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알았어요. 무조건 함께할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잊은 말이 있더군요.”
“네?”
“하루 동안 많이 후회했습니다. 왜 진작 들려주지 않았나 하고.”
“…태천 씨….”
“사랑해요. 지운 씨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이 말을 평생 들려주지 못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아….”
이지운의 가슴이 일렁였다. 아주 뜨거운 감정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 끝내 눈물을 만들어 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조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로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영원히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이토록 절절하게 고백해 주고 있었다.
“태천 씨….”
“사랑하고 있어요. 너무도.”
이지운은 목이 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서태천의 눈빛 그리고 손길 하나하나에 부정할 수 없이 선명한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이지운은 태어나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한때는 신이 없다고 믿었건만 이제는 신이 있어 서태천을 제 눈앞에 데려다준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태천 씨. 나도 사랑해요.”
그 말에 서태천이 이지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강한 힘이 온몸을 압박하자, 이지운은 화들짝 놀랐다.
“저, 저기 끌어안지 마세요. 놔주세요.”
“네? 불편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지운이 머뭇거리며 말을 아꼈다. 이 상황에서 느닷없이 전할 이야기가 맞나 싶기도 했지만, 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소식이기도 했다.
“실은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건데요.”
“네. 말해 봐요.”
“제 배 속에 뭐가…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죠. 혹시 종양 같은 겁니까?”
서태천의 눈썹이 날카롭게 휘었다.
“시한부는 아니더라도 무슨 병이 있는 거네요. 그렇죠?”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저 임신했어요.”
“…뭐라고요?”
서태천이 되물었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히트 사이클 때 기억하시죠… 어…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이지운이 눈을 내리깔고 제 배를 쓰다듬었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자기 뺨을 한 대 쳤다.
“왜 때려요!”
“너무 어지러워서 한 대 쳤습니다. 좀 깨야 할 것 같아서.”
“아니, 그냥 임신한 것뿐인데….”
“그냥 임신이 아니죠. 이 안에… 우리 아기가.”
서태천이 이지운을 살짝 감싸 안았다. 약하게 힘을 줬지만 단단하고 견고한 애정이 담긴 포옹이었다. 이지운은 서태천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의 심장 소리고 무엇이 서태천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 가지 않을 지경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한 데 합쳐졌다.
“너무 고마워요. 너무…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기뻐요.”
“저도 믿기지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니.”
이지운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태천은 손으로 이지운의 눈가를 훔쳐 주면서 피식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운 씨는 울보군요.”
“네?”
“그거 압니까? 지운 씨의 우는 얼굴에는 사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어요. 지운 씨가 울면 그냥 못 지나치겠습니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하는 이지운의 귓가에, 서태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초록색과 갈색이 섞인 체크 무늬에 은색으로 수를 놓은 손수건이었죠.”
“…네? 그걸 어떻게.”
이지운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서태천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지운이 취업하기 전 호텔에 갔다가 친절한 직원에게 빌렸던 손수건이었다. 그는 아직도 손수건을 보관 중이었는데, 언젠가 막연히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또 그때의 친절을 잊기 싫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집에 와서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걸 서태천이 알고 있다는 게 이지운은 놀라웠고 한편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손수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그러니까 제가 성남 호텔에서 받은 손수건 모양을 어떻게 아세요?”
“제 것이니까요.”
“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이지운은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
“제가 그날 손수건을 줬습니다. 슬프게 울고 있던 지운 씨한테요.”
머리가 아주 느릿하게 돌아갔다. 무척이나 키가 크고 좋은 냄새가 나던 사람. 그게 서태천이었다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때 그 사람이 본부장님?”
“맞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 사람이 내게 손수건을 돌려주길. 아니, 지운 씨를 기다렸다고 해야 옳겠죠.”
이지운의 뺨을 따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이제는 지운 씨가 울 때마다 내가 손수건이 되어 주겠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울고 싶잖아요!”
이지운이 서태천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이제는 이별할 일도, 서글플 일도 없이 오직 따사롭고 향기로운 날만이 가득할 것을 알기에.
***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이지운은 새삼 기분이 묘했다. 물론 2박 3일을 가리켜 오랜만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그 안에 일어난 일은 아주 많고 요란했기에 심리적으로는 수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개인 짐이 놓인 작은방과 서태천과 쓰는 안방. 그리고 삶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 주방을 돌아보며 이지운은 자신이 돌아올 곳에 비로소 착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커피 머신과 그 옆에 자리한 원두를 보자 크게 실감 났다.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여기야. 새까만 옷을 입고 진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남자의 집.
이지운이 머그컵을 건드려 보고 있는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가운 차림의 서태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태천 씨?”
“왜 침대에 없습니까. 놀랐잖아요.”
“아, 눈이 일찍 떠져서요.”
“사라진 줄 알았어요.”
서태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지운의 어깨를 끌어다가 제 품에 가뒀다.
“걱정하셨어요?”
“또 도망가면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기대어 오는 서태천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가만 보니 그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인지 얼굴에도 살이 내려 선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이지운이 서태천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서태천이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나저나 이렇게 살이 빠져서 어떡해요.”
“지운 씨가 보충해 주면 됩니다. 어디 안 가고 이 집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밥이라도 차려 드릴까요?”
“아닙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제가 금방 차려 드릴게요. 기다리세요!”
이지운은 서태천더러 가만히 앉아 있으라며, 자기가 멋진 밥상을 차려 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믹싱 볼에 붓는 순간 헛구역질이 나고 말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먹던 것인데, 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욱.”
입을 틀어막으며 괴로워하는 이지운을 보고 서태천이 벌떡 일어났다.
“괜찮습니까?”
그가 황급하게 다가와 이지운의 어깨를 짚었다.
“우유가 상한 건가요. 당장 치우죠.”
“아, 아니에요. 우유는 문제없고 저… 입덧 같아요.”
“이런.”
서태천은 이지운의 임신 소식이 뛸 듯 기뻤으나,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벌써부터 입덧으로 속이 안 좋다니 서태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걱정됐다. 그토록 먹을 것을 좋아하는 이지운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큰 비극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아요. 혹시 뭐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어….”
이지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망고요. 망고가 먹고 싶어요.”
“그렇군요.”
“실은, 우리 아기 이름도 망고예요.”
“네?”
“어제 태명 지었거든요. 망고라고요.”
서태천의 입매가 올라갔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깜찍한 배우자라니, 망고 농장을 인수해다가 안겨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 아기가 망고군요. 지운 씨가 좋아하는 망고.”
“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망고요.”
서태천이 낮게 웃으며 이지운을 끌어안았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망고를 준비하죠.”
“어? 어떻게요.”
“호텔에 말해서 배달받으면 됩니다.”
서태천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주방에서 망고, 최상품으로 가져와요. 네, 우리 집으로. 곁들일 다른 과일도 잊지 말고.”
멋지게 오더를 내리는 그를 보며 이지운은 눈을 빛냈다. 본부장 남편 최고다!
이지운이 감탄하며 서태천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직원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들고 온 아이스박스 안에는 잘 손질된 망고와 각종 열대 과일, 값비싼 과일류가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다. 심지어 모두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어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어떡해. 너무 달다.”
이지운은 망고를 먹으며 거의 흐느꼈다.
“어머니 집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네. 호텔 과일은 다르다, 달라.”
이지운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캬 소리를 내자, 서태천이 팔짱을 끼고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머니 집에 있었던 겁니까?”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