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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73화 (73/100)

73화

송 팀장이 태클을 건 부분은 바로 보고서였다.

“자간, 장평 다 엉망이야. 그리고 맞춤법은 왜 틀렸어. 고객 인터뷰 중에 이것 좀 봐. ‘돼요.’가 뭐야. 장난쳐? ‘되요.’가 맞지.”

송 팀장이 모니터에 삿대질을 하면서 인상을 썼다.

“서식은 표준 서식 사용해서 자간, 장평 모두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돼요.’가 표준어입니다.”

이지운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송 팀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잠깐만 이 주임. 지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거야?”

“예? 대꾸가 아니라… 제가 처리한 부분에 대해 답변 드린 겁니다.”

“문서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으면 죄송하다는 말부터 나와야지, 왜 자기가 잘했다고 목소리를 높여!”

정작 목소리를 높이고 서류를 개판으로 만들려는 것은 자신이면서, 송 팀장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은 이지운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억울해도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는 것이 말단 사원. 기분이 더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이지운은 자존심을 굽히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수정해서 결재 다시 올려.”

“네.”

자리로 돌아온 이지운은 억지로 문서를 수정해 다시 기안을 올렸다. 하지만 송 팀장은 전자결재를 반려했다.

반려에 또 반려,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이지운을 골탕 먹이려는 게 뻔한 행동이었다.

“가만 보니까 이거,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겠어. 인사이트가 전혀 안 보이네. 이건 컨셉 자체가 글러 먹어서라고 봐야겠지.”

“예, 팀장님…?”

“이 주임, 내가 정확하게 지시할게. 컨셉 새로 잡아서 보고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알겠지?”

자기가 시켜 놓고 갑자기 컨셉이 후지다고 꼬투리를 잡다니. 가만히 지켜보던 민 대리도 어처구니가 없어 두 사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지운이 자리에 돌아오기 무섭게 사내 메신저로 그에게 대화를 걸었다.

민혜경

팀장님 왜 저래.

지운 주임, 뭐 잘못 보인 거라도 있어?

아뇨… 모르겠어요.

기분 안 좋으신가 봐요.

민혜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혼자서 꼬투리 잡고 난리네.

보고서 작성하다가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말해.

감사합니다. 근데 괜찮아요.

이지운은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속에서는 욕이 들끓었다.

같잖은 놈. 내가 자기 걷어찼다고 업무적으로 복수해? 찌질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살아오면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독종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이면 학업, 아르바이트면 아르바이트, 야무지게 챙기고 살아온 이지운은 이따위 유치한 수작에 좌절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탁탁! 타다닥!

키보드를 치는 이지운의 손끝에 불꽃이 튀었다. 미친 듯한 속도로 새 보고서를 작성하는 그의 눈빛에는 집중력을 넘어선 광기가 어렸다.

***

“보고서 다 됐습니다.”

오후 5시 50분. 남들이 3일 걸릴 길이의 보고서를, 이지운은 단 몇 시간 만에 해치웠다. 내용 또한 깔끔하고 참신했다.

“허. 대충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빨리해. 중요한 건 인사이트가 있느냐인데… 이렇게 형식적인 보고에 얽매여서는 안 돼.”

문서를 받아든 팀장은 속으로는 퀄리티에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이지운을 깎아내렸다.

“대충하지 않았습니다. 인사이트,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아냐, 다시 해. 전혀 다른 컨셉으로 내일 9시, 나 출근하기 전까지 완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예?”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람. 이지운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죄송합니다만 내일 아침까지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무리라니, 야근하면 되지 않나.”

송 팀장이 얄밉게 웃으며 가방과 재킷을 챙겼다. 주임한테 일 시키고 팀장인 자기는 가겠단 거였다.

“그럼 난 퇴근해 볼 테니, 이 주임은 남아서 야근하라고.”

그러면서 이지운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기분 나쁜 체온을 묻힌 뒤 사무실을 나섰다. 남겨진 이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송 팀장의 유치함에 치를 떨었다.

하… 저 새끼 뒤지게 패고 싶다. 나 오늘 태천 씨랑 저녁에 맛있는 거 만들어 먹기로 했는데. 물론 요리는 태천 씨가 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어 줄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

이지운은 착잡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입에서는 한숨이 폭폭 나왔다.

죄송한데 저 오늘 퇴근 늦어질 것 같아요.

ㅌㅊC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보고서 만들어야 해서요.

ㅌㅊC

지금 결정된 겁니까?

이 시간에 누가 업무지시를 하죠.

아니에요. 그냥 일이 조금 밀린 것뿐이에요.

빨리 처리하고 집으로 갈게요. 먼저 퇴근하세요.

혹여라도 송 팀장과 있었던 일을 알면 서태천이 신경 쓸까 봐, 이지운은 최대한 일련의 사건들을 은폐하고 싶었다.

에라이, 태천C랑 저녁 시간 못 보내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깟 서류 한 번에 끝내고 만다.

이지운은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부술 듯이 쾅쾅 내리치면서 새로운 보고서를 썼다. 키보드가 팀장의 면상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감정을 담아 폭행하듯이 치게 됐다.

콱, 재수 없는 새끼. 남 배고프게 만들고 말이야.

배에서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지운은 다른 건 몰라도 배고픈 건 참지 못했기에, 팀장을 깊이 저주하며 빠르게 일을 끝냈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세상에, 무려 밤 10시였다.

“아… 너무 배고파.”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태천 씨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할 거야. 흑흑.

이지운은 빠르게 보고서를 뽑아 팀장의 책상에 쾅! 소리가 나도록 패대기를 친 다음 쿨하게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동네에 도착하니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지운은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많이 늦었군요.”

소파에 앉아 있던 서태천이 일어나 현관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이지운의 코트와 서류 가방을 받아 준 그가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도 안 먹고 일했죠? 이리 와요. 식사 준비해 뒀습니다.”

“진짜요?”

이 순간 가장 간절했던 것, 서태천과 식사가 이지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지운은 기분이 좋아져 씩 웃었다.

“같이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태천이 싱긋 웃으며 이지운을 식탁으로 이끌었다. 식지 말라고 은은하게 워밍 캔들까지 켜 놓은 식탁 위에 단호박 갈비찜을 비롯해 온갖 맛있는 요리가 놓여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어서 들죠.”

서태천이 이지운을 앉히고 고봉밥을 담은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한입 떠먹으니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 팀장 그 조무래기가 활개를 쳐 봤자 타격 없어. 나한테는 이렇게 자상하고 완벽한 남편이 있는걸. 팀장 그 새끼, 딱 보아하니 다혈질 같던데 가만두면 제풀에 나가떨어질 거야. 힘내서 잘 버티자.

이지운은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양껏 밥을 먹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나가떨어지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송 팀장은 이지운 못지않은 독종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송 팀장은 출근하자마자 이지운을 찾았다.

“이 주임.”

“네. 팀장님.”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야. 하란 대로 했잖아.

이지운은 속으로 툴툴대며 송 팀장 옆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송 팀장이 이지운을 고깝게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어제 팀장님이 새로 보고서 만들라고 하셔서 작성한 건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응?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예?”

너무 어이가 없으면 길게 말이 안 나오는구나.

이지운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수정하랬지 새로 만들랬나?”

“저, 팀장님.”

어제저녁에 이 서류 만들어 놓으라고 해 놓고는 이제 와서 이게 아니었다고?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육두문자가 입술 바로 직전까지 올라왔다. 혈압이 마구 올라가 순간적으로 고혈압 환자가 되었지만, 이지운은 어금니를 꾹 깨물고 참았다. 일단 참자. 침착해. 논리적으로 사실관계만 따지도록 하자.

이지운은 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다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뇨, 어제 분명히 팀장님께서 새 컨셉으로 보고서 작성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수행한 겁니다. 수정이 아니라 신규라고 하셨습니다.”

“이지운 주임, 그렇게 안 봤는데 말귀가 어두운가 봐요? 난 분명히 손만 좀 보라고 지시했는데.”

송 팀장이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이죽거렸다. 이지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가식적으로 웃었지만, 등 뒤로는 세 번째 손가락을 폈다.

엿이나 까 잡숴, 망할 놈아.

한편 이지운은 생각했다. 송 팀장은 정말 지긋지긋한 인간이고, 막말로 녹음 파일 같은 물증이라도 들이대지 않는 한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말이 길어져 봤자 피곤하기만 하단 뜻이었다.

이지운은 고심 끝에 대화를 종료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 이 주임이 귀가 어두워. 하하!”

이지운이 한발 물러나자, 송 팀장은 신이 난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사무실 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분명 어제 들은 게 있는데, 날조를 하네. 혹시 송 팀장은 미친 인간 아닐까? 조심해야겠다. 다들 그런 표정으로 송 팀장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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