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지운은 가만히 서태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조각같이 잘생긴 알파. 무뚝뚝하지만 근사한 이 사람은 이지운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사랑 고백이 나온 적은 없었다.
음… 왜일까.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이렇게나 다정하고 또 자상한데. 혹시 연애를 안 해 봐서? 태천 씨, 나 만나기 전에 제대로 된 연애는 안 해 봤다고 했잖아. 선만 몇 번 봐 본 게 다였다고 했으니까 사실상 나처럼 연애 경험이 없는 셈이지.
그래. 아직 연애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야.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사랑한다고 고백하겠지. 그리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이 알파가 이렇게 자상하고 다정하게 날 대해 주는데, 고백의 말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지운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거둬 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싱숭생숭하면서 허전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꼭 듣고 싶은 것. 그게 바로 사랑 고백이었으니까.
***
“그럼 통나무집에서 휴식 취하시고 저녁 캠프파이어 때 뵙겠습니다. 자유롭게 쉬세요.”
공무원들이 통나무집까지 커플들을 인솔했다. 일반 펜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에서 화기를 사용할 수 없고, 취사는 절대 금지라는 점이었다. 또한 말 그대로 통나무로 만들어, 문을 열자마자 향긋하고 은은한 나무 내음이 훅 끼쳤다.
“신기하네요. 통나무집 처음이에요.”
“이런 아이템도 괜찮군요. 숲속에서의 힐링이라.”
“우리 그룹에도 이런 느낌의 리조트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상당히 가족 친화적인 사업이 될 것 같군요.”
우리가 세 명, 네 명이 된다면 이런 곳에 놀러 와도 또 색다를 겁니다.
서태천은 뒷말을 생략하고 이지운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숲속을 부지런히 걸어서 그런지, 일주일 내내 시달려서 피곤한 건지 이지운은 좀 졸렸다. 하품을 하는 그를 보고, 서태천이 침대방으로 이지운을 데려갔다.
“눈 좀 붙여요.”
“태천 씨도 이리 와요.”
이지운이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럴까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옆자리에 몸을 뉘더니 이지운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지운은 등 뒤를 단단히 받쳐 주는 서태천의 몸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 사랑한다는 말이 없으면 뭐 어때. 이렇게 행복한,
“악!”
이지운이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랫배에 지독한 통증이 엄습한 탓이었다.
“지운 씨!”
서태천이 벌떡 일어나 이지운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그냥 잠깐, 아주 잠깐 아파서.”
“어디가 아픈 거예요.”
서태천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그냥 배가 좀.”
“어제도 이렇게 아팠습니까?”
“어제에 비하면 방금은 별로 안 아팠어요. 딱 1초 아프고 말았으니까요.”
이지운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심상치 않은데요. 지금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죠.”
“에이, 아니에요. 그냥 스트레스성 같아요. 위경련 아닐까 싶은데.”
“위경련이요?”
“주중에 야근하느라 커피 많이 마셨거든요. 그래서 위에 병난 것 같아요. 현대인의 스트레스, 뭐 그런 거죠.”
웃어넘길 분위기를 만들고자, 이지운은 바로 가뿐하게 침대를 벗어났다.
“정말입니까?”
“네. 월요일에 병원 다녀와서 진료 결과 알려 줄게요. 됐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내일 김 박사님께 왕진을 와 달라고 하는 게 안심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하루 차인데 뭐. 괜찮다니까요.”
이지운이 손사래를 쳤다.
“흠… 그러면 월요일에는 꼭 병원 갔다 오고, 결과 나한테 바로 공유해 주는 겁니다. 알겠죠?”
“네.”
방금은 어제에 비해 심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굵고 강렬한 통증이 있었다. 아직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혼자 몸으로 긴 세월 살아오다 보니, 이지운은 건강 관리의 필요성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이지운의 몸을 챙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살이라도 나서 며칠 앓으면 아르바이트를 잘릴 수 있었고, 그건 생계와 직결됐다. 이지운은 매해 독감과 감기를 피해 다니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방 주사를 맞았다. 조금이라도 아플 징조가 보이면 미리 약을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큰 병으로 발전했다가는 병원비도 감당이 안 될뿐더러 간호해 줄 사람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태천 씨 어머니가 주신 약, 그거라도 좀 먹고 올 걸 그랬나… 그거 먹으면 몸이 좀 건강해지는 기분인데.
요 며칠 야근으로 바빠서 그 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이지운은 이제부터라도 한약을 잘 챙겨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중에 최영희 여사에게 전화해 약의 효능이나 효과도 좀 물어보고 말이다.
“조금 더 쉬어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캠프파이어 시간 되면 깨워 주세요.”
“그냥 자지 않고요?”
“저 여러 사람이 하는 캠프파이어 꼭 해 보고 싶었어서….”
이지운이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서태천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지운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침대에 그를 눕혔다. 토닥토닥 가슴과 어깨를 두드려주는 박자가 너무도 편안해 이지운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캠프파이어는 저녁 도시락을 먹은 뒤 야간에 진행되었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고, 커다란 모닥불을 중앙에 설치하니 이보다 낭만적일 수 없었다.
“분위기 진짜 좋네요.”
“오길 잘했습니다. 그나저나 춥진 않아요?”
“전혀요.”
“그래도 걸치고 있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어깨에 자기 옷을 걸쳐주었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커플들 틈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12월의 저녁이라 조금 춥기는 했으나, 모닥불의 열기와 서태천의 체온이 합쳐져 이지운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아까부터는 아랫배도 전혀 아프지 않고 체온 조절도 원만하게 되고 있어, 몸도 가뿐했다. 그냥 지나가는 통증이겠거니. 이지운은 월요일에 병원 방문할 때까지는 건강에 대한 걱정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태천의 어깨에 기대었다.
“지운 씨.”
“네?”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내려다보며 그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감싸 안았다. 이지운은 왠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또 행복한데, 왜 자꾸 아련해지려고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네. 저도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과하게 행복해서, 이 남자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그런가 봐.
이지운은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을 사랑 탓으로 치부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서태천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
또다시 월요일이 밝았다. 이지운은 아침부터 송 팀장과의 신경전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또 시시콜콜 보고서가 어쨌네 저쨌네 태클을 거는 송 팀장이 지겨워질 무렵, 갑작스러운 출장이 잡혔다. 송 팀장은 다른 팀 팀장과 함께 현지에서 퇴근하겠다며 사무실을 나섰다.
잘됐다! 칼퇴 가능이네.
이지운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원수가 보이지 않으니 기분도 회복되고 업무도 그냥저냥 처리할 만했다.
태천 씨, 저 오늘 병원 갔다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ㅌㅊC
같이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혼자 가요?
그냥 혼자 다녀올게요.
잘 아는 병원이 있어서요.
ㅌㅊC
그러지 말고 같이 가죠.
내가 태워다 주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 진료인데요, 뭐. 다녀올게요!
만에 하나라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서태천이 유난을 떨 것이 뻔했으므로, 이지운은 혼자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서태천과 살림을 합치기 전 살던 동네에 가끔 다니던 병원이 있었다. 야간 진료를 8시까지 접수받아 준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혼자 훌쩍 다녀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별일이야 없겠지, 뭐. 태천씨 걱정시키는 거 싫으니까 얼른 진료받고 집에 가야겠다.
이지운은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 예전에 살던 동네 정류장에 내리고, 병원에 들어가 이름과 생년월일을 대서 접수한 다음 기다리는 동안도 크게 초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과에서 피검사를 진행하고 약 30분이 지난 뒤, 이지운의 세상은 뒤집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찾아온 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건만.
“죄송합니다만 검사 관련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이지운은 의사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의사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기 어려운지,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한번 문지른 다음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분이나, 보호자분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네? 혼자 왔는데요… 왜요?”
“이런 이야기는 혼자 들으시면 오히려 충격이 클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동의한다면 가족과 함께 대화 나누기도 합니다.”
대체 얼마나 결과가 안 좋길래 이렇게 말하는 거지. 이지운의 손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