기를 왜 꺼내고 그래. 사람 찔리게.
무엇보다 나는 차해준의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사실 의무라기엔 거창한데, 그래도 왠지 지켜 줘야 될 거 같다고.
내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자 백루찬이 내 턱을 잡고 다시 자기를 보게 했다. 나는 잘생긴 백루찬의 눈을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인마 아무리 잘생겨도… 엉?
“맞잖아요, 형.”
백루찬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게 너무 은밀하고 치명적이게 유혹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더 이상 저 얼굴 보면 안 될 것 같다. 내 정조와 사회적 지위가 위험에 처할 것 같다. 코앞에서 백루찬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 이놈 뭘 눈치챈 거지…? 빙의 첫날부터 제가 너무 나대긴 했죠. 근데 뭘 보고…. 하.
근데, 차해준은 왜 한 번도 제대로 게이트 공략에 나선 적 없다가 나탈리스를 잡기 위해 나선 거지? 그 전에도 얼굴 가리고 게이트에도 안 들어가고 꼭꼭 숨어 있었으면서.
나는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번쩍 눈을 떴다.
코앞에 백루찬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의문 덕에 놈에게 신경을 돌릴 수 있었다.
‘초전 박살 게이트’에서 게이트는 아주 중요한 메인이벤트를 담당한다.
무작위로 열리는 게이트는 강력한 마력 파장이 일어나 현상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감지한 헌터들이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닫는다.
닫는다는 것은 안에 들어가 보스를 잡는다는 뜻.
잡고 나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고, 게이트는 닫힌다. 그러나 잡지 못하거나 마력 파장에 불안정하게 폭주할 때까지 시간을 끌게 되면 게이트 안의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이 발생된다. 이게 웨이브다.
이 년 전 나탈리스도 악마의 눈동자라 불리는 게이트의 보스 몹이었다. 게이트가 터져 나갔고, 몬스터 웨이브에 서울 한복판이 마비되었으며, 나탈리스가 빌딩 숲을 짓밟으며 등장했다.
차해준은 게이트에 들어가지도 않고 제대로 된 헌터 생활도 하지 않았으면서 왜 나탈리스가 나타날 땐 나선 거지?
판무에 내가 과한 개연성을 요구하고 있는 건가? 근데 이상하잖아. 조용하고 나서지도 않던 놈이 말이야.
갑자기 드는 의문에 내가 조용해지자 백루찬은 웃으면서 팔에 힘을 풀었다.
“이건 장난. 아까 너무 매몰차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든.”
매몰… 뭐? 생각하다가 백루찬의 말을 다 못 들었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고 압박이 풀리자 그제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개뿔….”
S급, 그것도 S+급이 마음에 뭘 입어? 다이아몬드급의 정신 방어 능력도 있으면서 개소리하지 마라….
백루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한쪽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와 백루찬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칼 단발을 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길마~ 특종이얌! 한야가 나타났다던데! 거기에 울 길마도 있었…!”
칼 단발 소녀가 힘차게 말하며 들어오다가, 백루찬과 그가 깔아뭉개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선 입을 떡 벌렸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다급히 숨을 들이켠다. 나는 지금 백루찬과 내 자세가 완전 이상하게 비쳐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해하면 어떡해! 내가 다급하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소녀가 한발 빨랐다.
“앗, 내가 이런 실수를…! 타이밍을 못 맞추고 방해해 버렸네. 하던 거 마저 해, 마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와락 소리치며 반박하자 칼 단발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처음 보는 오빠네. 드디어 울 길마가 짝을 만난 고야? 그런 고야? 이런 빅 사건이 내 앞에서 펼쳐지다니 진짜 안 믿겨…!”
“아니야!”
거세게 반박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백루찬을 밀치고 재빠르게 소파를 벗어났다.
백루찬이 헤실거리며 소녀에게 인사했다.
“희야, 좋은 꼴을 구경했네?”
“어맛, 진짜야? 진짜루? 으아아~ 몰라!”
“분위기 좋았는데, 어떡해, 희야.”
“아이 정말~ 어떡해, 내가 방해해 버렸어!”
방방 뛰며 얼굴을 붉히는 꼴이 내가 외치는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모양새였다.
백루찬 저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헤실거리면서 오해할 만한 소리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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