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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84화 (84/100)

84화

“증상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복통은 세 차례 정도 있었어요. 아랫배가 뭉근하게 아픈데 안에서 혹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막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해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통증이었고요. 또 체온은 하루에 한 번 정도, 패턴 없이 오르락내리락해요. 속은 그제부터 답답하고 음식 보면 울렁거려요. 실은 어제부터 제대로 밥을 못 먹고 있어요.”

의사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음. 이지운 환자님. 확실히 그 병이라고 진단받으신 게 맞습니까?”

“네. 피검사 결과지까지 저한테 보여 주셨는데요.”

“어… 그래요. 일단 저희 측에서도 한번 피검사를 진행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간호사, 채혈실로 안내 부탁합니다.”

의사가 간호사를 불렀다.

“환자분, 이리로 오세요.”

간호사가 다가와 이지운을 일으켜 세웠다. 큰 병원이고 중병이니 간단하게 처방이 나오진 않는구나. 이지운은 약 하나 타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되겠나 싶어 속이 상했다.

채혈실로 들어간 이지운에게 간호사가 큰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주먹 꽉 쥐시고요. 따끔합니다.”

간호사는 주사기 가득 그의 피를 채우고 잠시 그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 말했다. 다시 대기실로 나온 이지운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간호사가 문을 열고 이지운을 불렀다.

“이지운님. 형질 의학과로 초음파 보러 가실게요.”

“네? 저요?”

“네. 교수님이 대기하고 계십니다.”

복부 쪽 통증 때문에 보려는 건가? 난 그냥 약만 타면 되는데….

이지운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이 병원은 과잉 진료를 보는 것이 아닌가, 살짝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간호사와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없다고 생각됐으므로, 그는 순순히 초음파실로 향했다.

“일단 설명부터 듣고 초음파 보겠습니다.”

간호사가 이지운을 초음파용 베드 옆 상담 테이블에 앉혔다. 

“안녕하세요. 내과에서 협진으로 오셨다고요.”

새로운 의사가 이지운을 맞이했다. 

“아, 네. 그런데 저 왜 여기로 안내받은 건가요?”

“형질 의학과에서 설명을 드릴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런가요.”

의학적으로는 이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 이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맞은편 의사의 표정이 미묘했다.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벅찬 것 같기도 했다.

뭐지, 이 의사. 기분 좋아 보이네…?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분위기에, 대체 왜 이러냐고 이지운이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임신이네요. 축하합니다.”

“예?!”

이지운이 입을 틀어막았다. 임, 뭐요?!

너무 당황스러워 사고가 정지했다. 눈도 깜빡이지 못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동상처럼 굳은 채 있는 이지운에게 의사가 읽기 어려운 차트를 보여 주었다.

“불치병 아닙니다. 열성 오메가가 임신했을 때 겪는 부작용 증상이에요. 지금 페로몬 수치가 좀, 많이 교란돼 있으시거든요.”

“예…? 불치병이 아니라고요…?”

지금 몰래 카메라를 찍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귀가 잘못된 것인가. 이지운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머리는 어지럽게 뱅뱅 돌고 귓가에는 이명이 울렸다.

“네. 피검사 수치로 봤을 때 확실히 임신입니다. 지난번 병원에서 오진이 있었던 모양인데요.”

“그, 그럴 리 없어요. 바로 엊그제 진료였고요, 확실히 저 죽는다고 했는데…?! 임신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요.”

“페로몬 수치가 정상범위 바깥이긴 한데… 그래도 몸 상태는 정상입니다. 일단 초음파 보시죠.”

어안이 벙벙해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이지운은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배에 차가운 젤이 듬뿍 올려졌고, 의사가 초음파 기구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연이어 흑백 스크린에 희끄무레한 영상이 잡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광경 그대로였다. 

“여기 클로즈업 해 볼게요.”

의사가 기구를 조작하더니 화면을 멈췄다.

“이게 아기집입니다.”

“예?!”

이지운이 식겁해 소리를 질렀다.

“아기집이 커지면서 복통이 발생할 수 있어요. 체질상 열성 오메가들이 우성에 비해 많이 겪죠.”

눈앞에 보이는 저 작은 점이 아기집이라니. 내 배 속에… 태천 씨와 나의 아이가 있다고? 말도 안 돼. 이지운은 아직도 현실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물론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피임 없이 여러 차례 관계를 맺기는 했다. 하지만 임신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저, 저…는 당시에 히트 사이클이었지만 상대방은 러트가 아니었는데요. 저 열성인데 그러면 임신이 안 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주 확률이 낮다 못해 0%에 가깝죠. 열성 오메가가 임신을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딱딱 맞아떨어져야 하니까요.”

“그러니까요…!”

“음.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지금 이지운 님의 혈액 내 오메가 페로몬 수치가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혹시 페로몬을 교란시킬 만한 성분을 섭취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면 몸이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게 되면서 임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갑니다.”

페로몬을 교란시킬 성분을 섭취하다니. 난 그런 적 없는데? 이지운은 의아해하면서도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예를 들어서 알파용 영양제 같은 거요. 임신이 간절한 분들은 그걸 드시기도 합니다. 물론 의사로서 권장해 드리는 방법은 아니긴 합니다만, 암암리에 퍼져 있는 방법이기도 하죠.”

“영양제….”

“혹시 파트너분이 드시는 약을 잘못 드신 적 없나요? 아무리 봐도 이건 고함량의 알파 페로몬이 몸 안에 들어가면서 역으로 오메가 페로몬이 과다 방출된 케이스로 보입니다.”

쾅. 이지운은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건강 체질이다 보니 이지운은 따로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았다. 그가 이 몇 달간 먹은 약이라고는, 서태천의 한약뿐이었다.

서태천의 어머니가 아들 챙겨 주라고 건네줬지만 이지운이 다 훔쳐먹은 그 한약.

어쩐지 그걸 먹으면 몸이 후끈후끈 더워지면서 기력이 보충되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설마 임신을 유도한 건가. 

“세상에… 저 먹은 거 있어요. 남편 한약이요….”

“역시. 그랬군요. 아무튼 그 외에 큰 이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속 울렁거릴 때 먹을 만한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고 그래도 이상이 있으면 내원해 주세요.”

***

터덜터덜, 형질 의학과 센터를 빠져나오는 이지운의 발걸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표정은 멍했다.

“이지운님, 처방전 챙겨 가셔야죠?!”

수납 창구 직원이 그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 네.”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걸 놓고 갈 뻔했네.

“초음파 사진은 잘 챙기셨어요?”

“그건 주머니에 넣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간호사가 친절하게도 나가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이지운이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방전을 쥐고 병원 문밖으로 나온 이지운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지운을 힐끔거렸다. 

“시한부가 아니래….”

이지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단은 시한부가 아니라는 점.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게다가 배 속에는 새 생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축복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만약에 이 일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오롯이 기쁨을 누렸겠지만, 지금은 좀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너무 과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는 패기 넘치게 사직서를 날렸고, 집에서는 숙려둥이를 껴안고 비장한 이별 메시지를 남겼다. 마지막 잎새 감성이었다. 

…쪽팔려!

미친 거 아니야. 나 지금 무슨 생쇼를 벌인 거야.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유난에 유난, 퇴사에 파혼, 가출까지 벌였는데… 나 멀쩡하다고? 

내 비장한 결심은 다 뭐가 되는데. 회사에는 떵떵 큰소리치고 사표 던지고, 태천 씨한테는 모진 말 담아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집 뛰쳐나오고…! 

오진이라니. 처음에 병원에서 진단만 잘 내렸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그 인간 때문에 내가 이 무슨 고생이야. 돌팔이, 가만 안 둬.

이지운은 의사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가 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또 서태천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액정을 봤는데, 아니었다. 처음 오진을 내린 병원이었다. 

“여보세요?”

-이지운 환자님이시죠. 엊그제 내원해 주신 내과인데요.

“안 그래도 제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저기. 저 죽을 병 아니죠?”

-아… 알고 계셨구나. 정말 죄송해요. 오늘 건강 관리 공단에 희귀병 특례 지원 등록하려고 봤다가 일이 꼬인 걸 알았어요. 저희 병원에 생년월일이 같은 이지운 님이 질환자셨고, 이지운 님은 아니셨어요. 저희가 그분 거 피검사 결과지를 잘못 불러왔어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흐… 흐흐….”

-이지운 님?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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