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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67화 (67/100)

67화

“그럼 손수건이 지운 씨를 여기로 데려온 걸까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취업난이 너무 심각해서, 손수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무조건 먼저 붙은 곳이 생기면 그리로 갔을걸요.”

“흠. 그랬군요.”

“그런데 그 사건이 있고 나니까 꼭 세화 호텔 그룹에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일하는 곳이라면, 나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서태천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이지운을 부드럽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저 이번에 성남 호텔 가는 거, 찬성이에요. 어차피 그 직원 얼굴이나 이름도 기억 못 하지만. 고개 숙이고 엉엉 우느라 정작 얼굴도 제대로 못 봤거든요.”

“…아마 잘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이지운이 씩 웃었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커피 가져다줄까요?”

“네! 좋아요.”

타고난 재능인지 서태천은 커피마저 잘 내렸다. 그가 모카 포트로 끓여내는 커피는 아침잠을 깨워 줄뿐더러 하루를 너무도 행복하게 시작하게 만들었다.

“기다려요.”

두 사람의 주방에는 햇살이 내리쬐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그윽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 어느덧 이지운은 지난밤의 수상한 꿈을 다 잊어버렸다.

***

서태천보다 빨리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탔더니, 이지운은 평소보다 이르게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팀장 외에 다른 직원들이 나와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굿뫄닝, 지운 주임.”

“안녕하십니까.”

“으흠. 그래요.”

굿모닝도 아니고 굿뫄닝이 뭐야. 발음 너무 굴렸는데?

어제저녁의 일로 팀장에게 날이 서 있는 상태라, 이지운은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일부러 달력에 시선을 주면서 송 팀장의 끈적한 눈길을 피했다. 어느덧 오늘은 목요일. 바로 내일이 렛츠월드 야간 개장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이거 생각하면서 견디자. 비록 단둘이는 아니지만 태천C랑 놀이공원 가는 날이잖아. 생각만 해도 너무 재밌다.

이지운이 혼자 기합을 넣으면서 버티고 있는데, 마침 민 대리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와요, 민 대리.”

“팀장님, 지운 주임. 안녕하세요.”

민 대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을 만졌다. 이윽고 그녀가 한 동영상을 찾아 이지운에게 들이밀었다.

“이것 좀 봐. 요새 렛츠월드에서 하는 야간 불꽃놀이래요.”

동영상은 렛츠월드에서 홍보 차원으로 올린 것으로, 밤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불꽃놀이 영상이 잘 편집되어 있었다.

“진짜 멋있네요.”

“우리도 내일 밤이면 볼 수 있어. 너무 신나지 않아요?”

민 대리는 들뜬 티를 한껏 내며 계속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다가 숙려둥이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뜬 것은, 일순간이었다.

“어? 광고 나온다. 이렇게 꼭 맥을 끊는다니까. 아휴, 광고 30초 봐야 동영상 계속 볼 수 있어.”

민 대리가 투덜댔다. 이지운은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겪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숙려둥이야,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니!

[한, 한, 한 번 더! 숙, 숙, 숙려해 보세요. 우리 여보! 자기 당신! 너무 많이 사랑해요.]

촌스러운 로고 송이 흘러나오며 쑥색 대가리에 2등신 몸뚱어리를 지닌 숙려둥이가 춤을 췄다. 양옆으로는 알파와 오메가로 보이는 자들이 함께 손뼉을 치며 유치한 율동을 선보이고 있었다.

“근데 이 광고 뭐지…? 가족건강부 공익 캠페인이라고 쓰여 있는데. 형질자 이혼 숙려 제도… 이혼 전 6개월간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 보세요? 이게 뭐야.”

민 대리가 광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지운은 속이 찔렸다. 괜히 옆자리 동료가 숙려 제도를 알아서 좋을 것 없다 싶어, 그는 화제를 돌리려 했다.

“광고 스킵 안 되나요? 아, 그나저나 놀이공원 빨리 가고 싶다. 저 높은 데서 떨어지는 종류는 다 좋아하거든요. 바이킹도 꼭 타야 하고요! 대리님은 놀이기구 뭐 좋아하세요?”

은근슬쩍 민 대리의 집중을 흐트러뜨리려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았다. 민 대리는 어느새 광고 화면을 유심히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잠깐만. 이 쑥색 마스코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네?”

“낯이 익어. 이 광고 난 오늘 처음 보는데, 흠. 이혼 숙려 제도 마스코트를 내가 볼 일이 뭐 있을까.”

지금 민 대리는 숙려둥이를 알아본 것이다. 이지운은 지난날 두 차례나 숙려둥이 볼펜을 사용했고, 그때마다 민 대리가 볼펜을 탐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녀가 바로 자신과 이혼을 연결 지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식은땀이 흘렀다.

“고, 공공기관 캐릭터가 거기서 거기죠. 머리 크고 둥글둥글 색깔은 촌스럽고. 하하.”

“아! 생각났어. 볼펜!”

으악. 드디어 생각해 냈구나.

이지운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으나, 평온한 척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며 볼펜은 적당히 어디서 얻어서 기억도 안 난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지운 주임 볼펜에 달린 대가리가 얘잖아.”

“아… 그런가요?”

“어디서 얻었어? 시중에서 파는 게 아닐 텐데.”

“그, 그래요…? 그냥 어디 굴러다니던 거 주운 거라서 잘 모르겠어요. 집에 있, 아니야. 길에서 주웠지. 강남역 앞에서? 압구정역 앞에서? 하하. 아니네, 친구가 줬었… 그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 혼신의 연기를 펼쳤으나, 애석하게도 이지운은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손은 오갈 데가 없어 허공을 맴돌았다. 말도 꼬이고 발음도 불분명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민 대리는 기분이 싸해졌다. 이지운은 지금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한테 얻거나 주웠다고 말은 하는데 왜 저렇게 당황스러워하는 거지. 그깟 볼펜이 뭐라고? 이 주임은 미혼이잖아. 이혼 숙려 제도랑 관련이 없을 텐데. 그리고 내가 짐작하기로는 지금 본부장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로 잘 발전하고 있는 것 같던데…?

“주웠지. 주웠어.”

“친구가 줬다며.”

“아! 맞아요. 친구…!”

더 이상 이지운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없어, 민 대리는 적당히 대화를 접고 불꽃놀이 영상을 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지운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가 되자 사내 인트라넷 공지가 떴다.

렛츠월드 방문 시 직원용 신분증 혹은 명함 제시 필수 - 가족 혹은 친구, 지인과 동반 입장 가능합니다.

“와! 너무 좋다.”

“신난다. 빨리 놀고 싶어.”

“에이, 그냥 이용권 뿌리지. 내 남자친구 누군지 회사 사람들이 다 알게 되잖아. 싫어.”

“그래도 꽁으로 하루 노는 게 어디야. 난 좋아.”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직원들 사이에서 이지운은 조용히 핸드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밥 너무 맛있었어요♥

ㅌㅊC

내일도 해 줄게요.

으악, 너무 좋아! 게다가 내일은 놀이공원 놀러 가는 날이 아닌가. 나 이렇게 행복해도 돼?

이지운은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콧노래를 꾹꾹 눌러 참으며 내일 입을 옷을 고민했다.

요새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으니 외투는 입어야겠지. 그렇지만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생각을 하면 가볍게 입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태천 씨가 지난번에 사 준 후드티 입을까?

아, 잠깐만. 명색이 놀이공원 데이트인데 커플 아이템을 하면 어떨까?

이지운의 생각이 엉뚱한 데 미쳤다. 내일은 서태천도 놀이공원에 오는 날. 아무리 본부장이라고 해도 설마 정장을 입고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비밀 커플템을 하나씩 가지고 놀이공원에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 모자?

아니야. 태천 씨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모자나 운동화는 안 어울리고… 으음… 이 나이 먹고 처음 연애에 첫 놀이공원 데이트 가려니 머리가 아프네.

이지운은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SNS에 들어가 렛츠월드로 검색한 후 나오는 이미지들을 보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기린, 토끼, 강아지, 고양이… 아주 종류도 다양했다.

바로 이거다! 커플 머리띠를 하는 거야.

이지운은 영감을 받은 작곡가처럼 전율했다.

세트로 맞춰서 우연인 것처럼 쓰고 다니도록 해야겠다. 일단 렛츠월드에서 파는 머리띠가 뭐 있는지부터 조사해 볼까?

그는 즉시 인터넷을 이 잡듯 뒤져 렛츠월드의 인기 머리띠 종류를 알아냈다. 토끼와 고양이 같은 동물 귀 머리띠가 아주 인기였지만, 이지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악마와 천사 컨셉 머리띠였다.

천사는 하얀 링을 허공에 띄우는 디자인이었고, 악마는 까맣고 뾰족한 뿔을 머리에 쓰는 앙큼한 모양이었다.

좋았어. 내가 천사고 태천C가 악마 하면 되겠다. 왜냐? 나는 화이트가 잘 받고 태천C는 블랙이 잘 받으니까.

이지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머리띠 판매점의 위치를 여러 차례 숙지했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사이 좋게 손을 잡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라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바이킹을 타고 싶다.

태천C도 분명 좋아할 거야. 담력이 세고 무서운 거 잘 타겠지? 겁 같은 거 하나도 없어 보이니까.

이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내일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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