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한참의 키스가 오간 후 서태천이 이지운의 옷 아래로 손바닥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아직 열감이 있습니다.”
“아….”
간지러움과 뜨거움, 짜릿함이 한데 뒤섞여 이지운은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다시금 이어진 키스에 입마저 틀어막혀 버렸다.
“아직 사이클이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이지운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뭉근한 열기가 몸 안을 맴돌며 오갈 곳을 찾고, 심박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눈앞의 알파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더없이 유혹적으로 느껴지면서 다리 사이가 젖어 들었다.
“가라앉혀야겠습니다.”
“…태천 씨가 해 주세요.”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맞물렸다.
***
이튿날, 이지운은 말끔한 컨디션으로 출근했다. 서태천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페로몬을 모조리 내보내는 데 성공해서였다.
“이 주임, 몸은 괜찮아요?”
송 팀장이 이지운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쫓아와 유난스럽게 그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다행이네. 몸살이었어요?”
“아, 네. 감기몸살이었습니다.”
차마 히트 사이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지운은 만만한 몸살 핑계를 댔다.
“점심에 죽이라도 같이 먹으러 갈까요.”
“네? 아니에요. 혹시라도 옮으면 어쩌시려고요. 나중에 같이 먹겠습니다.”
팀장의 과잉 친절이 이지운은 못내 부담됐다. 송 팀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 더 약을 사다 주겠다, 커피를 마시러 가자, 아프면 말해라 하며 이지운을 귀찮게 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걱정 안 해 주셔도 돼요.”
이지운이 적당히 사태를 수습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루 쉬었다고 일이 더럽게도 하기 싫었다. 업무 프로그램을 부팅하면서도, 엑셀 파일을 열어 보면서도 속으로는 서태천 생각뿐이었다.
우리 태천C는 뭐 하고 있으려나, 10분 전에 지하 주차장에서 헤어졌는데 벌써 보고 싶다….
이지운이 숙려둥이 볼펜을 휘휘 돌리며 속으로 한숨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본부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김 비서와 서태천이 걸어 나왔다. 부장이 용수철 튕기듯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본부장님. 잘 다녀오십시오.”
이 아침부터 비서를 대동하고 어딜 가는 모양이었다. 이지운은 그를 쳐다보지 않는 척하면서 눈만 돌려 서태천을 훑었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이지운은 살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회사 내에서는 절대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기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방금 우리 눈 마주친 거 누가 보진 않았겠지? 사내 연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 보면 꼭 누가 눈치채던데…!
급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이지운은 일하는 척을 해 댔다. 그때 핸드폰이 가볍게 지잉, 울렸다. ㅌㅊC로부터의 메시지였다.
ㅌㅊC
외근 다녀옵니다. 중간에 못 돌아올 수도 있어요.
지운 씨는 오늘 무리하지 말고 일찍 퇴근하도록 해요.
이지운은 치솟는 광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챙겨 주는 자상한 남편이라니, 이 결혼, 너무 잘했다! 어디 계신지 모를 그때 담당 구청 공무원님, 착오 행정 정말 감사하고요. 마음 같아서는 저희 결혼식에 초대해 드리고 싶네요.
어떻게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에 빠질 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짝임을 늦게 깨달았을 뿐. 그렇다면 우린 그건가? 운명의 한 쌍 뭐 이런 거?
이지운은 혼자 히죽거리면서 회상에 젖었다. 그러느라 기현진 대리가 저를 부르는 것도 못 들었다.
“지운 주임.”
“아, 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이지운은 식겁했다. 진지하고 느끼한 표정의 기 대리가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팠다고 들었어.”
“아… 네.”
두 사람은 러브 빌리지 고백 사건 이후로 굉장히 서먹하고 어색해진 사이였다. 그게 기현진 딴에는 서운했고,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고픈 마음이 컸기에 오늘 용기를 내서 찾아온 것이었다. 아팠다는 소식에 약을 챙겨 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몸은 괜찮아?”
“아, 저 괜찮아요!”
이지운이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기현진은 안타깝고 애잔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지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왜…요?”
“이거 받아.”
“네? 혹시 약인가요.”
약국에서 감기약이라도 사 왔나 싶어 봉투를 열어 보니, 세상에. 안에 초콜릿 과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지운이 단것, 특히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사 온 듯했다.
“뭐 이런 걸 다… 저 괜찮은데요…!”
“받아 줘, 지운아.”
마치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고백하러 온 사람처럼 기 대리는 얼굴을 붉혔다. 이지운은 점점 빨개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기겁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대리님 드세요!”
가벼운 실랑이가 오가는 와중, 송 팀장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기현진 대리님? 우리 이 주임한테 볼일 있나 봐요. 무슨 일인지 저한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팀장 권한이랍시고 타 팀 대리인 기현진을 견제하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 주임이 아팠다길래 들러 봤습니다.”
기 대리라고 그 미묘한 뉘앙스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사나이, 이지운에 대한 집착이라면 한 집착 하는 알파였다.
“챙겨 줘야죠. 제가 이 주임 신입 때 사수였거든요.”
“아… 그래도 지금 팀장은 나인데? 내가 챙겨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 팀장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파직파직, 두 남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 주임, 어서 초콜릿 먹고 힘내요.”
기현진 대리가 대뜸 이지운의 양어깨를 붙들고 귓가에 숨결이 닿을락 말락 소름 끼치게 말했다. 이지운은 파드득 떨며 몸을 피했다. 그러자 팀장이 혀를 찼다.
“그만 귀찮게 하고 가 봐요. 이 주임은 나 좀 따로 보고. 옥상 카페테리아나 한번 가지?”
이지운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이 새끼들아, 나 좀 가만히 놔둬. 나 태천C 메시지에 답장해야 한다고!
속으로 고래고래 외쳐 보았지만, 두 인간 다 양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때 민대리가 벌떡 일어났다.
“송 팀장님! 팀장님 찾는 전화 왔습니다.”
“아, 그래…? 알겠어요.”
송 팀장은 기현진 대리를 흘겨보며 자리에 앉았다.
“사담은 적당히들 하고. 일합시다.”
자기가 제일 열심히 사담에 임한 주제에, 팀장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경고했다. 이지운은 어처구니가 없고 짜증이 났다.
“그럼 지운 주임, 이거 먹으면서 내 생각해!”
“아니, 저…! 대리님, 저기요?!”
기 대리가 이지운의 가슴팍에 일방적으로 봉투를 안기고 후다닥 자기 팀 쪽으로 달려갔다. 엉겁결에 과자를 받아들고 만 이지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으로는 팀장을 좇았다.
대리님이야 원래 그랬다 치고, 팀장님… 아무래도 수상하다. 나를 과하게 챙겨 주시는 것도 그렇고 굳이 병문안까지 오겠다고 고집을 피우시기도 했고. 이제는 대놓고 기현진 대리님하고 기 싸움까지 벌이시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팀장은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대놓고 고백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싹을 잘라 놓는 게 좋을까? 아니야, 괜히 관계만 껄끄러워질 수 있어. 막말로 나 좋다고 대시한 것도 아닌데 ‘이러지 마세요!’ 했다가 나만 이상한 사람 될 수 있는걸. 게다가 직속 상사인데 서로 어색해지면 나만 손해다.
팀장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송 팀장과는 최소 1년 이상 함께 일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참아 넘기는 게 맞았다.
어차피 봄 되면 나랑 태천C랑 관계 밝히고 결혼식 올릴 텐데, 그때 가면 다 정리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있었다.
지금 빨리 답장 보내야지.
태천 씨도 힘내요. 사│
사랑한다고 할까? 말까? 손이 살살 떨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된단 말인가. 이지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심호흡했다.
아니야. 사랑한다는 말은 조금 더 아껴 놨다가 내 목소리로 말해 줘야지.
‘힘내요’ 까지만 적은 다음, 이지운은 살포시 핸드폰을 덮었다.
“응? 전화가 끊겼나.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송 팀장이 수화기를 툭툭 치며 민 대리를 쳐다봤다.
“어머. 끊어졌나 보네요.”
“누구한테 왔었습니까?”
“어… 그게, 누구였더라? 글쎄요. 말씀이 없으시던데.”
민 대리가 눈을 접으며 하하 웃었다. 이지운은 직감했다. 오지도 않은 전화였구나.
파티션 아래로 살짝 몸을 숙여 이지운은 민 대리에게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 대리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대리님. 이거 드세요.”
성의의 표시로 기 대리가 주고 간 초콜릿을 건넸다. 민 대리는 고개를 저으며 극구 거부했다. 이걸 먹은 게 발각되었다가는 기 대리가 유난을 떨 것 같아서였다.
“아, 그나저나 어제 연차여서 못 들었지?”
“뭘요?”
“우리 렛츠월드랑 업무 협약했잖아. 그래서 하루 임직원 데이 한다던데?”
민 대리가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