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지운은 상품이라는 말에 순간 솔깃해졌지만, 지난번 퀴즈 대회 1등상으로 숙려둥이 굿즈를 받았던 걸 생각하고 이내 기대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게임에서 1등 해 봤자 숙려둥이 시리즈겠지. 어쩌면 태천 씨랑 숲속을 누비는 게 더 값진 선물 아닐까.
그렇다. 이지운은 출제자의 의도를 아주 정확하게 간파했다.
사실 이 숲속에 숨겨진 쪽지는 몇 개 되지도 않았고, 상품도 형편없었다. 그저 자기 배우자랑 손을 잡고 아름다운 숲속을 헤매 보라는 게 주최 측의 의도였다.
“자. 그렇게 보물찾기를 한 다음에는 이곳에 모여서 잔디밭 도시락 타임을 가집니다. 그리고 오늘 밤은 캠프파이어가 있어요. 취침은 저기 보이는 통나무집에 한 커플씩 배정해 드렸습니다. 아주 오붓할 겁니다.”
패러글라이딩도 좋았겠지만,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네. 완전 힐링 코스야.
“그럼 지금부터 1시간 동안 보물찾기 시작하겠습니다. 스타트!”
“우리 얼른 가 봐요.”
이지운은 환하게 웃으며 서태천의 손을 잡아끌었다. 빠르게 뛴다고 해서 보물을 찾게 되는 건 아니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맑고 선선한 공기는 도심의 그것과 수준이 달랐다. 겨울의 초입이기는 하지만 낮이라 그런지 너무 춥지도 않았고, 일단 들이마시기만 해도 상쾌해졌다.
“걸으니까 춥진 않군요.”
“저도요.”
몸 상태가 안정되었나 봐. 아까처럼 춥거나 덥지 않아.
이지운은 체온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서태천의 손을 꼭 잡았다.
중간중간 모자를 쓴 숲 해설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피톤치드의 비밀, 숲이란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 주며 길 가는 커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이지운과 서태천도 가끔씩 멈춰서 오래된 나무 이야기를 듣고, 숲의 생명력에 대한 강의에 빠져들었다.
“어, 우리 보물 찾아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이 제법 흘렀어요.”
이지운이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30분이 지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손만 잡고 돌아다녔는데 시간이 흐른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시간이 가요.”
“신기하죠?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꿈 같아요. 태천 씨랑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서 시간 보낸다는 게요.”
당연한 소리였다. 연애 초기이니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얼굴만 봐도 재미있을 때였다.
이지운이 서태천 손안에 잡힌 자기 손을 꼼지락거렸다. 깍지 낀 손마디에 힘을 꽉 줬다가 손을 빼려 했다가, 아주 깜찍한 짓을 했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속삭였다.
“손을 가만히 못 놔두는군요.”
그러면서 자기 점퍼 주머니에 이지운의 손을 쏙 집어넣었다.
“단단히 묶어 둬야겠습니다.”
“태, 태천 씨.”
“따뜻하죠?”
주머니 손에 갇힌 손은 답답한 듯 포근했다. 이지운의 귀 끝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할 짓 안 할 짓 다 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연애 초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사소한 스킨십만으로도 이지운은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다.
가슴이 너무 설레 미칠 것 같아. 누가 바늘로 찌르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가슴이 마구 부풀어.
부끄럽고 또 간지러워, 이지운이 어쩔 줄 몰라 하던 때였다.
“어, 저기!”
아주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밑동, 풀이 우거진 곳에 큼직하게 접힌 쪽지가 보였다.
“보물찾기 쪽지군요.”
“네! 저거예요!”
이지운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은 빠르게 나무 아래로 걸어가 쪽지를 주웠다. 숙려둥이 스티커로 봉인된 쪽지를 펴보니, <1등 당첨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헉. 1등이다.”
“1등이군요. 대단합니다, 지운 씨.”
상품이 허술할 것이 예상되더라도, 어쨌든 1등상을 뽑았다는 사실은 반가울 따름이었다. 이지운은 활짝 웃으며 쪽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우리 일찍 찾았으니까 도시락 먹을까요?”
“김밥요? 좋죠.”
아직 30분 가까이가 남아 있었으니 김밥과 음료수를 먹을 정도의 시간은 충분했다. 둘은 집에서 가져온 작은 피크닉 매트를 펼치고 도시락을 세팅했다. 김밥의 모양은 현대 예술 같았으나, 커피와 음료수의 외관이 멀쩡해 그럭저럭 커버가 됐다.
매트에 앉은 이지운이 서태천에게 김밥을 한 조각 건넸다.
“아, 해요.”
“사양 않고 먹겠습니다.”
참기름과 깨소금, 소금이 다 과잉 첨가되어 김밥은 네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운의 정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서태천은 성심성의껏 김밥 한 통을 다 비웠다.
“맛있어요. 김밥지옥 체인점을 차려도 되겠습니다.”
“진짜요?”
“날개 돋친 듯 팔릴 겁니다.”
“이 커피도 드셔 보세요. 아침에 제가 캡슐 머신으로 내린 거예요.”
이지운이 텀블러를 열어 서태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다행히도 정답이었다. 서태천이 가장 좋아하는, 고농도 카페인의 에스프레소 캡슐이 맞았다.
“맛있습니다. 너무 좋은데요.”
“다행이에요.”
“지운 씨는 김밥 안 먹어요?”
“아, 저는 싸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질렸어요.”
“그럼 오렌지 주스라도 마셔요.”
서태천이 주스의 뚜껑을 따 주려 했다.
“아, 아니에요. 많이 마셨어요.”
“오렌지라면 환장하지 않습니까.”
“실은 아침에 세 병이나 마시고 나왔어요. 괜찮아요.”
이지운은 한사코 김밥과 주스를 거절했다. 사실 아까부터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팠고 속도 좋지 않았다. 어젯밤의 고통과 비슷한 감각이었기 때문에 순간 화들짝 놀랐으나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몸이 말썽이네.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이지운은 배가 부른 척 연기했다.
“정말 안 먹어요?”
“네. 조금 있다가 정식으로 저녁 식사도 줄 텐데요, 뭐. 그때 먹죠.”
적당히 얼버무리며 도시락통을 덮고, 이지운은 보냉팩과 피크닉 매트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숲 입구로 오니 감독관이 돌아온 커플들을 반겨 주었다.
“여러분, 보물은 찾으셨나요?”
“네! 찾았습니다.”
이지운이 자신 있게 손을 번쩍 들었다. 이지운 외에 다른 커플들도 손을 들었다. 모두가 쪽지를 찾은 것이다.
“혹시 1등 찾으신 분 계세요?”
“저희요.”
“오, 행운의 주인공이시군요. 이리 나오세요.”
감독관의 안내에 따라 이지운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공무원 한 명이 상당히 큰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와 이지운의 품에 안겼다.
“자, 1등 상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뭔가요?”
“직접 열어 보시죠. 설명해 드릴게요.”
상자의 무게가 상당히 묵직했기 때문에 기대가 됐다. 주섬주섬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약 20cm 정도 되는 숙려둥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특징이라면 솜뭉치 재질이 아니라 외관이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마감돼 있다는 점 정도였다.
“어…? 인형인가요. 인형이라면 집에도 있는데.”
지난번에 집으로 인형 배송을 받은 적 있기 때문에, 이지운은 약간 실망했다. 하지만 감독관은 과감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감 있게 외쳤다.
“솜인형과 전혀 다릅니다. 이건 인공 지능! AI! 숙려둥이입니다.”
“예? 정말요?”
“숙려둥이야, 오늘 날씨 알려 줘, 하면 오늘의 날씨, 기온, 습도 이런 걸 찾아서 대답해 주고요. 말로 명령하면 TV나 에어컨도 켜 줍니다. 심심할 때 간단한 대화나 끝말잇기도 하실 수 있어요.”
“우와.”
참가자들이 이건 정말 괜찮은 상품이 아니냐며 감탄했다.
“그리고 가장 기가 막힌 기능이 뭔지 아세요. 여기 숙려둥이의 뺨을 눌러보십시오.”
자세히 보니 숙려둥이의 뺨에 하트 모양 버튼이 붙어 있었다. 이지운이 하트를 누르자, 사이버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 사랑해요.”
그러면서 가슴팍에 달린 LED 창에도 불이 들어왔다. 자막으로는 <여보! 사랑해요>라고 메시지가 떴다.
“하하. 놀라셨죠? 이건 성우분이 녹음해 주신 예시 메시지고요. 여러분이 직접 메시지를 녹음해서 배우자 머리맡에 놔두라고 탑재한 기능입니다.”
“이건 정말 유용하겠네요.”
이지운은 진지하게 감탄했다. 서태천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싶으면 미리 녹음해서 침대 속에 숙려둥이를 숨겨 놓아도 되고, 더욱 스릴 넘치게 행동하고 싶으면 회사에 이놈을 데려가도 좋을 것이다. 메시지를 녹음해서 태천 씨 사무실 책상에 살짝 올려놓고 싶은데. 그럼 식겁하려나?
장난기가 도진 이지운은 이 선물이 아주 맘에 들었다.
“너무 좋아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첨자분이 행복해하시니 저희 주최 측도 행복합니다. 일동 박수!”
이지운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서태천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맘에 듭니까?”
“네. 특히 ‘여보 사랑해요.’ 기능이 끝내줘요.”
그렇게 말하며 이지운은 숙려둥이의 뺨을 한 차례 눌렀다. 스피커에서 사랑한다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좋아, 언젠가는 내 입으로 직접 사랑한다고 말해 주겠어. 그럼 태천씨도 그 특유의 멋진 목소리로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 주겠지?
어라, 그런데… 음. 잠깐만.
이지운의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직 말 못 했다고 쳐도, 태천씨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네? 좋아한다고도… 해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청혼을 받았을 때 느꼈던 그 허전한 감각.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
맞아, 우리는 연애하기로 했고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뭔가 빠진 기분이었어. 그게 이거였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