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거라도 사야 돼.”
임원들은 아웅다웅 경쟁을 벌이며 예쁘지도 않은 머리띠를 사서 썼다.
한편,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던 직원들은 서태천이 악마 뿔 머리띠를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 여직원들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잘 어울린다는 둥, 은근히 귀엽고 섹시하다는 둥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렇게 하다 보니 본부장, 임원부터 일반 직원까지 머리띠를 쓰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머리띠 행렬에 합류하지 않은 직원을 찾아보면 송 팀장 정도였다. 그는 오늘 머리에 한껏 힘을 주고 왔기 때문에 스타일이 망가지는 것이 염려되어 머리띠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직속 부장이며 타 팀 팀장들, 하다못해 본부장까지 머리띠를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자 갈등이 일었다.
흠. 나만 트렌드를 안 따를 순 없지. 그럼 나도 뭐라도 사서 써 보자.
뭘 쓰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의 눈에 천사 머리띠를 하고 돌아다니는 이지운이 발견되었다.
오, 저건데? 천사의 짝꿍 하면 악마지. 커플 머리띠를 하고 다가가서 같이 다니자고 해야겠어. 셀카도 한 장 찍자고 해 보자고. 흐흐.
송 팀장은 불순한 마음을 먹고 기념품 숍으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악마 머리띠는 품절이에요.”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송 팀장은 좌절했다.
“뭐? 정말이에요?”
“네. 그건 처음부터 딱 하나만 남아 있던 거라서요.”
“하… 어쩔 수 없지. 그럼 비슷한 거라도 보여 주십시오.”
“딱히 비슷한 건 없어요. 여기 있는 게 전부니까 둘러보세요.”
이런 젠장. 천사나 악마 관련한 건 하나도 없네.
송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도깨비 뿔 머리띠를 발견했다. 한가운데 삐죽 뿔이 솟아 있는 모양새가 그닥 귀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악마 뿔과 비슷하지 않나, 그는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했다.
“저기, 이걸로 할게요.”
***
이지운은 동기들과 바이킹 가장 끝 좌석에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소리를 지르면서 스릴을 즐기니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동기들과 웃고 떠들고, 중간중간 솜사탕을 사 먹으며 돌아다니면서 퍼레이드를 즐기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음… 잠깐 태천 씨를 만나야겠어. 몇 시간 떨어져 있었더니 보고 싶다.
이지운은 그새를 못 참고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쳤다.
혹시 어느 쪽에 계세요? 저 귀신의 집 근처예요.
그러자 얼마 안 가 답변이 왔다.
ㅌㅊC
저도 거기 근처입니다. 같이 들어갈까요?
어두우니까 사람들이 우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데요.
어! 좋아요. 시간 차 두고 들어가면 아무도 의심 안 할 것 같아요.
ㅌㅊC
얼른 가겠습니다.
오, 신난다. 태천 씨랑 같이 귀신의 집이라니 너무 재밌겠어. 난 귀신 따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겁먹은 척하면서 은근슬쩍 안겨 봐야지. 그럼 태천 씨가 날 부축해 주지 않을까?
이지운은 신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귀신의 집 옆에 있는 푸드코트로 들어갔다. 하도 소리를 질러서인지 목이 깔깔하니 아팠다. 잠시 목을 축일 만한 음료수가 뭐 있나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주임!”
“아… 팀…장님.”
“하하. 여기 있었네!”
한껏 멋을 낸 머리에 도깨비 뿔 머리띠를 올리니 모습이 좀 이상했다. 절로 정색이 나왔지만, 이지운은 송 팀장 역시 분위기에 맞춰 머리띠를 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웃어 주었다.
“내 머리띠 어때요? 지운 씨 머리띠랑 맞춰 봤습니다.”
“네?”
“천사와 도깨비는 누가 뭐래도 한 쌍이잖아요.”
뭔 개소리야. 어느 누가 천사와 도깨비를 엮어? 난 우리 태천 씨랑 맞춘 거라고…!
순간 열이 받았으나, 이지운도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표정 관리가 어느 정도 됐다.
“아… 멋있네요.”
“그렇죠, 역시? 그런 의미로 제가 음료수 한 잔 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지운이 칼같이 말을 잘랐다. 어차피 입장 팔찌가 있는 사람은 무료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에이, 내가 살게요.”
“팔찌 제시하고 마시면 돼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엔 마음만 받고, 다음엔 식사랑 커피도 받으면 어때요.”
말도 안 되는 논리 점프에 이지운은 기가 질렸다. 송 팀장은 저 스스로 미끼를 잘 던졌다고 자화자찬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때였다. 이지운의 주머니 속에서 메시지 수신 진동이 울렸다. 이지운은 퍼뜩 놀라 핸드폰을 열었다.
ㅌㅊC
귀신의 집 들어왔는데 어디입니까?
앗, 태천 씨가 먼저 들어가 버렸구나. 이 인간하고 쓸데없이 시간 보낼 때가 아니었어…!
“저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이지운은 송 팀장을 내버려 두고 푸드코트를 빠져나갔다. 귀신의 집이 바로 앞이라, 입구를 지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팔찌를 보여 주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운 주임! 나 놔두고 어디 가요!”
송 팀장도 이지운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지운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니, 팀장님은 왜 따라오는 거야? 나랑 태천 씨랑 시간 보내야 하는데 방해되는 건 아니겠지.
송 팀장을 따돌리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지운은 서태천이 어디 있을까 신경 쓰며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명이 완전히 꺼져 있었기에, 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핸드폰 조명을 최소 밝기로 만든 다음, 이지운은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태천 씨, 저 들어왔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ㅌㅊC
맨처음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한번 꺾으면 나오는 드라큘라 앞에 있습니다.
오케이. 그리로 갈게요.
그런데 그 순간, 뒤쪽에서 기름진 목소리가 들렸다.
“지운 주임. 거기 있죠?”
송 팀장이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것이다.
아, 안 되겠네. 저 인간부터 따돌리고 태천 씨한테 가야겠어.
이지운은 빠르게 머리를 굴린 다음 성큼성큼 직진했다. 일부러 발소리는 크게 냈다.
“지운 주임 거기 있구나. 하하, 기다려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놀고 있네.
이지운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앞으로 쭉 나아갔다. 중간중간 잘 따라오고 있냐고 송 팀장에게 묻기도 했다.
그렇게 앞으로 쭉쭉 직진하다가, 이지운은 한순간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숨소리마저 참고 기다리니 송 팀장이 헐레벌떡 앞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휴, 따돌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되돌아가야 한다는 거네….
이지운은 더듬거리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중간중간 늑대인간, 저승사자, 각종 외국 귀신들이 튀어나오며 사람을 놀라게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이지운은 웬만큼 담력이 있는 편이었기에, 비명을 지르지 않고 다시 입구 쪽으로 거슬러 갈 수 있었다.
태천 씨가 기다리고 있어. 얼른 가야지. 이깟 귀신이 문제가 아니다.
이지운은 조금 더 속도를 붙여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누군가랑 턱, 하고 부딪쳤다.
헉. 뭐지? 귀신인가?
그런데 익숙한 체향이 훅 코끝을 간지럽혔다.
“태천 씨…!”
어둠 속이었지만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서태천이었다.
“헤맸습니까?”
“아뇨, 잠깐 뭐 좀 하고 오느라… 미안해요. 너무 늦었죠.”
둘은 소곤거리면서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니까 참 좋군요.”
“저도요. 너무 좋아요.”
주변은 어두웠으나 이지운의 웃음은 환하게 빛났다.
“저쪽 구석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더군요. 거기로 갈까요?”
“네. 좋아요.”
이지운은 서태천의 단단한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이동했다. 이따금 저 멀리서 송 팀장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우당탕 발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그런데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예요?”
이지운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서태천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이지운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자신을 감싸자, 이지운의 촉각과 후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으니 평상시의 키스와 느낌이 또 달랐다. 똑같은 키스일 텐데 유난히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고, 가슴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태천 씨….”
잠시 입술이 떨어지나 싶다가, 둘은 다시 불같이 입을 맞췄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등과 허리를 빈틈없이 감쌌다. 이지운은 눈을 감고 서태천의 입술을 낱낱이 느꼈다.
“다음엔 둘만 올까요.”
긴 시간이 지나고 입술을 뗀 서태천이 말했다.
“둘만요?”
“네. 우리 둘만.”
“그렇게 해요.”
이지운이 쿡쿡 웃으며 서태천의 뺨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귀신의 집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다니, 난생처음 제대로 즐겨 본 놀이공원은 정말 좋은 곳이었다. 아니, 좋은 건 사내 연애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비밀스럽게 만나서 잠깐의 키스를 나누고 시간 차를 두고 각자 길을 떠나는 이 행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