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지운은 허둥지둥 거실 안을 헤매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밖으로 나간다면 이제 갓 아파트 건물에 도착한 서태천과 정면으로 마주칠 테니까.
“어떡하지, 어디로 도망가?”
홑몸도 아닌데 베란다 창밖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1층이면 몰라도 여긴 5층이었으므로. 앞으로도 못 나가고 뒤로도 못 나가게 되니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 신세가 바로 이것인가 싶었다.
난 대체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인 그의 눈에 문이 하나 보였다. 최 여사가 어제 옷을 꺼내다 준 드레스룸이었다.
이지운은 발바닥에 불이 붙도록 뛰어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앞에 있는 장을 쳐다봤다. 최 여사의 말에 의하면 왼쪽에 위치한 붙박이장은 서태천이 올 때 입을 옷가지를 넣어두는 곳으로, 지금 텅텅 비어 있다고 했다.
그래. 여기 숨자. 별수 없어.
이지운이 숨을 몰아쉬며 옷장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한 사람 정도 숨을 공간이 있었다. 그가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기고 문을 탁, 닫음과 동시에 현관에서 삐빅, 도어록 만지는 소리가 났다.
왔구나. 왔어.
이지운은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꽉 감싸 안으며 숨소리를 가다듬었다.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소리로만 상황을 판단하려니 쉽지 않았다.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 방문을 열어보는 소리, 그리고 이곳저곳을 지나…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
휙. 드레스룸 문이 열렸다. 서태천이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와 이곳저곳 둘러보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운은 극도로 긴장해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만약 서태천이 옷장을 열어젖힌다면 이대로 들통나는 셈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혈압이 상승하며 뒷골이 서늘했다.
이러다가 나 잡고 애 잡겠네. 사람 살려!
자꾸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아, 이지운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한편 서태천은 기가 막혔다. 지난밤 이지운의 흔적을 캐치한 서태천은 아침이 밝자마자 최영희 여사에게 연락했다. 선물을 가져다드리러 왔다고, 지금 집 앞이라고 말하니 최영희 여사는 너무 놀라 뒤집어진 목소리를 냈다.
-왜, 왜 오니!
“아들이 어머니 집에도 못 갑니까. 미술관에 가져다드리기엔 부피가 너무 커요. 저 여기 아파트 건물 입구예요. 집에 놓고 가겠습니다.”
-그, 그게…!
“집에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는 최영희 여사의 말투에서 서태천은 확신했다. 집안에 이지운을 숨겨 놓고 있구나. 하지만 대놓고 그걸 말할 순 없기에 이렇게 망설이는 것일 테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건 허술해도 이렇게 허술할 수 없었다. 주방 식탁에는 방금 전까지 누군가 밥을 먹고 있던 흔적이 있었다. 거실 소파 근처에도 마치 발자취처럼 귤껍질이 흩어져 있었으며, 손님방으로 쓰는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방바닥에 흐트러진 이부자리는 지난밤 누군가가 이곳에서 잠들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의 모친을 생각하면, 이건 제삼자의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낯익은 자의.
이지운은 서태천이 가깝게 다가오는 소리에 몸을 작게 말고 웅크렸다. 그런다고 해서 서태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능이 그렇게 시켰다.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제발요!
이지운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세상사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곧 문이 활짝 열렸다.
“…지운 씨. 여기 있었군요.”
“태, 태천 씨.”
이지운은 눈앞에 나타난 서태천을 보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일단 무섭다는 감정이 컸다. 분명 서태천이 자신에게 화를 낼 것이라고, 냉정한 이별의 메시지를 남기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열이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지금 내가 그 소리를 들으러 온 줄 압니까.”
“네?”
일단 사과부터 했는데 서태천의 반응이 의외였다. 서태천은 걱정과 슬픔, 그리고 안도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지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떠나지 말아요. 그렇게 빌러 온 겁니다.”
“태천 씨….”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면 알려 줘요. 고칠 수 있도록.”
“그런 게 아니에요.”
이지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태천이 손을 뻗어 이지운의 얼굴을 감쌌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입니다. 제발 날 떠나지 말아 줘요.”
목소리는 절박했고 손끝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토록 강하고 메마른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지운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혼자서 마음대로 행동하고, 걱정시키고, 괴롭게 만들었어. 태천 씨가 사람이 이렇게 힘든 표정을 짓다니. 이건 다 내 탓이야.
“미안해요. 태천 씨. 미안해요…!”
이지운은 서태천의 품에 제 몸을 내던졌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잘못했어요. 집 뛰쳐 나와서 미안해요.”
“…그럼 집으로 갈 건가요.”
“네. 돌아갈래요.”
이지운은 서태천의 품에 안겨 훌쩍였다. 서태천은 옷이 망가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제 소매로 이지운의 얼굴을 살뜰히 닦아 주었다.
“어머니한테는 내가 나중에 연락드리죠. 일단 나랑 같이 내려가요.”
“네. 그래요.”
갖고 온 것도 없었기에 따로 짐을 쌀 것도 없었다.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옷가지로 갈아입고, 코트를 걸친 후 이지운은 아파트를 나섰다.
“어서 타요. 추우니까.”
“네.”
이지운이 조수석에 올라타고, 차는 조용히 움직였다. 이지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제멋대로 뛰쳐나가서.”
“아닙니다.”
“…너무 미안해요. 태천 씨.”
“그만 사과해도 돼요. 괜찮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등을 꼭 쥐었다가 놔주었다. 단단하고 따스한 온기가 전달돼 이지운은 다시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울지 말고요.”
“흑, 네.”
훌쩍거리면서 달리기를 20여 분. 두 사람이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자 이지운은 편안함을 느꼈다. 언제나와 같은 온도와 습도, 그리고 향기가 너무도 익숙했다.
“아,”
“지운 씨!”
이지운이 다리를 휘청였다.
“괜찮습니까.”
“아… 괜찮아요. 그냥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이지운을 서태천이 단단히 받쳤다.
“이리 와서 좀 쉬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을 데리고 널따란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이지운은 무심코 바닥을 보았다가 숙려둥이 인형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남겨 두었던 숙려둥이 인형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 역시 메시지 들었구나.
미안하고 또 쪽이 팔려, 이지운은 헛기침을 했다.
그 사이 서태천은 따뜻한 차를 타와 이지운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이지운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지운 씨.”
“네.”
“내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미안해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아, 그런 게 아니에요. 태천 씨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왜 날 떠나려고 했습니까.”
서태천의 눈에 긴장과 절박함이 어렸다. 이지운은 그게 가슴 아팠다.
나의 경솔함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 탓을 했나 보구나. 그게 아닌데…!
“실은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었어요.”
“예? 지금 뭐라고,”
서태천이 얼굴을 굳혔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에 이지운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아, 아니래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한부 아니었어요. 오진이었거든요.”
“하아… 너무 놀랐습니다.”
“다시 검사해 보니까 병이 아니라 몸은 멀쩡했어요.”
“설마 지운 씨. 그래서 내 곁을 떠나려고 한 겁니까?”
서태천의 질문에 이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가족이 되고… 더없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제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태천 씨가 슬퍼할 테니까요. 당신한테 그런 아픔을 안겨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사라지자 싶었어요.”
“나랑 상의하지 그랬습니까. 그리고 설령 아프더라도 나는 지운씨가 곁에 있는 걸 원합니다.”
서태천의 말에 이지운은 목이 메고 코끝이 시큰했다.
“정말이에요?”
“당연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만약에 지운 씨가 정말로 아픈 것이라고 해도,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 해도 그 순간까지 함께하고 싶은 게 내 마음입니다.”
어느덧 이지운의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멀리 떨어지는 것이 고통을 줄여 주는 길이라고 여겼는데 이 사람은 정반대로 생각했구나. 함께해야 아픔이 덜어진다고 믿는 거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요? 지운 씨와 함께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멀어지는 거요.”
“태천 씨….”
“약속해 줘요. 나랑 평생을, 지금부터 남아 있는 삶의 순간이 짧든 길든 무조건 나와 함께할 거라고.”
이토록 진실된 연인의 고백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지운은 눈물 가득한 얼굴로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