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렛츠월드요? 그… 놀이공원요?”
“응. 야간 개장 때 우리 임직원하고 가족들만 출입하도록 조치해 준대. 완전 대박 아니에요?”
“와. 진짜예요?”
이지운은 화들짝 놀랐다. 가끔가다 대기업들이 사내 복지 목적으로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린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그게 내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금요일 야간 개장이래요. 급하게 섭외하느라 임박한 날짜밖에는 안 됐다는데 그게 어디야. 나 너무 신나.”
“저도요.”
어려서 조부모님과만 지냈던 이지운은 놀이공원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 학교도 두메산골에서 다녀 현장 체험 학습도 지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뤄졌으며, 대학 진학 전에는 서울에 와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일까. 놀이공원 야간 개장에 놀러 간다는 건 이지운에게 있어 꼭 한 번 이뤄 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고,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 부서만 가는 건가요?”
“에이, 아니지. 우리 본사 직원 다! 전체 다 참석이야!”
“정말요?”
이지운의 눈이 커졌다. 본사 직원 전원이 참석한다는 건 서태천도 간다는 뜻이었다. 비록 서태천과 단둘이 가서 달달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는 와중에 눈빛을 교환하는 일 또한 짜릿하지 않을까.
그게 바로 사내 연애의 묘미 아니겠어?
혼자 신이 나, 이지운은 바로 달력부터 찾았다.
“이번 주 금요일이랬죠? 당장 모레네.”
“응. 완전 기대되죠.”
숙려둥이 볼펜을 집어 들어, 이지운은 날짜에 큼지막하게 별표를 쳤다. 날짜를 체크하는 동안 쑥색 대가리가 흔들흔들거렸다.
달랑거리는 캐릭터를 보며, 민 대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 캐릭터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내가 어디서 봤지? 요새 잘나가는 유명 캐릭터는 절대 아닌데… 묘하게 낯이 익어. 저 둥그런 쑥색 얼굴. 뭔지 물어볼까?
“이 주임.”
“네, 대리님.”
“그 볼펜 캐릭터 이름이 뭐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헉. 이 캐릭터를 알아본단 말이야? 어, 어떻게?
요즘 들어 TV를 잘 보지 않는 이지운은 몰랐다. 숙려 제도에 관한 캠페인이 한창 방영 중이라는 것을. 숙려둥이가 알파, 오메가와 손을 잡고 유치한 율동을 선보이며 중독성 강한 로고 송을 불러 은근히 동영상 조회 수가 올라가고, 시민들의 관심 또한 상승 중에 있다는 것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이… 이거….”
“이상하게 낯이 익어.”
“그냥 산 건데… 이름 그런 거 없어요.”
“흠, 그래? 귀엽다.”
민 대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지운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번에야말로 펜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그나저나 벌써 다다음 주네.
다다음 주 주말은 이지운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날한시에 사고를 당하셨고, 이틀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이지운은 두 분을 한 납골당에 모시고 기일마다 찾아가며 외로움을 달랬다.
추워졌다 싶었는데 벌써 이맘때가 되었구나.
항상 겨울의 초입이 되고 날이 쌀쌀해지면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랐다. 혼자 남겨졌을 때의 고독함도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금 누군가 이지운에게 외롭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곁을 지켜 주는 서태천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매일 웃고, 즐겁고, 황당하고… 그러면서 행복했다.
이번에 찾아뵐 때 태천 씨랑 같이 가고 싶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태천 씨를 소개해 주고 싶어. 제가 어쩌다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요, 그게 얼렁뚱땅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지운이 까만 볼펜을 들어 추모 공원 가는 날짜를 체크했다. 언제나 우울했던 방문이, 이번만큼은 따스하고 뭉클할 것 같았다.
***
오늘은 서태천이 외근을 나간 탓에,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 이지운은 코트를 챙겨 입고 머플러를 두른 다음 사무실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잠깐만, 이 주임.”
송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지운을 붙잡았다.
“네? 팀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해.”
“아… 혹시 어떤 것 때문에.”
이 인간 또 수작질인가?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지만, 사회인의 가면을 쓰고 무난하게 웃어 보였다.
“커피나 한잔해.”
“저 집에 가서 밥 먹어야 하는데….”
“배고파? 밥 먹을까?”
“아, 아니요. 저희 집은 무조건 집에서 밥 먹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서요…! 밥은 곤란합니다.”
“그럼 커피 한잔해. 이 앞에 테라스 좋은 데 있잖아.”
송 팀장이 은근히 동행을 강요했다. 이지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잔만….”
“그래. 커피 마시고 바로 보내 줄게.”
송 팀장이 온화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잘생긴 남자가 근사하게도 웃는다고 하겠지만, 눈이 천장에 달린 이지운이 보기에는 그냥 귀찮은 팀장일 뿐이었다.
오늘 태천 씨가 늦는다고 했으니까,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대충 대꾸해 주다가 집에 가자.
이지운은 손목시계를 힐긋 보며 제 나름대로 타임 리미트를 정했다. 그때 송 팀장의 눈길이 이지운의 시계로 향했다. 이지운이 찬 시계는 보통내기 물건이 아니었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에 가까운 가격을 자랑하는, 그것도 국내에서는 구하기조차 힘들다는 브랜드의 스페셜 에디션이었다.
이 물건은 얼마 전 서태천이 이지운에게 선물해 준 것으로, 정작 이지운은 가격대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냥 좀 비싸고 좋은 것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흠… 일단 주차장으로 갑시다.”
“팀장님 이 앞에 카페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추우니까. 차로 가죠.”
송 팀장이 이지운을 지하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짧은 거리를 굳이 차로 이동하려는 것은 나름대로 잘 빠진 고급 세단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무리해서 할부로 긁은 외제 차는 송 팀장의 허세를 잘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서태천의 마이바* 여러 대를 돌려가며 타고 다니는 이지운은 송 팀장의 차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냥 차구나 싶을 뿐이었다.
오, 이 차를 보고도 안 놀라? 역시 웬만큼 잘 사는 집이 아닌가 보네. 집에 더 좋은 차가 있는 것 같아.
송 팀장은 자기 좋을 대로 이지운의 행동을 분석하며 흐흐거렸다. 이러한 무심함조차 이지운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카페에 들어간 두 사람은 각자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로 송 팀장이 떠들었고 이지운은 잠자코 들었다. 송 팀장은 자기가 어느 대학을 나왔니, 어느 동네에 사니, 집은 자가니 그 집의 시세가 어떻게 오르고 있니, 주식 투자를 했는데 얼마를 벌었니 하며 끝도 없이 자기 어필을 했다.
“아… 그러셨구나.”
“제 주식은 곧 상한가를 칠 겁니다. 그럼 수익이 얼만지 알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응?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설명했는데 왜 몰라. 자, 다시 들어 봐요.”
송 팀장은 묻지도 않은 주식 이야기를 30분도 넘게 해 댔다. 이지운은 머리가 아프고 속이 답답했다. 아, 그러시구나. 네네. 하면서 적당히 리액션을 해 주며 지루함에 눈을 깔았다. 그때 송 팀장이 느닷없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이 주임. 그거 알아요?”
“예?”
“…이 주임, 굉장히 신비한 구석이 있다는 거.”
신비? 이게 웬 개소리야.
털털함의 대명사 이지운으로서는 듣던 중 어이가 가출하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세요.”
“집도 안 알려 주고, 자기 이야기도 잘 안 하고… 그러면서 은근히 매력이 있어.”
“예? 제가요?”
“응.”
듣다 보니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이지운은 차게 식은 커피를 원샷하고 주섬주섬 가방과 코트를 챙겼다.
“저 이제 통금 시간이라서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럼 내 차로 데려다줄게요.”
송 팀장이 부랴부랴 차 키를 챙기며 일어섰다.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동네까지만 가자. 응?”
그로서는 이지운이 사는 동네를 알아낼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를 차에 태우고 집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지운은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팀장을 떨궈 내고 집에 가서 서태천이나 기다리고 싶었다.
“저 갈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지운은 거의 자리를 박차다시피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후다닥, 카페 밖으로 나가 버리는 그를 보며 송 팀장은 그윽하고 기름진 미소를 지었다.
웬만한 오메가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어쩔 줄 몰라 하던데. 어중간한 알파보다 내가 더 잘생겼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이지운 주임은 좀처럼 넘어오질 않는군…?
흠. 이럴수록 관심이 더해진다는 걸 모르겠지. 꺾기 어려운 꽃이야말로 더 갖고 싶은 법이니까.
송 팀장은 혼자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듯 과몰입을 하며 피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