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간호사는 수화기 너머로 별안간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흠칫했다. 화를 내거나 폭언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이지운이 난데없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흐… 흐… 전화 끊을게요.”
-이지운 님, 이지운 님?!
이지운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자기 팔자가 너무 기구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착오로 결혼했는데 오진으로 이혼하게 생겼다.
“아악!”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이지운을 보고, 입구 쪽에 있던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환자분! 왜 이러세요.”
“진정제 투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급 환자 같아요. 얼른 처치하겠습니다.”
이지운은 간호사들에게 들려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이지운이 쇼크 증상을 일으키는 산부라고 진단 내린 다음, 침대에 얌전히 누워 수액을 맞고 가라고 했다. 온도, 습도가 딱 맞고 아늑한 주사실 침대에 누워 이지운은 피식 웃었다가 눈물 콧물을 뺐다가 하며 감정 기복을 보였다.
나 이제 어떻게 해. 회사 돌아갈 수 있어? 이미 잘린 거 아니냐고.
그리고 태천 씨. 이미 숙려둥이 인형에 녹음된 메시지 들었겠지. 그건 또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거실 한복판에 나 보란 듯이 떡하고 숙려둥이를 놓고 왔으니 분명 서태천은 음성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다. 결혼이 부담되니, 당신을 사랑하지 않니 어쩌니 하는 메시지. 그걸 들었다면 지금쯤 서태천은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하하. 태천 씨, 저 시한부인지 알고 헤어지자고 한 거였어요. 조용히 여생을 마감하려고 회사도 그만둔 거였고요. 그런데 사실 아무 병도 아니고 오히려 임신이라잖아요! 하핫.
이번 건은 절대로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으아악!”
이지운이 냅다 소리를 지르자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며 등장했다.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니에요. 혈관통이 좀 있어서.”
“수액 살살 들어가고 있는데… 음, 조금 더 느리게 맞춰 드릴게요.”
간호사가 애꿎은 수액 줄을 처치하는 동안 이지운은 점점 의기소침해져 갔다.
수액을 다 맞고 나온 이지운은 약국에서 약을 받고, 다시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 머릿속으로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이 창피함을 해소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와 가정에 복귀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원래 이지운은 무언가를 회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 온 만큼, 어지간한 일에는 정면승부를 하는 타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회사며 집안을 뒤집어놓고 튀어나와서는, 하루 만에 ‘아, 정정합니다. 퇴사와 이혼은 취소할게요’라고 하기에, 자신이 벌여놓은 일은 너무나 막중했다.
침착, 침착하자.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보는 거야. 가정이 먼저인가? 회사 복귀부터? 음… 일단은 태천 씨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바로 연락해서 여보! 나 돌아왔어요! 하는 것보다는 일단 집 근처에 가서 상황을 살피는 거다.
“으음….”
이지운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타요?”
난데없이 근처에서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곳은 버스 정류장, 집으로 가는 버스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아, 타… 탑니다! 잠시만요.”
이지운은 후다닥 버스에 올라 손잡이를 잡았다. 이곳에서 열 정거장 정도 가면 동네가 나왔다. 시간으로 따지면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셈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차도 막히지 않아 버스는 빠르게 동네로 향했다.
어찌어찌해서 엉겁결에 버스에 올라타긴 했는데, 막상 차가 쌩쌩 달리자 겁이 났다. 차라리 길이 막혔으면. 이 버스가 느릿하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나 평일 애매한 시간대의 버스가 막힐 리 없었다. 차는 막힘 없이 나아갔다.
“끄응….”
한숨을 쉬었다가 끙끙댔다가, 버스 봉에 이마를 쾅쾅 찧는 그를 승객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지운은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의 고통과 쪽팔림이 커져 갈 뿐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따로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집도 절도 없는 신세 아닌가. 언제까지 모텔에서 도피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까 집에 가는 게 맞아.
“안 내려요?”
아차차, 내려야지.
이지운은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올라야 했다. 이지운은 꾸물꾸물 걸으면서 자신이 마치 망한 성적표를 들고 집에 돌아가는 수험생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이지운의 발걸음은 느려지기만 했다. 그래도 걸어서 금방이라, 이지운은 마침내 집 담벼락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차고 쪽을 살폈다. 서태천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언제 그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어, 이지운은 최대한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대문을 기웃거렸다.
만약에 태천 씨를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분명히 화났을 텐데….
“하, 미치겠다.”
그때였다.
“지운아!”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놀란 이지운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 여기서 뭐하니?”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풍성한 웨이브를 넣어 미모를 빛내고 있는 중년의 여성. 바로 서태천의 모친, 최영희 여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어머니! 안녕하세요.”
“너 여기 있었구나. 어떻게 된 일이야. 태천이가 너 찾던데?”
“그… 그게.”
이지운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최영희 여사는 죄인이라도 된 듯 구는 이지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아침, 서태천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가 최영희 여사는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지운이가 사라졌어요. 제 오메가 말입니다.’
자신과 같이 망고 빙수를 먹었던, 미워할 수 없는 마성의 소유자 이지운이 하늘로 증발했단다. 최영희 여사는 간절하고 급박하게 이지운을 찾아야 한다고 되뇌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본인도 얼이 빠졌다.
아니, 지운이가 도망을 쳐?!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최영희 여사는 우선 말을 아꼈다. 정신없는 아들에게 일단 알겠다며, 나중에 연락하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뒤숭숭해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서태천을 찾아왔는데 이게 웬걸. 아들이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지운이 집 앞을 기웃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니. 태천이한테 연락은 했어?”
“아, 아니요.”
“그럼 내가 연락해야겠다.”
“어머니, 잠시만요!”
이지운이 최영희 여사의 손목을 잡았다.
“왜? 너 왜 그러니.”
“저, 저요. 며칠만 숨겨 주시면 안 될까요?”
이지운이 구원의 동아줄을 잡듯이 최 여사를 붙들고 간절하게 빌었다.
“뭐?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저 딱 며칠만 숨겨 주세요. 태천 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아 주시고요.”
최영희 여사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약 30여 년 전, 자신과 서 회장이 여러 가지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이혼 위기를 맞이했을 때, 최 여사가 딱 이렇게 행동했었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며칠간 친구 집으로 잠적을 했더랬지. 그때는 도저히 서 회장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위기가 있나 보네.”
“네, 맞아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이럴 때는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묵묵히 품어 주는 지인이 필요할 터. 게다가 이지운이 자신에게 의지해 온다는 사실에 최 여사는 살짝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래. 내가 좀 든든한 이미지의 어른이긴 해. 그리고 딱 보니까 지운이는 지금 갈 데가 없는 것 같은데, 애먼 데 헤매게 하느니 내가 데리고 있는 편이 안전하겠지.
“태천이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네. 절대요.”
“알겠다. 가자.”
최 여사의 대답에, 이지운은 엎드려 큰절을 할 뻔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추우니까 얼른 차에 타자. 감기 들겠다.”
최 여사가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이지운은 냉큼 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최 여사는 빠르게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은 몰랐다. 바로 몇 분 뒤, 간발의 차로 서태천이 탄 차가 집 앞에 도착했음을. 만약 이지운이 그때 최 여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현장에서 검거되었을 것이다.
타이밍이란 얄궂은 법이라, 서태천은 아쉽게도 이지운을 놓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이지운은 서태천의 집에서 완벽하게 도망쳐 유유히 길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갓난아이를 꼭 안고 서태천으로부터 도망치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지운은 문득 그 꿈을 떠올리고서 뺨을 긁었다. 엄청 슬픈 꿈이었는데, 현실과는 절반만 닮아 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여보 자기. 전 지금 당장 쥐구멍이 필요한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