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서태천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멀리서 봐도 튀는 악마 뿔 머리띠를 쓰고 번쩍번쩍 빛나는 후광을 등 뒤에 매달고 있었다.
아! 눈부셔라, 내 남편.
이지운은 오버액션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태천C 너무 멋있다. 아까 송 팀장한테서 묻어난 찐득한 기름기가 싹 빠지고 산뜻해지는 기분이네. 하, 좋아.
이지운은 서태천을 보고 혼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서태천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다들 퍼레이드 악단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있어서, 이지운의 움직임 따위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때 서태천이 시선을 돌려 이지운을 발견했다. 그가 싱긋 웃더니, 사람들이 몰리지 않은 인파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서태천과 눈빛을 주고받은 이지운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에게 다가갔다. 한 일 미터쯤 떨어져 있었을까, 둥둥 북소리와 요란한 나팔 소리가 들리며 멀리서 악단이 나타났다. 드디어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
“와!”
“사진 찍자, 사진!”
“난 동영상 찍을래.”
모여든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화려한 차림을 하고 칼 박자를 맞춰 북을 두드리는 악단이 등장한 가운데, 그 뒤로는 렛츠월드의 마스코트인 거대 오소리 인형이 마차에 실려 나왔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자동 장치가 되어 있는지, 오소리 인형은 좌우를 번갈아 살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내밀었다.
사람들의 정신이 쏙 빠진 그 틈을 노려, 이지운은 슬쩍 서태천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을 잡았다.
헉. 손 잡았어.
이지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아, 이지운은 일부러 오소리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단단하고 큰 손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손마디끼리 부딪치면서 황홀한 감각이 아찔하게 피어올랐다. 가슴은 두근두근, 주인 말을 듣지 않으며 제어되지 않는 속도로 뛰었다.
“불꽃이다!”
피융! 소리와 함께 밤하늘로 불꽃이 날아올랐다. 곧이어 무지개색 불꽃이 차례로 팡팡 터지며 밤하늘에 찬란하게 수를 놓았다. 어떤 것은 잘고 화려하게 반짝였고, 어떤 것은 큼직한 빛의 궤적을 그리며 잔상을 남겼다.
이지운은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담컨대 이제껏 삶을 살아오면서 본 풍경 중,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단순히 불꽃이 밤하늘 별처럼 빛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곁에 서서 단단한 손을 내어 주고 있는 사람. 함께 아름다운 불꽃을 보고 있는, 서태천 때문이었다.
이지운은 조용히 웃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마주잡은 손이 너무나 따뜻했다.
***
꿈 같은 금요일 밤이 지나고, 이지운과 서태천은 주말 내리 집에서 놀았다.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고, 영화를 보다가 졸리면 서로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잤다. 그러다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열기가 올라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서로의 몸을 만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낮부터 그렇고 그런 짓을 벌였다가 또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해피 홀리데이구나.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하고, 야릇함까지 다 챙겨 가는 주말이 또 어디 있을까.
이지운은 진심으로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월요일을 맞이하기 싫었다. 한 회사에 같이 출근할 수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사표라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서태천과 보내는 시간이 애틋하고 소중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월요일 아침, 이지운은 밝은 낯으로 출근해 팀원들에게 인사했다.
“지운 주임 안녕.”
“이 주임, 좋은 아침.”
팀원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받아 준 것과 달리, 송 팀장은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이지운을 쳐다보았다.
으음… 이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의 무게란.
금요일 밤 놀이공원에서 느닷없는 고백을 받고, 아니 일방적인 구애의 몸짓을 받고 송 팀장을 걷어찬 일이 떠올라 이지운은 입맛이 껄끄러웠다. 혹시라도 귀찮은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팀장님, 안녕하세요.”
그래도 회사 생활은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 이지운은 재차 팀장에게 인사했고 송 팀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운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송 팀장이 현재 설정한 자신의 컨셉은 밀당 중에 ‘밀’이었다. 송 팀장은 속으로 이 요망한 오메가야, 내가 쌀쌀맞게 구니 심란하지는 않으냐? 이번 기회에 나한테 마구 흔들려 봐라. 하고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주섬주섬 PC를 켜고 업무망에 접속하고 있는데, 지잉 하고 이지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번 방문한 숙려 센터에서 온 문자였다.
이혼 철회 신청자 대상 안내 - 재결합 프로그램 안내차 센터 방문 요청 드립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꼭 센터 방문해 주세요.
아, 맞다. 캠핑 다녀온 걸로 끝이 아니었지. 나머지 시간도 꽉꽉 채워서 20시간 이수해야 하는데…!
지난번 서태천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한 차례 재결합 커플들을 위한 캠핑을 다녀왔다. 그 프로그램으로 8시간 학점이 인정되었고, 앞으로 남은 게 12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20시간을 채워야만 진정성 있는 재결합으로 인정받고 서태천과 이지운은 진짜 부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음… 근데 이번 주는 태천 씨도 나도 바빠서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 다음 주는 태천 씨 출장이 있고, 그다음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뵈러 가기로 했으니까… 어라? 시간이 너무 없어. 평일에 연차 쓰기는 태천 씨는 어려울 거고 나도 뭐, 팀장 눈치가 보여서 당분간 연차 사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지운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사무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휴게실에 들어가 안을 살펴보니 다행히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숙려 센터 전화번호를 누르고 연결을 시도하자, 얼마 안 가 센터 상담원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문자 받고 연락 드리는데요. 네네. 이지운이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이지운은 알지 못했다. 송 팀장이 방금 문을 빼꼼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이지운의 통화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송 팀장은 아침나절부터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이지운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던 참이었다. 대체 뭐길래 망설이다가 휴게실까지 들어가서 통화를 할까? 궁금했는데, 이지운은 자신이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통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게, 당분간 저랑 남편이랑 둘 다 바빠서 방문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안내서랑 신청서는 이메일로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사인 때문에 우편 수령만 된다고요?”
뭐? 남편?
이지운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송 팀장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니, 이지운이 내뱉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러면 저희 신혼집으로 보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거기 등록된 주소로요. 네.”
이지운은 남편, 신혼집이라는 말이 술술 나오는 스스로가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남편이라, 남편. 맞아. 서태천은 내 남편이다…! 우린 신혼집에 살고 있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어깨를 으쓱으쓱한 다음 그는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 팀장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헉.”
“왜 놀라요? 귀신 보고 놀란 사람처럼 구네.”
“아, 아니요. 그냥….”
팀장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이지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지운은 괜히 찔렸다.
설마 내 통화 소리가 휴게실 문밖까지 들린 건 아니겠지?
걱정이 되고 불안해서 이지운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송 팀장은 이지운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이지운을 빈정대느라 바빴다.
분명 남편이랑 신혼집에 살고 있다고 했지. 하하. 이미 결혼을 하셨어? 연애도 싫고, 확신의 독신주의라더니 남들 몰래 결혼을 했다고. 이런 앙큼한 오메가를 보았나…!
송 팀장은 마치 이지운과 사귀다가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 분노했다.
“휴게실에 죽치고 있지 말고 와서 일하라고 찾아왔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송 팀장이 이지운을 흘겨보고 먼저 자리로 돌아갔다. 이지운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설마 제 통화를 엿들었겠냐 싶으면서도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지운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침에는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받아 줬던 송 팀장은 휴게실에서의 마주침 이후로 냉랭하다 못해 재수 밥 말아 먹은 인간으로 돌변했다.
“이 주임. 이거 보고서 이따위로 쓸 거야?”
“예?”
조용했던 사무실에 느닷없이 송 팀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지운은 즉시 일어나 팀장 자리로 향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일단 가서 대응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