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우선 바닥을 좀 메워 주시겠어요.”
“아, 맞네. 알겠습니다.”
우리 태천 씨가 회사에 가져다 놓고 쓸 컵인데 최소한의 생김새는 갖추어야겠지.
이지운은 심기일전하며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중세의 예술가가 역사에 길이 남을 조각상을 빚듯이 눈을 빛냈고 손은 한없이 신중해졌다. 수능 시험을 치를 때보다도, 입사 면접에 임할 때보다도 더 진지한 태도였다.
“후우.”
엄청난 인내 끝에, 그는 가까스로 컵의 형태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옆에서 함께 분투한 강사는 그의 노력이 가상해 크게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정말 엄청난 발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다 강사님 덕분이에요.”
이지운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 유약 처리까지 했으니까 굽기만 하면 되거든요. 댁으로 빠르게 보내 드릴게요. 크리스마스 전에 받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평소라면 완성된 도자기 그릇을 받아 보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니만큼 빠르게 구워 전달해 주겠다는 것이 강사의 이야기였다.
하루, 이틀, 계속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이지운은 택배가 언제 오나 초조하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당장 내일인데 이놈의 컵은 언제 오는 거야? 선물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트리를 꾸미면서도, 세화 호텔에서 보내온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특제 뱅쇼를 식탁에 차리면서도 이지운의 신경은 온통 현관 쪽에 가 있었다. 택배 배달원이 오면 서태천 모르게 물건을 낚아채 숨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태천 씨 오겠네….”
시간은 5시 30분. 크리스마스이브인 만큼 서태천은 정시에 퇴근할 것이고, 6시 반이면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택배가 오지 않았다니. 이지운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택배 왔습니다. 계세요?”
그 순간, 대문 초인종이 울리면서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운은 거의 날듯이 뛰어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네! 사람 있어요.”
“아, 계셨구나. 가져다드릴게요.”
이윽고 택배 기사가 등장해 이지운의 품에 종이 상자를 안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네. 고객님도요.”
택배 기사가 떠나고 나서, 이지운은 혼자 격렬한 기쁨의 춤을 췄다. 박스를 뜯어 보자 나무랄 데는 많지만 정성이 깃든 머그컵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숙려둥이야. 캐럴 송 틀어줘.”
[네. 저의 추천 캐럴 송을 틀어 드리겠습니다.]
숙려둥이 스피커를 통해 신나는 박자의 캐럴 송이 흘러나왔다. 식탁을 정돈하며 조금 더 기다리니 현관 벨이 울렸다. 이지운은 이날을 위해 준비한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후다닥 문가로 뛰어갔다.
“태천 씨! 메리 크리스마스!”
“이런, 깜찍한 루돌프군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사슴뿔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어서 와요. 춥죠?”
“지운 씨를 보니까 하나도 춥지 않습니다. 마냥 좋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지운에게 쪽, 입을 맞춘 서태천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식탁에 도착한 그는 짐짓 놀란 기색이었다.
“트리에 케이크에… 대단하군요.”
“제가 좀 뛰어나요.”
죄다 세화 호텔에서 협찬해 준 것이었지만, 이지운은 시치미를 떼며 씩 웃었다.
“고생했습니다. 힘들진 않았어요?”
“전혀요. 저 이런 거 되게 오랜만이라 신났어요. 가족… 이랑 보내는 크리스마스요.”
이지운이 생긋 웃으며 서태천의 어깨에 기댔다. 서태천이 그런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따스한 뱅쇼로 건배했다. 알콜기는 다 날아갔어도 은은한 레드 와인 향과 과일, 계피 맛이 우러나 끝내주게 달콤했다.
“해피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태천 씨.”
한 잔씩 뱅쇼를 홀짝이며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의 눈은 따뜻한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행복하네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지운 씨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니까요.”
“하여간 여보는 말을 잘해요.”
“우리 자기가 칭찬해 주니 고맙군요.”
“저… 그런 의미로 여보한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이지운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선물?”
서태천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다소 놀라는 반응이었다.
“네. 선물 준비했어요.”
이지운이 방에 들어가 머그컵 상자를 꺼내 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혹여라도 태천 씨가 실망하면 어쩌지 싶으면서도 에이, 아니야. 기쁘게 받아 줄 거야. 그리고 모양이 나름 현대 미술스럽지 않나, 하고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열어 보세요.”
서태천이 선물 상자를 열었다.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가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직접 만들었습니까?”
“네. 제 솜씨예요.”
이지운이 당차게 대답하며 웃었다. 혹시라도 실망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역시 쓸데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너무 감동적인데요. 정말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빛으로 서태천은 고마움을 전했다. 기대한 것보다 더 화려한 리액션에 이지운은 뿌듯했다.
“컵이 너무 멋지군요. 거기에다가 우리 이니셜도 있네요.”
컵의 중심부에는 ‘T♥J’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지운이 가장 공들여 매만진 부분이기도 했다.
“소중하게 쓸게요. 아니, 아까워서 못 쓰겠는데 어떡하지.”
“안 돼요. 매일 써요. 커피 마실 때도 물 마실 때도. 알겠죠?”
“그래야겠군요. 그럼 이제 내 선물을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어, 태천 씨도요?”
이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당연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서태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놓인 서류 가방을 뒤졌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뭔가요?”
“열쇠입니다.”
“응? 무슨 열쇠요.”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무슨 열쇠지. 나한테 자동차라도 선물해 주는 건가?
이지운이 키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열쇠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묶은 꾸러미였다. 생김새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새가 아니라 좀 희한했다. 중세 시대에나 쓰였을 법한 클래식한 디자인에 이지운은 좀처럼 열쇠의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진짜 모르겠는데. 이거 뭐예요?”
“별건 아니고 별장 하나 구입했어요.”
“네?”
너무 놀란 나머지 이지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번에 섬에 갔을 때 그런 곳이 좋다고 했죠. 그래서 동해 쪽에 별장 하나 장만했습니다.”
“벼… 별장.”
“휴직도 했으니 거기 가서 여행 겸 쉬면 좋을 것 같군요.”
서태천이 핸드폰을 열어 별장 사진을 보여 주었다. 상상 이상으로 크고 좋은 건물의 모습에 이지운은 입을 떡 벌렸다.
거실 전면의 통창을 통해서 바다가 내다보이고, 햇살이 고스란히 들어와 환한 집이었다. 3층짜리 건물에는 방이 셀 수도 없이 많았으며, 널찍한 마당은 가든 파티를 해도 수십 수백 명이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컸다.
이 선물 얼마인지 상상도 안 가네. 어마어마하게 비싸겠지?
“아니, 저는 겨우 컵 하나 준비했는데 이런 큰 선물을 주시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이 컵이 더 가치 있습니다. 수백억을 준대도 이 컵하고는 바꾸지 않겠습니다.”
서태천은 이지운의 말을 딱 잘랐다. 그러고는 이지운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이 별장에서 지운 씨랑 나랑, 망고랑 같이 바다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보자마자 계약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더군요.”
“대체 언제 계약한 거예요?”
“출장 갔다고 거짓말하고요.”
“네? 세상에.”
이지운이 머그컵을 만들고 있던 순간, 서태천은 별장을 샀다. 통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고마워요. 태천 씨.”
“나야말로 받아 줘서 고맙습니다, 지운 씨.”
쪽. 이지운이 서태천의 입술을 찾아 짧게 키스했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의 목 뒤를 끌어당겨 제 품에 그를 가두었다. 귓가에는 캐럴 송이, 창밖에는 언제부턴가 솔솔 날리는 눈송이가.
포근하고 따뜻한 집안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과 망고가 있다.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이었다.
***
이젠 휴직계를 내야겠다.
크리스마스 당일 그리고 이어지는 토요일 일요일 내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이지운이 내린 결론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망고가 잘 크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서태천이 하도 성화를 부려 배가 부를 때까지 일하는 건 어려울 듯했다.
출근한 이지운은 부장에게 찾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어, 무슨 일이야, 이 주임.”
김 부장은 평소 서태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회사를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요새 이지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부족한 상사는 아니었나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중이었는데 대뜸 이지운이 찾아오니 긴장이 됐다.
“저…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뭔데. 편하게 말해 봐.”
“휴직을 좀 쓰고 싶습니다.”
“응? 휴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