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이보리색 머플러를 한 바퀴 더 둘러 목을 감싸고, 이지운은 고개를 숙였다. 서태천을 닮은 좋은 향이 나고 따뜻했다.
길 한복판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흔들려서는 안 돼. 차라리 몰염치하고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나아. 그편이 태천 씨의 상처도 덜할 거야.
이지운은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지고 걸음을 내디뎠다.
근데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지…?
막상 뛰쳐나오니,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다. 어쨌든 회사 근처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눈에 보이는 아무 버스나 잡아탔다. 주머니 속에서는 핸드폰 진동이 요란스럽게 울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열 정거장 정도 가니, 잘 모르는 동네가 나왔다. 오히려 잘 됐다 싶어서 이지운은 그곳에서 하차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거리의 풍경은 낯설었고, 또 조금 외롭기도 했다.
눈앞에 카페가 보였다. 이지운은 조심스럽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영업을 하는 곳인지, 불도 환하게 켜져 있고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카페에서 내뿜는 불빛이 따뜻하고 온화하게 느껴졌다.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는 이끌림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게 종소리가 울리며 커피 향이 확 풍겼다. 어디서 맡아본 적 있는 냄새인가 잠깐 회상에 잠겼다. 서태천이 집에서 내려 마시는 원두와 종류가 비슷한 듯했다. 저절로 눈앞에 서태천과의 평화로웠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가 있는 풍경에는 항상 커피가 있었다. 이제는 이지운 자신만이 서태천의 풍경에서 지우개질 당할 것이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서 오세요. 주문은 이쪽에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 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아르바이트생의 등 뒤로 무수히 많은 메뉴가 적힌 메뉴판이 세팅돼 있었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아무 커피나 시켰겠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망설여졌다. 남은 생에 몇 번이나 더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한 잔 한 잔이 각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뭔가요?”
“추천 메뉴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네.”
“판매량으로 따지면 카페 모카요. 요즘은 따뜻한 게 잘나갑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네.”
이지운은 무심코 서태천이 준 카드를 내밀었다가, 흠칫하며 다시 지갑 안으로 카드를 넣었다. 그러고는 자기 명의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생각이 짧았어. 아까 그 카드를 쓰면 태천 씨가 내 위치를 알게 되니까 안 되지. 그리고 이제 우리는… 끝난 사이기도 하고.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지운은 커피를 가지고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옷이랑 내 짐은 다 신혼집에 있는데. 아냐, 곧 죽을 사람이 짐은 왜 필요해. 통장에 저축해 놓은 돈이나 다 쓰고 죽으면 그만이지.
회사는… 모르겠다. 사람들 다 있는 데서 그 난리를 쳐놨으니 곧 태천 씨 귀에도 들어가게 될 텐데. 많이 놀라겠지?
서태천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지운은 코트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한참 혼자 훌쩍이고 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왔다.
“저기, 이거요… 받으세요.”
그녀가 내민 것은 물티슈와 냅킨이었다. 이걸로 눈물을 닦으라는 것인가. 상냥한 배려에 이지운은 그만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살 만한 세상인데…! 왜 나는 떠나가야 하는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냅킨으로 눈물을 닦고 물티슈에 코를 풀며 엉엉 울었다.
실컷 울었더니 칼로리가 쭉쭉 소진된 건지, 이 와중에도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되게 배고프네.
이지운은 자기 자신이 처량하면서도 우스웠다. 하지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 곱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왕이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끼니는 챙겨야겠다며, 이지운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르바이생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이지운은 카페를 나섰다. 휘잉, 메마른 겨울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드러난 피부를 차갑게 얼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손끝 발끝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뼈해장국 전문점이 하나 보였다. 워낙에 즐겨 먹는 메뉴였기 때문에, 이지운은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직원이 이지운을 보고 어서 들어오라며 재촉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뼈해장국 한 그릇만 주세요.”
“저쪽으로 앉으세요.”
식당 직원이 이지운이 앉은 자리로 밑반찬과 물을 가져다주었다. 몇 분 되지 않아 펄펄 끓는 해장국이 그의 앞에 놓였다. 그런데 평소라면 먹음직했을 국물 냄새가 고약하게 느껴지고, 한입 삼키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이상해. 이 집이 맛없는 건가? 아니야. 이건 맛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뭐랄까. 사람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안돼.
억지로 몇 숟갈 뜨려다가, 이지운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맨밥을 조금 먹고 찬물로 입안을 헹궜다. 도저히 국물과 살코기에 손이 가지 않았다.
설마 나 벌써 증상이 시작된 건가? 의사가 그랬잖아.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훅 나빠지는 게 이 병의 특징이라고.
덜컥 겁이 나, 이지운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나 진짜 죽는 거야? 이렇게 조금씩 아프다가 밥도 제대로 못 삼키고, 말라 죽는 거냐고.
“우리 집 해장국이 입에 안 맞아요? 통 먹질 않네.”
식당 직원이 살짝은 언짢은 듯 이지운을 쳐다보며 물을 리필해 주었다.
“속이 좀 얹혀서요. 요새 위가 시원치 않네요.”
억지로 웃으며, 이지운은 눈을 내리깔았다. 심란함과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지운은 차마 이 식당에 더 머무를 용기조차 없었다. 먹지 못하는 음식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 또한 고통이었다.
***
같은 시각 서태천은 차 뒷좌석에 앉아 31번째 통화 시도를 하며, 반복되는 기계 음성을 듣는 중이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잠시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젠장.”
거듭되는 안내 멘트가 지리멸렬하고 치가 떨렸다. 더는 듣기가 싫어 견딜 수 없었다.
사고가 날까 봐 차마 본인이 차를 몰지는 못하고, 김 기사를 불러 집까지 운전을 시켰다. 생각할수록 그러길 잘했다 싶었다. 지금 이 흥분과 초조함, 주체되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운전을 했다가는 필히 사고가 났을 터였다.
“조금 더 빨리 부탁합니다, 김 기사님.”
“네. 도련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서태천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침에 잘 세팅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반쯤 미친 모습이 차창에 비쳤다.
이지운이 사직 신청서를 내고 회사를 뛰쳐나갔단 소식은, 9시 10분경 서태천에게 전달되었다. 비서인 김민지가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그 즉시 마케팅 1팀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이지운은 어디론가 사라져 핸드폰마저 꺼 놓은 후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게 묻는 서태천에게 팀원들은 물론이고 해당 팀장도 섣부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뛰쳐나갔다고요? 어디로 간지도 모르고?”
“예. 그렇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서태천은 땅밑이 푹 꺼지면서 절벽에서 추락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는 심정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머리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간신히 두뇌를 회전시켜 내린 결론은 회사 근처에 남아 있을 리는 없으니, 집으로 가 보는 게 최선이란 것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듯한 머리를 수습하며 서태천은 차 문을 박차듯이 열고 내렸다. 성큼성큼 걸어가 대문을 열어젖힌 그는 단숨에 정원을 가로지르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집안은 고요하며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도 없으면 정말 사라져버린 후라는 것을 알기에, 서태천은 초조했다. 일곱 칸이나 되는 방과 욕실을 일일이 열어서 확인하는 그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부부 침실에도, 욕실에도, 주방에서도 이지운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소 이지운이 개인 짐을 놔두던 작은방에 다다랐을 때 서태천은 다소 당황했다. 방 안의 짐은 그대로였다. 하다못해 여행용 캐리어 하나 사라지지 않고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그 말은 이지운은 짐도 없이 몸만 증발했단 소리였다.
없어, 없다고. 어디로 간 거야…!
그 어떤 단서도, 변화도 없었다. 집 안은 아침에 이지운보다 일찍 출근하면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다만,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거실 한복판에 인공 지능 숙려둥이 한 마리가 달랑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