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서태천이 먼저 귀신의 집에서 나갔다. 이지운은 1분 정도 텀을 두고 천천히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ㅌㅊC
이따가 야간 퍼레이드 볼 거죠?
네. 당연히 봐야죠.
ㅌㅊC
그럼 구석진 곳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좋아요. 제가 찾아갈게요.
메시지를 보내는 이지운의 입꼬리가 초승달 같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비록 당당하게 손을 잡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태천과 함께 퍼레이드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또 남들 몰래 연애하는 스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느낄까 싶기도 했고.
이지운이 다시 동기들 무리를 찾아 나서려는 때였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이지운의 등 뒤쪽에서 다 쉬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주임. 잠깐만.”
헉, 뭐야. 누구야?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걸레짝이 된 옷을 입은 송 팀장이 다리를 휘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온갖 귀신과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고 굴렀는지,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찾았다.”
찾았다는 무슨 놈의 찾았다야. 아… 도저히 못 봐 주겠네. 도깨비 머리띠에 뿔은 왜 부서진 건데.
우스꽝스럽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한 송 팀장의 꼬락서니에, 이지운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한 건지, 송 팀장은 화색을 띠었다. 자기를 보고 웃어 준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이 주임. 익스큐즈 미.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요.”
“네? 저랑요?”
“지운 주임, 아니 지운 씨를 찾아 헤매느라 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운 씨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마구 달렸어요. 이 길 끝에는 지운 씨가 있겠거니, 애절한 마음으로요.”
“예, 뭐….”
나 빨리 가서 동기들하고 놀아야 하는데 왜 날 붙들고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지? 이 분위기 뭔데. 불편하다.
심상치 않은 공기에, 이지운은 싸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거 언젠가 기 대리에게서 느꼈던 그 눈빛인데…?
고백 직전의 위험천만한 기운을 감지한 이지운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 하나. 왜 그런 줄 알아요?”
“예…? 문제…요?”
갑자기 퀴즈쇼가 되어가는 분위기에 이지운이 진땀을 흘렸다. 송 팀장은 엉망이 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더니, 그윽하게 읊조렸다.
“지운 씨란 오메가, 내 맘에 들어서 그렇습니다.”
“예?! 무슨 소리예요.”
공공장소라는 것도 잊고, 이지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무 놀란 와중에도 송 팀장과 이따위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쪽팔렸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목격자가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는 렛츠월드 아르바이트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몇 안 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하나같이 허공을 쳐다보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해 주고 있었다. 이지운은 그게 참 고마웠다.
“저기, 죄송한데요… 팀장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 궁금해요.”
“갑자기라뇨. 지금까지 나랑 실컷 썸 타 놓고는.”
“썸?! 제가 언제요?!”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합쳐져 이지운의 혈압이 급상승했다.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올랐다.
“어라. 내가 보내는 시그널, 다 받아 줬으면서 갑자기 왜 튕기고 그래요.”
“시그너얼? 튕기다니요. 저 그런 적 없습니다. 팀장님 말씀 굉장히 당황스러운데요.”
이지운은 서태천과 맺어지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신의 취향은 지극히 담백한 쪽이었다. 연애를 할 기회가 없어서 깨닫지 못했을 뿐, 담담하고 정중한 스타일을 좋아했던 것이다.
즉, 송 팀장처럼 저돌적인 척 은근히 남의 감정을 무시하고 들이대기만 하는 남자는 이지운의 취향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허, 이것 봐라. 그럼 나를 차겠다는 겁니까? 설마 이 송호종이를요?”
자의식 과잉이 심한 송 팀장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네깟 게 나를 차? 웬만한 알파보다 더 잘나고 잘생긴 천하의 송호종을?
이지운은 맘 같아서는 썩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문제는 송 팀장이 자신의 직속 상사라는 점이었다. 확실하게 거절하는 것도 좋았지만 딱 보아하니 구질구질 매달리면서 질척일 스타일 같았으므로, 요령 있게 걷어차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거절해야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괴롭지 않을까… 계속 한 팀에서 얼굴 보고 지내야 하는 사이잖아.
이지운이 말없이 고민에 빠진 표정을 보고, 송 팀장은 또 제멋대로 해석에 들어갔다.
“아아. 알겠습니다. 내가 더 강하게 어필해 주길 바라고 있군요.”
“네?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요?”
“방금 눈빛으로 말했잖아요. 호종 씨, 나 도도한 오메가예요. 확실하게 다가와서 날 사로잡아 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미,”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갈 뻔했다.
“순진하게만 봤는데… 이렇게까지 밀당의 고수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된 거, 연애는 생략하고 화끈하게 결혼으로 넘어가야겠네요.”
“예? 결… 뭐요?”
귀가 잘못된 걸까. 송 팀장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단어가 들려오길래 이지운은 귀를 후볐다.
“지운 씨만 괜찮다면 저는 당장 식을 올려도 좋습니다. 아니면 혼인 신고부터 하든지요.”
“허,”
개소리가 아주 왈왈이구나. 이지운은 더 이상의 헛소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이 미친 인간을 확실하게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머리가 굴러갔다. 생각건대 애인이 있다고 하는 건 송 팀장을 오히려 자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멋대로 경쟁심을 불태우며 그 사람을 버리고 자기한테 오라고 생쇼를 벌일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만약에 이지운의 연애 상대가 사내에 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송 팀장은 그게 누구인지 이 잡듯 뒤지고 다닐 위인처럼 보였다. 그에게서는 집요하고 음침한 냄새가 풍겼다.
음… 칼같이 잘라내면서도 심플하게 가야겠다.
이지운은 연애 중이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칫하다가 본인뿐 아니라 서태천에게 악영향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귀찮아지려면 자기 혼자 귀찮아야지 바쁜 서태천마저 골치 아픈 인간 때문에 성가시게 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제가 말 안 했던가요? 팀장님, 저 독신주의자입니다.”
“뭐? 독신주의자라고?”
“저는 아무랑도 사귀지 않아요. 결혼은커녕 연애도 안 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지운은 한 걸음 다가오려는 송 팀장을 두 손을 펼쳐 막아낸 다음, 뒤돌아 후다닥 달려갔다. 빛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이지운의 뒷모습을 보며 송 팀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건방진 오메가. 감히 나를 차…? 살살 눈웃음치면서 꼬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독신주의자라고…?”
송 팀장은 차였다는 비참함이나 슬픔보다 분노를 느꼈다. 그러면서 비뚤어진 승부욕에 자기 혼자 불타올랐다.
그래. 너 대단한 부잣집 고명 오메가라 이거지. 한 방에 쉽게 넘어오는 오메가 아니라 이거야. 하지만 내가 자빠뜨리지 못한 오메가는 지금껏 없었어. 이지운, 두고 봐라. 어떻게든 내 매력에 굴복하게 만들 테니까.
송 팀장은 누더기 꼴이 되어서는, 자기 혼자 씩씩댔다.
한편 잽싸게 도망친 이지운은 동기들과 무사히 합류했다. 땀을 흠뻑 흘리며 뛰어온 이지운을 보며 동기들은 대체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다.
“지운아. 너 왜 이렇게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녀?”
“그니까. 롤러코스터 타자니까 갑자기 사라지고, 뭐야.”
동기들이 그에게 핀잔을 줬다. 이지운은 머쓱하게 웃으며 동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속을 한번 뒤집어준 다음, 분노의 범퍼카를 타니 밤 깊은 시간이 되었다.
“좀 있다가 열 시부터 야간 퍼레이드 한대. 우리랑 같이 볼 거지?”
동기 강희주가 이지운에게 물었다. 이지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열었다. 서태천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ㅌㅊC
곧 퍼레이드네요. 저는 구름다리 시작점에 있습니다.
임원진들은 멀찍이 떼어 놓고 왔으니 걱정 마요.
“애들아, 나… 나 급한 일이 생겨서. 어디 좀 다녀올게!”
“어? 지금 갑자기?”
“너희끼리 재밌게 봐! 미안!”
이지운은 발에 날개라도 단 것처럼 빠르게 달려 구름다리를 찾아갔다. 놀이공원의 중앙부, 널따란 호수 위에 그림처럼 놓인 구름다리가 보였다.
[잠시 후 10시부터 심야 퍼레이드, 밤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퍼레이드 악단이 구름다리 위를 지나갈 예정이니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장내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구름다리 위가 명당이긴 한지, 사람들은 벌써부터 몰려들어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었다. 오늘 이 놀이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세화 호텔 그룹의 직원과 그 가족들이었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린 자녀를 목말 태우고 환하게 웃으며 악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어. 사람들 많으니까 나랑 태천C가 나란히 있어도 남들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이지운은 구경을 하는 척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서태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