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97화 (97/100)

97화

갑작스러운 휴직 소리에 김 부장이 의아해했다. 젊은 미혼자가 쓸 수 있는 휴가는 사실상 병가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지운은 건강하다 못해 윤기가 좔좔 흐르는 모양새가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그는 어디 아픈 것 같지 않았다.

“혹시 결혼 특별 휴가 말하는 거야? 신혼여행 가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요… 실은 산전 휴직을 내려고요.”

“산… 산전 휴직?”

이럴 수가. 산전 휴직이라면 임신을 했단 소리야? 김 부장은 입을 틀어막았다.

“실은, 네. 여기 관련 서류 가져왔습니다. 임신 확인서와 의사소견서요.”

“허… 그래. 알겠어.”

이지운이 서류 봉투를 내밀자, 김 부장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서무과장 통해서 인사팀에 잘 넘길 테니까 걱정 말고, 어디 아픈 데 있으면 말하고. 일단 전자 결재 올리도록 해.”

“네. 부장님.”

“알겠지만 휴직 신청부터 휴직 개시까지는 2주가 걸려. 그동안은 힘에 부쳐도 잘 나와 주길 바라네.”

“잘 알겠습니다.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이지운은 업무 폴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임자가 누가 될지 몰랐기 때문에 간단하게 현황표 작성을 하고 파일을 웹하드에 업로드했다. 그러는 동안 오전 나절이 지나갔다.

점심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오후 업무를 개시한 이지운은 어디까지 결재가 진행되었을까 궁금해서 결재 문서함을 뒤적였다. 그러자 오전에 결재 올린 휴직 신청서가 방금 본부장 직인을 받아 완료된 것이 보였다.

어, 잘 통과됐네. 다행이다.

그다음으로 이지운은 인사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는 해당 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휴직 개시 일자를 조회해 보았다. 

“어?”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통상적으로 2주 동안 근무해야 하는 기간이 사라져, 당장 다음 근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되게끔 처리가 되어 있었다.

이지운은 메신저를 켜 서태천을 찾았다.

태천 씨. 저 2주 뒤부터 휴직 아니에요? 왜 당장 휴직으로 결재 났어요?

서태천

당장 휴직이 맞습니다. 특별 긴급 승인 처리했죠.

진짜요? 권력 남용 아닌가요?

서태천

직계 가족이 긴급 사유서를 써서 첨부하면 인사팀에서 고려해 준다길래 제가 한 장 썼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승인해 주더군요.

풉. 이지운은 웃고 말았다. 인사팀 직원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진땀을 흘렀을까 싶었다. 

고마워요. 망고도 고맙대요.

서태천

이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쉬어요.

알았어요. 우리 마지막 숙려 철회 코스만 밟고요.

아직 두 사람에게는 이수하지 못한 6학점이 있었다. 

바쁘겠다. 숙려 철회 코스도 수행해야 하고, 망고도 키워야 하고, 태천 씨랑 놀러도 다녀야 하고… 또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하고.

이렇게 행복한 일들로만 바빠서 다행이라고 이지운은 생각했다. 업무 수첩에 앞으로의 할 일을 적는 그의 손에는 숙려둥이 볼펜이 쥐여 있었다. 이지운은 숙려둥이의 이마를 톡, 튕기며 웃었다.

***

퇴근 시간, 사람들은 사무실을 나가기 전 이지운과 한 마디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직에 들어간다고 공개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지운 주임. 보고 싶을 거야.”

“갑자기 들어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내가 미안하지. 난 진짜 몰랐어.”

“나도. 상상도 못 했어.”

박 대리와 김 과장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임산부를 데리고 지나치게 일을 시켰다며 그들은 크게 난감해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을 안 한 걸요.”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구나. 월요일부터 못 보는 거야?”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부장이 다가와 이지운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수고했고. 잘 쉬고 돌아와.”

“알겠습니다, 부장님.”

이지운이 부장 그리고 팀원들과 빠짐없이 악수했다.

“민 대리님, 잘 지내세요. 일단 자주 만나고요.”

“알았어. 자주 봐야지. 맨날 연락하고.”

민 대리가 이지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늘은 저 파일 정리해야 하니까 늦게까지 남아 있을게요. 먼저들 퇴근하세요.”

“그래, 그럼.”

“잘 지내.”

팀원들이 모두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공간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지운은 깔끔하게 비워진 자기 책상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입사하고 한 번도 안 떠난 자리인데, 처음으로 떠나게 되었어. 물론 이틀간 퇴사를 했긴 하지만… 어쨌든.

태천 씨를 만나고, 결혼하고 이혼 신청하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이 책상 그리고 저 복사기, 저기 저 정수기는 다 지켜보았겠지. 원래 사내 연애를 하면 복사기가 가장 먼저 아는 법이라던데….

이지운이 감회에 젖어 있던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본부장실에서 서태천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짐은 다 정리했습니까?”

“네. 다 했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자리로 다가와 텅 빈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그 역시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수고 많았어요. 이젠 편하게 쉬기만 하면 되겠네.”

서태천이 담담하게 말하며 이지운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이지운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책상에 기대어 여유로운 말투로 말하는 그가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완벽하게 정돈되어 뒤로 넘긴 머리, 빡빡하게 조인 넥타이, 스리피스 슈트와 금욕적인 얼굴이 사내 연애의 욕망을 타오르게 했다.

“저기, 태천 씨. 아니 본부장님.”

“예?”

갑자기 자신을 본부장이라고 부르는 이지운이 낯설어, 서태천이 그를 쳐다보았다.

“저 평소에 상상만 하던 일…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뭔데 그럽니까.”

“저희가 사내 연애를 하긴 했지만 또 대놓고 하진 못했잖아요. 그래서 좀 그런 분위기를 내보고 싶어요. 야릇한 분위기에 휩싸인 본부장과 신입 사원, 그런 거요.”

이지운이 진지하게 말하자, 서태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 보고 싶은 게 그런 거였습니까?”

“저는 진심이에요. 로망이라고요.”

“아, 정말.”

서태천이 이지운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웃음을 참았다. 도저히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진지하게 임하세요, 네?”

“알았습니다. 다시 하죠.”

흠흠. 그가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 주임. 보고서에 오류가 있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서태천이 이지운을 서늘한 시선을 쳐다보았다. 널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에 이지운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악. 재밌어.

이지운은 웃음을 참으며 다시 감정선을 잡았다. 

“죄송해요, 본부장님….”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그러면… 이걸로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지운이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냅다 서태천에게 입을 맞췄다. 말캉하면서도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에 서태천은 순간 넋이 나갈 뻔했으나, 연인의 깜찍한 부탁에 장단을 맞춰 줘야 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연기에 몰입했다.

“이걸로는 안 되겠는데.”

“그럼요, 본부장님…?”

이지운이 서태천을 올려다보며 촉촉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제대로 혼나야겠습니다. 내 방으로 와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목을 낚아채 본부장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앗! 제발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저 안에 들어가서 몸으로 빌도록 하죠.”

“아흐… 너무하세요. 몸이라니….”

이지운은 손목이 잡혀 끌려가면서도 실실 웃었다. 

정수기야, 복사기야 잘 봤니? 사내 연애는 정말 최고야!

***

아침에 눈을 반짝 뜬 순간, 이지운은 느낄 수 있었다. 어제까지와 오늘은 다르다. 

회사 안 가도 된다. 난 휴직자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침부터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집안을 풀쩍풀쩍 뛰어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지운은 휴직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냥 놀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름 아니라 숙려 철회 및 재결합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고문 변호사님하고 통화도 해야 하고… 숙려 센터도 가야 하고… 우리 6학점 덜 들은 것도 빨리 들어야 돼요.”

“정말 바쁘겠군요. 그래도 숙려 절차가 해를 넘기진 않았으면 합니다.”

“실은 저도 그래요.”

하필 연말이라 서태천은 업무적으로 미친 듯 바빴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숙려 절차를 끝내고 싶다는 것이 두 사람의 의견이었기 때문에, 서태천은 과감하게 조퇴를 감행하기로 했다.

오후 4시에 숙려 센터 앞에서 만난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센터 안으로 입장했다. 

“묘하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아직 마음을 자각하기 전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마음이죠.”

“여기 거기 아니에요? 드로잉 클래스 했던 데. 그때 저 되게 잘 그려 주셨는데.”

처음 이곳에서 부부 동반 세미나를 들었을 때, 서태천은 연필 한 자루로 기가 막힌 그림을 뽑아 냈었다. 강사가 말하기를 그림에 담긴 애정은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며, 피사체를 향한 다정한 시선을 보면 조만간 이 부부는 재결합할 것이라고 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