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지운은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민 대리가 보낸 메시지가 가득했다.
민혜경
지운 주임님. 팀장님 왜 저래, 미쳤나 봐?
네. 단단히 미친 것 같아요.
민혜경
너무 재수 없다. 어떡하면 좋니.
“후우….”
생전 누군가를 저주해 본 적 없는 이지운이었지만, 상대가 유치하게 나오니 이지운도 일차원적인 욕이 하고 싶었다. 재수 옴 붙으라고, 개새꺄. 뒤로 자빠져서 코나 깨져라.
그런데 잠시 후, 탕비실 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아악! 하는 외마디 비명도 났다.
“뭐야?”
“송 팀장님 목소리인데.”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탕비실로 몰려갔다. 이지운도 슬쩍 일어나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탕비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대자로 바닥에 뻗은 송 팀장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또한 어디에 갖다 박은 건지는 몰라도 뾰족한 코끝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누가 바나나 껍질 바닥에 버렸어! 어?! 누구야, 잡히기만 해 봐!”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구내식당에서 제공한 직원 간식이 바나나였다. 이지운은 두 손에 바나나 껍질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송 팀장을 보며 픽, 웃었다. 개늠시키, 아주 잘 됐다.
물 없이 군고구마를 삼켜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연속 며칠 동안 이지운은 답답함을 느끼며 출근했다. 가슴 한구석이 꽉 메인 듯, 짜증과 불편함이 찾아왔지만 차마 서태천에게는 티도 내지 못하고 겉으로는 웃었다.
송 팀장은 생각보다 더 끈질긴 새끼였다. 그는 집요하고 또 유치하게 이지운을 괴롭혔다. 보고서 가지고 트집 잡기, 말꼬리 잡기, 핸드폰만 만져도 버럭버럭 소리 지르면서 딴짓하냐고 무안 주기, 팀 내 업무 분장을 무시하고 이지운에게 일 몰아주기까지.
그의 횡포는 도를 지나쳐 이제는 이지운도 슬슬 한계로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 시키, 확 회사 고충 위원회에 찔러 버릴까? 아니면 인사 징계 위원회에 신고해? 나 진짜 열 받으면 성희롱까지 엮어서 신고하는 수가 있다고. 어?!
이 모든 괴롭힘의 근본에는 거북한 플러팅과 일방적인 집착이 있었기에, 송 팀장의 행동거지는 성비위 징계 위원회에 넘겨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서태천이 일의 전말을 알게 될 것이라, 이지운은 딜레마에 빠졌다.
일단은 증거를 수집하고 있어야겠지… 하지만 태천 씨가 알게 되는 건 싫어. 그러면 얼마나 날 걱정하고, 또 괴로워하겠어. 당분간은 참으면서 팀장 새끼가 제풀에 나가떨어지길 바라야지.
이지운은 금요일인 오늘도 야근 거리를 잔뜩 떠안았다. 퇴근 1분 전 주어진 송 팀장의 업무 지시에, 이지운은 그야말로 뚜껑이 열렸다.
“팀장님. 저 월, 화, 수, 목요일 전부 열 시 퇴근했습니다.”
“그게 왜?”
“…이렇게 업무 지시를 늦게 주시면 곤란,”
“뭐야. 이지운 주임. 누가 보면 그쪽이 상사인 줄 알겠네?”
송 팀장이 턱을 추켜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지운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송 팀장의 얄쌍한 면상에 불꽃 같은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펀치 머신에서 꽤 높은 점수를 기록할 정도로, 알고 보면 이지운은 손이 매웠다.
저 면상이 펀치 머신이라고 생각하고 실컷 패주고 싶다.
오늘만큼은 정말 야근하기가 싫었다. 몸이 더 이상 따라주지 않았고, 서태천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요즈음 서태천도 상당히 바빠 귀가가 늦었고, 둘은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 침대에서 잤다가 따로 일어나 출근했다.
지금은 서태천 본인도 스케줄이 바빠 이지운의 야근이 과중하고 퇴근이 너무 늦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지운은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서태천도 이상함을 느끼고 상황에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자칫하다가는 서태천이 부장에게 팀 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캐물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송 팀장의 꼬리가 밟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이지운의 속은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시원해질 것이다. 간단하게 송 팀장을 혼내줄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일이 꼬이면 서태천과 이지운 자신이 얽혀 있다고 뒷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지운은 그게 괴롭힘보다 더 걱정됐다.
어떻게든 나 혼자 해결을 봐야지. 독종 이지운, 물러서지 마.
“팀장님. 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번 주 내내 연속 야근했습니다. 몸 상태 안 좋은 걸 떠나서 전 이미 내규상 초과 근무 시간을 넘겼습니다. 이 이상 야근하라는 건 무급으로 일하라는 지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지운이 무표정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자 팀장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무급? 지금 돈 이야기가 왜 나와!”
언성이 높아지자 사무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직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던 민혜경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지운 주임 오늘 종일 몸 안 좋아 보였어요.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요.”
그녀가 끼어들며 정색하자, 송 팀장이 움찔했다. 제3자가 보기에 자신이 과해 보이는 건가 싶어 민망하기도 했다.
“흠. 그래? 그래도 젊은 사람이 근성이 있어야지.”
송 팀장이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자, 맞은편 김 과장이 한마디 했다.
“팀장님, 이 주임 오늘 점심도 거르고 일하던데요.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팀 내 연장자인 김 과장이 나서니 송 팀장으로서도 뜨끔했다. 앙큼한 오메가 하나 길들이겠다고 팀원들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순 없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허우대 좋은 편도 아니면서.”
민 대리가 뼈 있는 말을 하자, 송 팀장은 대충 상황을 얼버무리기로 했다. 만약 이지운이 쓰러지거나 병을 얻어 산재 신청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고 분명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요.”
송 팀장은 생색을 내면서 자비로운 척했다.
“대신 다음 주에는 봐주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송 팀장이 슥 일어나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이지운은 팀장 자리의 화분을 가져다가 송 팀장의 뒤통수에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한숨을 지었다.
“민 대리님, 김 과장님.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팀장님한테 밉보이시는 거 아닌지….”
“무슨 그런 걱정을 해. 지운 주임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한마디 거들 수 있지.”
김 과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지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민 대리가 이지운의 안색을 살피다가 인상을 썼다.
“근데 지운 주임. 빈말이 아니라 병원 한번 가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식은땀도 흘리네….”
“아, 네. 오늘 좀 추워서….”
“난방이 이렇게 잘 되는데 무슨. 몸이 안 좋은 게 맞네. 주말에 병원 가 봐.”
“네. 감사합니다. 대리님, 과장님.”
이지운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6시 10분이라 이쯤 하면 칼퇴에 속했다.
태천 씨도 오늘 빨리 끝난다고 했지. 다행이다.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 먹고 놀고, 내일은 트래킹 가서 재미있게 놀면 돼.
서태천과 이지운은 이번 주 토요일, 즉 내일 재결합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로 했다. 며칠 전 숙려 센터와 통화해서 프로그램 안내문을 받아보았는데, 남은 12학점을 채울 방법은 다양했다. 부부간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커플 패러글라이딩, 동해 바다 다이빙 체험, 댄스 교실 등 여러 가지 코스가 준비돼 있었다.
처음에 이지운은 패러글라이딩을 골랐다. 한 번도 안 해 본 액티비티이기도 했고, 스릴 넘치는 상황에서 서태천과 함께 활동적으로 놀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청을 하려 전화를 건 순간, 간발의 차로 패러글라이딩 접수가 마감됐다는 이야길 들었다. 대신에 숙려 센터 직원은 숲 해설가와 함께하는 축령산 숲 트래킹을 추천해 주었다.
활발한 활동을 하려다가 정적인 트래킹으로 바뀌니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피톤치드를 마시며 힐링하는 게 지금의 자신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서태천과 이지운은 6시간짜리 트래킹 코스에 등록했다. 이로써 최종적으로 남은 시간은 6시간. 딱 한 프로그램만 더 이수하면 서태천과 이지운의 이혼 신청은 철회되고, 자연스럽게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이지운은 들떴다. 이혼을 위해 시작한 신혼 생활이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결합을 위해서 나아가는 자신과 서태천 앞에 골인 지점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지운이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려는데, 핸드폰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ㅌㅊC
미안한데 먼저 귀가해요. 회의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어? 같이 퇴근 못 하겠네.
살짝 아쉬웠지만, 어떤 의미로는 잘 됐다 싶었다. 서태천이 귀가하기 전에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 놓고 그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밥 먹지 말고 들어와요.
ㅌㅊC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천C는 내가 주방 근처에만 다가가도 식겁하지만, 나도 할 수 있어! 물론 집안일 봐주시는 분이 만든 반찬 데우고 이미 된 밥을 푸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내 손을 거치면 그게 내가 차린 밥상이지 뭐야.
이지운은 발걸음을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금요일의 러시아워라 조금 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서태천이 올 때까지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아, 이지운은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