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 이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미풍이 불어와 얼음과 눈을 사르르 녹였다. 그리고 새순이 움트며 땅이 초록의 기운을 머금을 때쯤, 남녘에서 봄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3월, 봄의 시작.
오랫동안 기다려 온 덕일까. 결혼식 날은 유달리 볕이 좋았다. 하객들은 입을 모아 이처럼 맑고 화사한 봄날은 처음 본다고 했다.
대기실에서 이지운은 한껏 긴장해 있었다. 날이 더운 것도 아닌데 진땀이 나고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워 애꿎은 과자와 과일을 집어 먹고 연거푸 물을 마셨다. 그래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아, 그는 자꾸만 거울 앞을 서성였다.
“후우… 나 어때 보여?”
“좋은데. 배 나온 티도 안 나고.”
“그래?”
“어. 완전 괜찮아. 흰색 잘 어울린다, 너.”
이지운의 동기들이 그를 둘러싸고 한 마디씩 칭찬을 해 주었다. 처음 이지운과 서태천이 결혼을 발표했을 때 그들은 뒤로 자빠지는 시늉을 했지만, 이내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이지운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배가 조금 나오긴 했지만 섬세하게 핏을 맞춘 예복 덕분에 그리 티가 나진 않았다. 물론 이지운의 배 속에 망고가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저 어때요. 대리님들?”
“말해 뭐해. 이지운이 최고다.”
“본부장님이 운이 좋다고밖에는….”
민혜경 대리와 김민지 대리가 농담을 건네자, 긴장해 있던 이지운도 웃음을 터뜨렸다.
“신랑님. 이제 나가셔야 돼요. 시간 없습니다.”
식장 직원이 들어와 이지운을 재촉했다. 벌써 시간이 임박했다니, 화들짝 놀란 그가 다시금 거울을 봤다.
이지운의 동기들과 민혜경, 김민지가 박수를 쳤다.
“우리 먼저 나갈게. 준비하고 나와요!”
“네!”
이지운은 후우,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하고 힘차게 대기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약간은 쌀쌀한 기운이 감돌지만 엷은 꽃향기가 실린, 생생한 봄바람이 불었다.
이지운은 이르게 핀 꽃들로 가득한 신랑 입장로에 발을 내디뎠다. 야외 웨딩인 만큼 하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양옆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축하해요!”
“너무 보기 좋습니다.”
“행복해야 해요!”
이지운은 하객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길고 긴 꽃길을 걸었다. 앞쪽에는 서태천의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 언제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태천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지운은 또 환하게 웃으며 발길을 옮겼다.
“드디어 왔군요.”
이지운이 서태천의 옆에 서자, 서태천은 평생 기다려 온 사람처럼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얼어 있었다. 늘 단단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그 역시도 긴장할 때가 있구나. 이지운은 그런 그가 귀엽고 또 신기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한 1년쯤 기다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언제 나오나 했죠.”
검은 턱시도에 머리를 넘겨 한껏 힘을 준 남자가 긴장 역력한 얼굴로 말하자, 이지운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눈부신 남자가 나를 초조하게 기다렸다니. 어서 결혼해 줘야겠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주례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살리라 믿어요. 이지운 님, 서태천 님. 맞습니까?”
“네.”
“예.”
주례는 다름 아닌 두 사람의 담당 숙려 감독관이었다. 예식 주례를 부탁하니, 그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며 흔쾌히 주례를 수락했다. 서태천은 감사의 뜻으로 담당팀 전체에게 후한 선물을 돌리며 그들을 결혼식에 초대했다.
“그럼 키스로 그 맹세를 보여 주십시오.”
하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이지운의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감겼다.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리는 순간, 사방에서 축하의 인사와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이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주례의 선언이 내려지자 다시금 갈채가 쏟아졌다. 이지운과 서태천은 눈을 마주치고 무언으로 이야기했다.
드디어 결혼했네요.
무르기는 없습니다.
신랑은 두 사람이었지만 부케는 하나뿐이었기에, 둘은 힘을 합쳐 허공으로 부케를 던졌다. 그런데 둘 다 남자라서 힘이 너무 좋았던 걸까. 부케는 허공으로 붕 뜨더니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흡!”
민 대리가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도움닫기로 날아오른 그녀가 공중에서 부케를 낚아챘다. 마치 프로 축구 경기의 볼 경합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하객들이 열띤 호응을 담아 박수를 쳐주었다. 민 대리는 자랑스럽게 부케를 흔들며 소리 질렀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꽃 내음, 들뜬 사람들의 웃음 소리, 그리고 내 옆의 사랑하는 사람. 이지운은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의 행복이 얼마나 커다랄까, 기대만 해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뒤에 피로연이 열렸다. 테이블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와중에, 이지운과 서태천은 서 회장 그리고 최 여사와 한자리에 앉았다.
“그래 지운아, 아기는 잘 자라고 있다고?”
“네. 건강하대요.”
“역시 영어유치원 예약해 두길 잘했군. 내 선견지명 좀 봐.”
서 회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척했다.
“하여간 저 사람 앞서가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난 산후조리원 예약해 뒀다. 모든 시설이 최고급이니까 있고 싶은 만큼 있어.”
최 여사가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이제 우리는 가족이니까 함께 잘살아 보자.”
“네.”
최 여사의 따뜻한 말에 이지운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의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서태천, 그리고 정 많은 서 회장과 최 여사. 망고까지 해서 어느새 네 명의 새 식구가 생겼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의 따스함에 이지운은 가슴이 찌르르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살게요.”
“알아서 잘하겠지, 뭐.”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잘 살아라.”
어른들과 인사하고, 찾아와 준 모든 하객들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웨딩 카에 올라탔다.
“신혼여행 잘 다녀와!”
“무사히 다녀와!”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인천 공항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진지하게 의논해서 결정한 일이 있었다.
“김 기사님. 이 주소로 가 주시겠습니까?”
“여긴 행정 복지 센터 당직반이네요? 공항 가는 길에 있군요.”
“네. 맞습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토요일 오후에도 업무를 보는 당직 행정 복지 센터였다. 주말 근무는 시범 사업으로 구마다 한 곳 정도밖에 안 여는 데다가 곧 있으면 문 닫을 시간이었다.
운전의 베테랑 김 기사는 힘껏 액셀을 밟았고, 차는 6시가 되기 전 인천의 한 행정 복지 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나올게요!”
서태천과 이지운은 예복 차림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둘은 망설이지 않고 행정 복지 센터의 문을 열어젖혔다.
“서식이 있네요.”
“이거 작성하면 되겠군요. 어서 합시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서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인적 사항을 적고, 신원 보증해 줄 사람의 이름으로 김민지와 민혜경을 적은 다음 서명을 마쳤다.
“저. 혼인 신고 하러 왔습니다.”
이지운이 창구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창구를 지키고 있던 공무원은 둘의 차림을 보고 이제 갓 결혼식을 치르고 온 커플이겠거니, 어림짐작했다.
“네. 신분증이랑 신청서 이리 주세요.”
이지운과 서태천이 시선을 교환했다. 자꾸만 간질간질,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 이상한데.”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던 공무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조회 좀 해 볼게요. 좀 이상해서.”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서태천과 이지운을 빤히 보며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 두 분, 이미 혼인 상태이신데요?”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그녀를 보고 이지운은 결국 활짝 웃고 말았다.
“네. 알아요.”
“예?”
“그래도 다시 한번 혼인 신고 하고 싶었어요. 시간 뺏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지운과 서태천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센터를 빠져나왔다. 그들의 등 뒤로 공무원들이 어이없다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본부장님. 저희 혼인 신고 되어 있다는 사실 아셨어요?”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당하기 그지없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본부장님. 제발 저랑 이혼해 주세요!”
이지운이 열혈 연기를 펼쳤다.
때는 늦봄, 이지운이 가족 관계 증명원을 받아들고 뒷목을 잡던 날. 곧장 본부장실에 쳐들어가 다짜고짜 던진 멘트였다. 두 사람 다 그때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의 결말은 그때와 달랐다.
“싫습니다. 저는 이지운 주임과 이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허리를 껴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이지운은 마지못해 끌려오는 척하며 서태천의 품에 덥석 안겼다.
“앗,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본부장님하고 결혼하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기왕이면 애도 하나 낳죠.”
“뭐… 그럴까요?”
이지운의 웃음소리가 맑고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은, 이제 성공적인 결혼을 위한 신혼생활로 거듭났다. 언제까지고 손을 놓지 않을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나갈 나날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