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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90화 (90/100)

90화

하마터면 과일이 목에 걸릴 뻔했다. 이지운은 켁켁대며 서태천이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 그게 말이죠….”

공식적으로 이지운과 최영희 여사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태천이 찾아와 대뜸 옷장을 뒤졌다라. 이지운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 여사와 자기 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야겠다 싶었다.

“어머니랑은 사실 예전에 뵌 적이 있어요.”

이지운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서태천이 화를 낼까 돈 봉투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만나서 망고 빙수를 먹은 이야기만 했다. 

“제가 궁금하셨나 봐요. 얼굴 보자고 하셔서 호텔에서 빙수 먹었는데 그때 안면 트고 가끔 연락하면서 지냈어요.”

“흠… 그랬습니까.”

하지만 서태천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최영희 여사는 평소 서태천의 결혼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이혼한 모습을 보여 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냐며, 미안하다는 말도 자주 했었고 서태천을 선 자리에 내보내기도 했었다. 

짐작건대 처음에 최 여사는 아마 이지운을 쫓아내기 위해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서태천의 취향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어머니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산물이다. 99% 확률로 최 여사는 이지운에게 호감을 느꼈을 테다. 그러니 이렇게 기막힌 도주극에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지.

서태천은 대충 상황 파악을 마쳤으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상관없습니다. 우선 좀 쉬어요.”

“아, 저 그런데 회사….”

“회사?”

“저 그만둔 거 아시죠. 사직서 날렸는데 어떡해요.”

이지운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다시는 회사 안 나올 것처럼 비장하게 나왔는데… 아, 창피해. 저 어떻게 돌아가죠?”

풀이 죽은 이지운을 보며 서태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처음 이지운이 회사를 관두고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태천은 개인적으로 이지운을 찾아 나서는 동시에 회사 내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난 것은 없는지 알아보라고 비서실에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도착한 보고서에는 기도 안 막힌 내용이 줄줄이었다. 

팀장의 괴롭힘과 성희롱. 

처음 그 단어를 눈에 담은 순간, 서태천은 송 팀장을 찾아가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송 팀장은 이지운을 사적으로 불러내 여러 차례 집적였고, 심지어 놀이공원에서 일방적으로 들이댔다가 제대로 걷어차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이지운에게 부당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무분별한 업무 분장을 실시했다. 서태천은 차갑게 분노하면서 온갖 제보와 증거를 채집했다.

일단은 이지운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라 송 팀장은 뒤로 미뤄 놓고 있었지만, 이제 출근하게 되면 송 팀장부터 처리하리라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지운 씨가 일에 욕심 많은 거 알고 있어요. 계속 일하고 싶으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일해도 됩니다. 그리고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을 테니 걱정 말고요.”

“다시 일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사직원 아직 수리 안 됐습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아! 다행이다. 난 진짜 남편 복이 좋네요.”

이지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태천의 어깨에 기댔다.

“그런데 태천 씨는 계속 자리 비워도 괜찮은 건가요? 저 때문에 회사 안… 나가시는 거면 저 너무 신경 쓰이는데요.”

“나중에 한꺼번에 처리하면 됩니다. 괜찮으니 지운 씨는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것보다는 우리 두 사람과 망고 걱정을 하죠.”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나도 망고를 좀 보고 싶은데.”

“아,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하려고 했어요. 우리 같이 병원 가요.”

이지운이 씩 웃었다. 

그날 오후, 두 사람은 함께 인근의 형질 의학과를 찾았다. 산부임을 밝히고 예진을 받은 뒤, 다시금 전문의를 만나 임신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간 서태천은 사뭇 긴장한 티를 냈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지운은 이래 봬도 두 번째 초음파였기 때문에 여유롭게 베드에 누웠다. 의사가 초음파 기구로 이지운의 배 속을 비췄다.

“이게 아기집인데요, 보이세요?”

흑백 스크린에 아주 조그마한 아기집이 잡혔다. 의사가 확대해 주지 않으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망고는 작았다. 

“이게… 아기.”

“네. 두 분의 아기예요.”

좀처럼 표정에 변화 따위 없는 서태천이었지만, 이 작은 기적 앞에서는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눈가가 빨개졌다.

“알파분이 마음이 여리시네요.”

의사가 허허 웃었다. 이지운은 베드에 누운 채로 서태천의 손을 꼭 잡았다. 

“울지 말아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기특해서… 저 작은 게 어떻게 우릴 찾아왔는지.”

“저도 그래요. 너무 신기하죠.”

의사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초음파 사진을 잊지 말고 챙겨 가라고 했다. 두 사람 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제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 되었다. 둘을 이어 주는 망고까지 해서 세 명이서.

***

아침이 밝았다. 이지운은 아침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더 쉬어도 됩니다만.”

“아니에요. 마음 약해지기 전에 그냥 출근하려고요. 하루라도 빨리 수습에 들어가야 그나마 덜 쪽팔리지 않을까요….”

이지운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울컥해서 회사 그만둔 척하기. 

여러분, 제가 한순간 화가 나서 그랬어요. 이해해 주세요, 하하하. 이렇게 말하면 팀원들의 황당함이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지 않을까, 그냥 눈 딱 감고 잘못했다고 빌자.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서태천의 차에 올라 멘트를 연습했다.

어설프게 웃었다가 찌푸렸다가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이지운을 보며 서태천은 웃음을 참았다.

“다 왔네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갈게요.”

회사까지 같이 왔기 때문에 이지운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시간차를 두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건 두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룰이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올라가죠.”

“진짜요?”

“출근 정도는 같이 해도 되지 않습니까.”

“음… 하긴, 그렇긴 해요. 우연히 엘리베이터 같이 탈 수도 있는 거죠.”

하루 정도 엘리베이터 같이 탄다고 뭐가 그렇게 티가 나겠나?

이지운은 그러려니 하면서 서태천과 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떤 의미로는 그와 함께 있으면 조금이라도 용기가 더 날 것 같기도 했고.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에는 두 사람 말고 아무도 타지 않았다. 서태천이 손을 뻗어 이지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단단한 손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아, 이지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윽고 마케팅 본부가 위치한 층이 되었다. 두 사람은 차례로 내렸고 서태천이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했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지운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서태천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채 슬금슬금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저 멀리서 민 대리가 이지운을 발견했다. 

“저거 이지운 주임 아니야?!”

“그러게. 그만둔다며 어떻게 된 일이지.”

“이 주임?”

“아? 네. 저 이지운 맞, 맞습니다.”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대답해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빠듯하게 쏠리자, 이지운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도 쪽팔림은 한순간, 직장은 수십 년이다. 

이지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

그런데 그때 서태천이 이지운의 걸음을 막아섰다. 이지운은 조금 당황해 걸음을 멈추었다. 왜 이러지? 하는 순간 서태천이 마케팅 1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호종 팀장님.”

서태천이 송호종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간단한 부름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위압감이 깔려, 공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예? 본부장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아침에, 그것도 출근하자마자 본부장이 팀장급을 호출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 

“아… 저 말씀이십니까?”

“두 번 부르게 하지 마십시오.”

냉정한 목소리였다. 서태천은 틈을 주지 않고 휙, 본부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자 직원들이 조그맣게 수군거렸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야.

송 팀장은 어리둥절함과 초조함, 불안감에 휩싸였다. 잘못한 게 워낙 많으니 상사의 부름에 절로 겁을 먹게 된 것이다. 그는 사무실 입구에 엊그제 퇴사한 이지운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 그룹의 실질적인 치프, 미래의 회장인 서태천에게 자신이 무얼 밉보였는지 그것만이 걱정됐다.

“저기! 나, 나 좀 다녀올게.”

송 팀장은 허겁지겁 업무 수첩을 챙겨 본부장실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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