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위원회 측은 송 팀장 없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이지운에게 익명의 제보자가 보내온 녹취록과 파일, 정황 제보 자료를 보여 주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괴롭힘의 증거였다.
“이지운 주임님. 이 모든 것이 송호종 팀장님이 저지른 일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분이 저한테 부당한 업무 지시와 성희롱을 저질렀습니다.”
“전부 사실이라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윤리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송 팀장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끝까지 자기도 원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으나, 이미 이 일은 동종 업계에 널리 널리 퍼져 나간 이후라 앞으로도 그의 취업 길에는 난항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가 재취업을 하든 못 하든, 이지운은 알 바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냥 뒤로 자빠져 코가 깨졌으면. 나을 만하면 다시 넘어져 병원 신세를 면할 날이 없었으면. 이따금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
새로운 팀장이 발령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게 부장의 설명이었다. 당분간 결재는 부장에게 받기로 하고, 각자 역할을 조금씩 더 분담했다. 그렇게 팀원들끼리 힘을 합쳐 일하면서 며칠이 흘러갔다.
“한 명 빠지니까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지네요.”
민 대리가 개운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요근래 들어 표정이 부쩍 밝아졌다.
“네. 솔직히 말하자면… 편해요.”
이지운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소화제를 먹은 듯 속이 뻥뻥 뚫려 일이 잘됐다. 그간 회사가 싫었던 것은 회사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싫은 탓이었나 보다.
“지운 주임, 우리 카페 가서 커피나 좀 마실까?”
“오, 좋아요.”
이지운과 민 대리가 일어나 옥상층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12월 하순, 카페는 크리스마스 컨셉으로 장식을 해 놓고 캐럴 송을 틀어 따스한 분위기였다.
“난 아메리카노 마실 건데, 이 주임도 아메리카노지?”
“아, 아니요. 저는 허브티 마실래요.”
“갑자기 웬 허브티야? 맨날 커피 달고 살더니.”
“건강 때문에 커피 줄이려고요.”
“그래. 그럼 허브티로 해. 내가 살게.”
곧이어 음료가 나왔다. 두 사람은 경치가 가장 좋은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서비스로 나온 쿠키를 민 대리 앞으로 밀어주고 있는데, 이지운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군수군, 눈치를 보듯 이어지는 말에 이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직원들이 이지운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오메가 맞아?”
“맞아. 예전에 왜, 그 제주도 가서 짝짓기 예능 찍는 거 있었잖아. 거기도 나왔는데 기억 안 나?”
“그러고 보니까 그때 본부장님한테 추파 던졌었지.”
“야, 팔자 역전 한순간이네.”
이 분위기 뭐지. 저쪽 테이블에 앉은 직원들 내 이야기 하고 있네.
멀어서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결코 좋은 뉘앙스의 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지운과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자그맣게 속닥거렸다. 카페에서 나가면서도 다시 한번 이지운을 위아래로 훑기도 했다.
…이 시선은 대체 뭔데? 구경났나?
이지운이 뭐라고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또 다른 무리가 카페에 들어서며 이지운을 쳐다봤다.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직원도 있었고, 흥밋거리를 쳐다보는 것 같이 구는 직원도 있었다. 쟤야? 소문의 걔가? 그런 뉘앙스였다.
나… 뭔가 안 좋게 소문이 난 건가.
이지운은 당황스러웠지만 사람들에게 직접 가서 왜 눈빛을 그따위로 보내냐고 물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왜 이럴까. 이지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민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이 주임.”
“네, 대리님.”
“사실 어제부터 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소문이요? 저요?”
“응. 이 주임과 관련된 소문인데….”
민혜경 대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녀는 양옆 테이블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운 주임님.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본부장님…이랑 무슨 사이야?”
“네?”
이지운은 본부장이라는 단어에 순간 흠칫했다. 민 대리가 이렇게 돌직구를 날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 무슨 사이냐니요. 그냥 본부장과 직원 사이죠.”
“아니, 그게 아니라. 음… 안 되겠다. 내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할게. 나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어.”
민 대리가 진지하게 말하자 이지운은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 알고 계셨다고요.”
“어. 내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
“그… 그러면.”
“설마설마했는데 지운 주임 퇴사한다고 뛰쳐나갔을 때 본부장님 난리 난 거 보고 확신했지. 아, 진짜 둘이 무슨 사이구나 하고. 그런데 맹세컨대 나는 내 동기 한 명하고만 얘기했지, 어디 가서 이 주임하고 본부장님 사이를 소문내지 않았어.”
“아… 네.”
이지운은 얼떨떨하면서도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지운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이다 보니 관찰력이 좋은 편이라면 충분히 자신과 서태천의 관계를 짐작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주임과 본부장님의 관계를 눈치챈 게 나랑 내 동기뿐만이 아니더라고.”
“정말요?”
“응. 지금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이 주임하고 본부장님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졌거든.”
컥. 이지운이 허브티를 삼키다가 사레들렸다. 민 대리가 건넨 냅킨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이지운은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예요?”
“응. 내 생각에는 연회 예약부 쪽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게 아닌가 싶은데… 두 사람이 웨딩홀 보러 다녔다고 누가 이야길 퍼뜨렸나 봐.”
“아….”
맞다. 가을 쯤에 서태천을 따라 여러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결혼식 음식도 맛보고 야외 웨딩에 적합한 공간을 찾아다녔으니까. 그때 소문이 새어 나갔구나.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소문이 퍼지고 나서 이 주임에 대해서 조금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가 돌고 있거든.”
민 대리는 말을 아꼈지만 이지운은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개 주임인 이지운이 본부장과 웨딩마치를 울린다고 하니 질 낮은 소문이 도는 것일 테다. 아마도 이지운이 들이댔니, 꼬셨니, 듣지 않아도 뻔한 레퍼토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황당함도 잠시. 이지운은 마음을 추슬렀다. 입사 때부터 자신을 챙겨 주고 걱정하던 민 대리에게는 탁 터놓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텄다.
“실은 저, 이미 했어요.”
“응?”
“할 예정이 아니라 본부장님하고 이미 결혼했어요.”
“뭐? 진짜야?”
이번에는 민 대리가 제대로 사레들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에게 이지운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니, 잠깐만. 이제 한다고 소문이 돈 건데 이미 했다니?”
사실 민 대리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게 되었네요. 이게… 실은 올해 결혼을 했는데, 그니까 하게 됐는데 원래는 이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중간에 저도 본부장님도 마음이 바뀌어서 그냥 결혼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거든요.”
“세상에.”
“내년에 식 올린다는 소문도 사실이에요. 태천, 아니 본부장님 쪽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소문이 흘러나왔나 보네요.”
이지운의 설명에 민 대리는 입을 떡 벌리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평사원과 본부장의 스캔들만으로도 놀라운데 이미 결혼을 했어? 그것도 한 차례 이혼 위기까지 겪은 가정이었다니. 놀랄 노자였다.
“저, 그리고 아까 커피 사 주신다고 했을 때 거절한 거, 일부러 그런 거예요. 실은 임신했거든요.”
“뭐?”
민 대리는 이쯤 되니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커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진도가 빨랐다.
“진작 말했어야지! 내가 일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니야? 아침에 내 보고서도 도와주고….”
“에이, 아직 괜찮아요. 불편한 것도 딱히 없고.”
“나 진짜 놀랐어. 가슴이 막 벌렁벌렁 뛴다.”
이지운이 소리 내 웃었다.
“제가 말하고도 놀라운 이야기들이기는 해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죠. 제 삶에.
싱긋 웃는 이지운에게, 민 대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지운 주임이 말했으니 나도 말해야지. 사실, 송 팀장 건 제보한 거 나야.”
“예? 정말요?”
이지운은 화들짝 놀랐다. 윤리 위원회에서는 익명의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없다고 했었다. 이지운 역시 그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그게 민 대리였다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간 내가 힘이 없어서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지만, 너무 고생하는 게 보여서… 나름대로 증거 모았다가 비서실 김민지 대리 통해서 고발했어.”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군요….”
이지운의 코끝이 찡해졌다. 말없이 자신을 도와준 민 대리가 너무도 고마웠다. 줄곧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난 혼자가 아니었구나.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따끈따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