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규모가 엄청나네요. 세상에….”
별장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더 대단한 규모였다. 통창은 가로로도 세로로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거실 풍경에 이지운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집이 큰 데 반해 집안에는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덕분인 듯했다.
“태천 씨. 이렇게 좋은 데는 처음 와봐요. 너무 고마워요.”
“기뻐해 주니 내가 더 고맙습니다.”
이지운은 2층에 올라갔다가, 3층 다락방까지 올라가 계속 집을 구경했다. 경사진 천장 면을 따라 자그마한 창이 나 있어, 밤이면 별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비밀 장소였다.
“망고가 좋아하겠다. 나중에 태어나면 꼭 여기 데려와야지.”
다시 1층으로 내려온 이지운은 침실 문을 열어 보았다. 가만 보니 이 집의 모든 공간은 전체가 다 하얀색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평소 검은색을 향한 서태천의 집착을 생각하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설마 나랑 망고에게 맞춰 준 건가? 침대도 포근하고 아늑한 침구로만 갖춰 놓았고, 온통 화사해. 태천 씨랑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기분 좋은 곳이야. 정말….
이지운은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침대에 눕고 말았다. 정말이지 잠이 잘 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창밖은 주홍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서태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으음… 몇 시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집어 올리는데, 마침 핸드폰에 알람이 와 있었다. 뭔가 했더니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 앱에서 온 알람이었다.
아직까지 앱을 지우지 않은 것은 지난번 촬영한 배우자를 향한 영상 편지를 앱으로 전송해 주기로 되어 있어서였다. 서로를 향한 진실된 마음을, 마지막으로 앱을 통해 확인해 보라는 말에 오늘을 기다렸는데 이제 막 영상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영상 편지를 확인해 보세요! 얼른요.]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든 숙려둥이가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숙려둥이를 쿡 누르니 화면이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썸네일은 진지한 얼굴의 서태천이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이지운은 설렘 반, 떨림 반으로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서태천은 유난히도 잘생기고 또 알파다워 보였다.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을 시작했다.
[지운 씨.]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이지운은 뒤집어지며 침대를 팡팡 쳤다.
너무 잘생겼어 어떡해! 목소리도 미친 듯이 멋있네!
[이렇게 말하려니 어색하군요. 서태천입니다.]
태천 씨다운 인트로야. 별다르게 꾸미는 말 없이, 그냥 담백한 이 말투. 반하고 나니까 이마저도 보기 좋구나.
이지운은 눈을 글썽거리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서태천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었지만, 그 눈빛 안에 얼마나 뜨거운 애정이 담겨 있는지 이지운은 잘 알았다.
[나와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간결한 메시지였지만 이지운의 가슴은 찌르르하게 울렸다. 그런데 영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태천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 최종 선택은… 오메가 1호님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세상에.”
이지운은 화들짝 놀랐다. 제주도에서 듣지 못했던, 그리고 듣고 싶었던 답을 지금 들려주다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지운이 놀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영상편지를 쓸 때 이지운도 똑같이 이야기했다. 제 선택은 여전히 알파 1호님입니다. 내 삶의 최종 선택은 영원히 당신이에요, 라고.
“일어났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서태천이 들어왔다. 그가 받치고 있는 트레이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차향이 퍼졌다.
“따뜻한 것 좀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좋… 좋아요.”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이지운을 보고, 서태천은 씩 웃었다.
“오메가 1호님이 선택해 주신 알파 1호가 차를 따라 드리죠.”
이지운은 크게 웃었다. 이렇게 늘 자신을 웃게 해 주는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서도 선택하고 싶었다.
***
따뜻한 차를 마시고 서태천이 준비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일찌감치 잤다. 널따란 침대는 새것이었지만 서태천과 함께라 그런지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이지운은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초조하게 일출을 기다렸다.
“저 이러다가 해 뜨는 거 못 보면 어떡해요? 자꾸 졸렸다가 말았다 해요. 잠자는 게 컨트롤이 안 된다니까요.”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진짜요?”
“네. 그러니까 안심하고 자요.”
혹여라도 멋진 일출을 놓칠까 봐 많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서태천이 이지운을 달래 주었기에, 이지운은 정말로 안심하고 노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서태천이 이지운을 흔들어 깨웠다. 이지운은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요. 해 뜰 것 같습니다.”
“네? 벌써요?”
정신이 번쩍 든 이지운이 몸을 일으키며 창밖을 봤다. 아직 캄캄했다.
“지금 새벽이에요.”
“말도 안 돼. 나 한 30분 잤는데?”
“추우니까 담요 둘러요.”
언제 준비해 놨는지 서태천은 이지운을 두툼한 담요로 두 겹 말아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저 담요 말고 태천 씨 품이 더 좋은데. 태천 씨한테 안겨 있을래요.”
“그럼 나야 좋죠.”
서태천은 즉시 이지운을 감싼 담요를 벗겨 내고 그를 자기 품에 가뒀다. 따스한 체온끼리 맞물려 빈틈없이 온기가 전달되었다.
“저쪽에서 해가 뜰 겁니다.”
창이 워낙 큰 데다가 바다까지 일직선상으로 가리는 건물이 없어, 이곳은 일출 명당 그 자체였다. 아직은 남색으로 물든 밤하늘. 저 수평선에서 무엇이 솟아오를까 이지운은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해가 약간씩 솟아올랐다. 이에 맞추어 바다가 환해지고 하늘은 제 색깔을 찾아 그러데이션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 해 뜨네요.”
“아름답습니다.”
“…정말요. 너무 멋져요.”
“네.”
이지운을 뒤에서 감싸 안은 서태천이 더욱 단단하게 제 연인을 안았다. 이지운의 눈에 찬란한 아침 햇살이 가득 찼다. 수평선 위로 아주 조금씩 빛이 솟아오를 때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는 것만 같았다.
신기하다. 어제와 같은 태양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만 느껴질까. 마치 새 삶을 살아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만 같아.
이지운이 감격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놔두고 일어났다.
“어? 어디 가요.”
“잠깐 기다려요.”
서태천이 곧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등 뒤에 선물을 숨겼나 보구나. 그 정도는 이지운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서태천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지운에게 등 뒤에 숨겼던 물건을 내밀었다.
반지 케이스였다.
“이게 뭐예요!”
“정식으로 프러포즈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평탄하게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는 건 제 성격상 맞지 않아서요. 확실하게 청혼하려고 준비했는데 어때요.”
“태천 씨….”
이지운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꾸만 붉어지려는 얼굴 탓에, 이지운은 손등으로 열을 식혔다.
“이지운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태천의 얼굴에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고, 내일에 대한 불안도 없이 그는 이 순간 오롯이 이지운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순수한 애정을 느낀 순간, 이지운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답이 우러나왔다.
“네. 당연하죠.”
“…고맙습니다.”
서태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지운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이지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지운의 새하얀 손에 어울리는 심플한 반지였다. 새해 첫날의 해를 받은 반지가 찬란하게 빛났다.
태어나 반지 선물은 처음 받아 보았건만, 이렇게 사이즈가 잘 맞다니. 이지운은 딱 맞아떨어지는 반지가 신기했다.
“어쩜 이렇게 잘 맞지? 누가 자로 잰 것 같네요.”
“다 재는 방법이 있죠. 그나저나 저도 끼워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서태천이 손을 내밀었다. 이지운은 환하게 웃으며 서태천의 손을 잡고 그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를 영원히 구속할 선물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나도.”
사소하지만 애틋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키스할까요?”
“지금 키스하면 지운 씨 앞으로 아무 데도 못 갑니다.”
“흠. 태천 씨 하는 거 봐서요.”
이지운이 엷게 웃었다. 서태천은 그의 양 뺨을 잡고 소리 나게 입 맞췄다. 간지럽고 달콤하고, 온몸이 따뜻해지는 키스였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그런 꿈같은 키스.
이지운은 새삼 자신이 엄청난 행운아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