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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86화 (86/100)

86화

“다 왔다.”

“감사합니다.”

최 여사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녀가 길을 이끌어 이지운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가만 보니 이지운의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있었다. 여간 운 게 아닌 듯했다.

훌쩍, 훌쩍. 조용한 엘리베이터에 이지운이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최 여사는 아무래도 서태천이 뭔가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평생 연애 한번 안 해 보고 들입다 결혼부터 지르더니, 분명 지운이를 섭섭하게 한 걸 거야. 태천이는 제 아빠를 닮아서 무뚝뚝한 편이니까. 마음 상하는 소리를 했을 수도 있지.

“속상했나 보네. 자꾸 울어.”

“흐… 어엉, 네.”

이지운이 코트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최 여사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본인의 고급 스카프를 풀어 이지운에게 건넸다. 빛이 번쩍번쩍 나는 실크 스카프를 보며, 이지운은 차마 여기에 코를 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코 풀어.”

“그, 그래도 되나요.”

“그냥 좀 풀어.”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팽. 이지운이 시원하게 코를 풀고 엘리베이터에 내렸다. 

최 여사가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이지운은 쭈뼛거리며 화려한 장식물과 그림 액자로 가득한 집 안에 들어섰다. 기품이 넘치면서도 우아하고 세련된 것이, 최 여사의 이미지와 닮아 있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며칠만 있다가 나갈게요.”

“아니야. 너 있고 싶은 만큼 있어.”

최 여사가 이지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생긴 것과 달리 최 여사는 다정다감한 구석이 있구나. 이지운은 서태천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면모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꾸르륵.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지운의 배에서 굉음이 났다. 

“아… 민망하네요.”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다. 아침은 걸렀고, 병원 진료받느라 오전이 다 지났으며 속이 안 좋아 점심도 먹지 못했다. 하루 종일 섭취한 것이라고는 난동 부린 후 간호사가 맞춰 준 수액뿐이었다.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에너지는 썼는데 먹은 것은 없으니, 몸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배고픈가 보네. 밥 좀 차려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밥까지 신세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지운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냉장고에 먹을 것이 좀 있을 거야. 기다려.”

최 여사가 이지운을 억지로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녀가 분주하게 주방을 오가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미역국과 코다리 조림이 준비되었다. 몇 가지 밑반찬과 따뜻한 밥도 눈앞에 정갈하게 놓였다. 이상하게 식당에서 먹었던 밥과 달리 이 밥상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지도 않았고, 입맛도 돌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먹어.”

이지운은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배 속에 한 사람이 더 있으니 2인분을 먹는 게 맞지 않을까,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며 싹싹 밥그릇을 비웠다. 

“잘 먹네. 원래도 잘 먹는 것 같기는 했다만….”

“많이 배고팠어요.”

“그럼 후식도 먹을까?”

“네!”

임신을 해서 그런 건지, 밑도 끝도 없이 먹을 것이 들어갔다. 최 여사가 냉장고에서 망고와 귤을 꺼내 왔다. 둘 다 이지운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손님방은 평소에 난방을 안 해 놓거든. 데워질 때까지 여기서 과일이나 먹자.”

“네, 어머니.”

최 여사가 과도를 가져와 망고를 손질했다. 그때 이지운이 몸을 부르르 떨며 움츠러들었다. 

“어머. 추운가 보네. 밖에 오래 서 있었나 봐?”

“어… 실은 체온 조절이 잘 안 돼요.”

“그래? 그럼 이불 가져다줄게. 덮어쓰고 있어.”

최 여사가 방에 들어가 도톰한 이불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이지운의 어깨에 손수 걸쳐주면서, 최 여사는 추워서 어떡하냐고 걱정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기 들면 안 돼. 잘 싸매고 있어.”

“…네.”

이불을 추슬러 주고서는 조용히 과일을 깎는 최 여사를 보면서, 이지운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이 점마저도 서태천을 닮았구나 싶었다. 

말을 유려하게 잘하진 않지만, 행동으로 챙겨 주는 사람이야. 태천 씨는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네.

“자, 망고 좀 먹어.”

“고맙습니다. 우와, 너무 맛있어요.”

이불을 두르고 망고를 한 입 먹으니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달고 시원한 맛이 상큼하기까지 했다.

“귤도 먹고.”

노릇하게 잘 익은 귤을 보자 이지운은 또 한 차례 입맛이 돌았다. 당장 배부르고 따뜻해지자, 이지운은 싱숭생숭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는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지만, 아직 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를 어쩐다. 언제까지 여기서 귤이나 까먹고 놀고 있을 순 없는데….

“귤 좀 더 먹어.”

“네, 어머니.”

귤을 까는 이지운의 손길이 느릿해졌다. 표정 또한 아까보다 한층 어두워진 탓에, 최 여사는 이지운에게 고민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런데 말이다… 너 표정이 너무 안 좋구나.”

“…네. 그렇죠.”

“뭐라도 말하고 싶으면 말해.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속에서 꺼내야 병이 안 나는 법이거든.”

“….”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지만.”

최 여사가 이지운의 손등을 덮으며 눈을 마주쳐 왔다. 이지운은 순간 울컥하며,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머니.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 말해 봐.”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졌지만, 이지운은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말하기로 했다.

“저 임신했어요.”

“뭐!? 세상에.”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고요.”

“진짜니, 어머.”

최 여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도 놀라운 소식이었고, 또 기쁜 이야기였다.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손주가 생긴다니 믿기지 않았다. 

“저…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요. 지난번에 태천 씨 먹이라고 주신 약 있죠?”

“응? 어, 한약?”

“네. 실은 그거 태천 씨가 안 먹길래 제가 좀 먹었거든요.”

이지운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최 여사가 입을 떡 벌렸다.

“뭐… 뭐라고,”

“죄송해요. 제가 태천 씨 약을 먹어서….”

“아니, 미안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약을 먹었다고?!”

최 여사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퍽퍽 쳤다. 

“그 약은 알파들 기력을 돋우는 영양제야. 오메가가 먹으면 페로몬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임신한 것 같아요.”

이지운은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히트 사이클, 의사가 말한 이상 페로몬 수치, 확률이 낮은 여건에서도 생긴 아기.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졌다.

“아니, 그래. 그렇다 쳐. 그런데 태천이 이 자식은 임산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잘못을 했길래 홑몸도 아닌 네가 집을 나와?”

“아니, 어머니 그게 아니라요.”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닌데. 아…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지운은 막막했다. 

시한부 선고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려나. 이지운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찰나였다. 최 여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태천인데?”

“어, 어…! 받지 말아 주세요.”

이지운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젓자, 최 여사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전화는 끊겼다.

“휴.”

“너무 안 받으면 수상하니까, 내가 걸어서 자연스럽게 통화해 볼까?”

“네. 혹시 저 봤냐고 물으면 절대 못 봤다고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낫겠다.”

최 여사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서태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과일을 먹은 탓에 손가락에 과즙이 묻어 있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그녀는 그만 일반 통화가 아니라, 영상 통화를 걸고 말았다. 

“어머! 영상 통화 눌러 버렸어.”

“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취소할 사이도 없이 서태천이 전화를 받았다. 상황을 파악한 이지운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납작 엎드렸다. 

-네. 어머니.

“아, 아들! 안녕.”

최 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태천 역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먼저 전화해 봤길래 걸었어!”

-아… 네. 실은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그래?”

지금 와서 갑자기 영상 통화를 끊으면 엄청나게 수상해 보이겠지. 최 여사는 왕년에 극장가를 뒤흔들었던 여배우였다. 그때의 연기력을 되살릴 때라고 판단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하게 웃었다.

“뭔데. 말해 봐.”

일단은 장소를 옮겨서 내 등 뒤의 지운이가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겠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거야.

최 여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핸드폰 렌즈의 각도가 변화하면서, 서태천의 눈에 최 여사의 거실 광경이 폭넓게 보였다.

-잠깐만요. 어머니, 뒤에 그거 뭐예요?

“어?! 뭐, 뭐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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