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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62화 (62/100)

62화

“우와.”

“배고파도 일단 물부터 마셔요.”

“네… 안 그래도 물이 마시고 싶었어요.”

지운은 이불 밖으로 상체만 내밀고 하체는 잘 가린 채 얼음물을 집어 들었다. 꼴깍꼴깍 마시고 있자니 서태천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다.

“음… 어,”

“네. 뭐 더 필요한 것 있습니까.”

“아뇨. 태천 씨… 절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 궁금해서요.”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건데요.”

“네?”

“봐도 봐도 안 질려서 그렇습니다.”

뻔뻔한 대사에 이지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담…되는데요?”

이지운이 서태천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서태천이 피식 웃고 이지운의 뺨에 키스했다.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바로 옆에서 이렇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데…!

하지만 맞받아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지운은 조용히 망고 조각을 집어 들었다. 동남아 현지식으로 예쁘게 칼집이 나 있었다.

“우와. 이거 동남아 호텔 가면 해 주는 거 아니에요?”

“네. 다행히도 할 줄 알아서요.”

“태천 씨가 했어요?”

“이 집안에 지금 지운 씨랑 나밖에 없는데 그럼 누가 했겠습니까.”

서태천이 이지운에게 자그마한 스푼을 쥐여 주었다. 그걸로 슥슥 떠먹으니 연한 망고 과육이 잘 발려 나왔다.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서울호텔 식음료팀을 닦달해서 구해 오라고 한 보람이 있군요.”

“아… 그러고 보니까 밤에… 백화점도 안 열었을 테고.”

“하지만 우리 호텔에는 24시간 온갖 과일이 갖춰져 있죠.”

이지운은 갑자기 서태천이 대단해 보였다. 돈이 많으면 뭐하나, 밤에 백화점이 닫으면 아무것도 살 수 없는데. 하지만 이 알파는 호텔을 통해 온갖 과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게 뭐라고 참 멋있었다.

“그럼 수프도 식음료팀에서 해 준 거예요?”

“섭섭한 이야기네요. 우리 집 냉장고 산입니다. 내가 만들었고요.”

“진짜요?”

한입 먹어 보니 감자 본연의 맛과 생크림이 어우러진 수프 맛이 일품이었다.

“끝내줘요.”

“다행입니다. 좋아해 줘서.”

서태천이 손을 뻗어 이지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길이었지만, 이지운은 그의 손을 더 이상 예전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바닥 안쪽의 굳은살이나 손등에 불거진 핏줄에 눈이 갔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무서울 만큼 강하게 압박하던 악력. 그것만이 생각났다.

시선이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붙었다. 단단한 목덜미와 광활한 어깨를 쳐다보자 새삼스럽게 간밤 생각이 났다. 어제 내가 저 몸을 만지고 매달리고… 으아, 이지운. 전생에 무슨 복 받을 짓을 한 거야. 저런 알파랑 히트 사이클을 보내다니….!

“혹시 말입니다.”

“네?”

잡생각한 걸 들킨 건 아닐까, 이지운은 괜히 찔려 빠르게 대답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습니까?”

“아….”

실은 다리 사이에 생소한 통증이 있어요. 허벅지 근육은 후들거리고 허리는 누가 송곳으로 콱콱 쑤시고 있는데요.

그렇게 말하기에는 사회적 체면이 있기 때문에, 이지운은 애매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그래도 오늘 하루는 연차 내도록 해요.”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였다. 지금부터 씻고 준비하면 제시간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긴 했다.

“아닌데요. 저 회사 갈 수 있어요. 이제 몸살기도 다 사라졌고… 그게 히트 전조였나 봐요.”

“그게 아니라, 향이 납니다.”

“네?”

“회사에 알파 형질 가진 사람이 몇 있지 않습니까. 몸을 가까이하면 분명 느낄 겁니다. 보니까 흥분하면 세이지 향을 뚫고 오렌지 향이 강해지는 모양인데, 그게 굉장히.”

“…굉장히?”

“자극적이에요.”

눈하나 깜빡 않고 말하는 서태천을 보며 이지운은 민망함에 큼큼거렸다.

“그렇군요.”

“그러니 집에 있어요.”

이지운이 손을 들어 손목 안쪽에 코를 묻었다. 확실히 급한 불은 꺼졌지만 은은한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서태천의 알파 페로몬까지 섞여 어우러지고 있었으니, 이러고 밖에 나간다는 것은 ‘나 어제 알파랑 잤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태천 씨, 저 이제 그만 씻고 싶은데….”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네?! 말도 안 돼. 그건 안 돼요!”

이지운이 기겁했다.

“출근하셔야죠! 뭐 하세요, 얼른 나가세요!”

“나도 통보했습니다.”

“예? 뭘요.”

“연차 쓴다고 통보해 놨다고요.”

서태천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왜, 왜요?”

이지운이 알기로 서태천은 연차 사용을 극히 자제하는 인물이었다. 지난번에 숙려 센터에 간다고 반차를 한 번 쓰긴 했지만.

“왜냐니, 지운 씨 돌봐야죠. 오늘 하루는 같이 있을 겁니다.”

“…저 때문에요?”

“네. 밥 먹이고, 씻겨 주고 다 할 겁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씻는 건 혼자 할게요!”

“흠. 이해가 안 가는군요. 어제 우린 이미 모든 걸 보고 심지어 입을 대거나,”

“아악! 그만!”

이지운은 귀를 막으며 침대로 쓰러졌다. 서태천은 장난이었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서태천이 마저 아침밥을 만들겠다고 나간 다음, 이지운은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긴 했지만 당일 연차를 사용하려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형질인의 히트, 러트 사이클은 병가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려면 의사 소견서를 추후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지운은 그렇게 해서 병가를 인정받고 싶지 않았다. 하루 병가를 내고 돌아왔다는 것은 히트 사이클을 가라앉혀 준 파트너가 있다고 떠드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미혼의 싱글에게 파트너가 있는 게 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괜한 말이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

그냥 어제 감기가 심해졌다고 해야겠다.

팀장님. 차 안이실 것 같아 문자 남깁니다.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오늘 연차 사용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자세한 건 통화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답장이 도착했다.

송팀장

전화 안 해도 돼요. 아프다는데 그럴 필요 없지.

푹 쉬다가 오시면 됩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송팀장

많이 아픈 건 아니죠? 병원 꼭 갔다 오고.

네. 그럴게요.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이지운은 한시름 내려놓고 안방 욕실로 들어갔다. 무심코 거울을 쳐다본 그는 돌이 되었다.

“이게 뭐야!”

온몸이 얼룩덜룩, 현대 예술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물리고 씹히고 빨린 자국이 적나라해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이, 이런 곳까지 남겨…?

상상을 초월한 부분까지 서태천은 제 흔적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

이지운은 멍하니 있다가 몸의 자국 하나하나를 만져 보았다.

간밤 여기에 태천 씨가 닿았다는 거지….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신 차리고 얼른 샤워하자.

이지운은 미온수를 틀고 물줄기를 맞으며 온몸을 씻어 냈다. 세찬 물을 맞으니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온 걸까? 내가 사이클 불규칙하기로 유명한 남성형 열성이라고는 해도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본격적인 히트 사이클이 온 적 없었는데 왜 하필 어제 갑자기 발작이 왔냐는 거야.

마침 집에 돌아왔고 태천 씨가 제때 도착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다. 흉한 꼴 보일 뻔했어.

히트 사이클에 돌입하기 전 응급 처치를 받거나 고농축 억제제를 주사한다면 오메가는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제대로 된 히트 사이클이 터진다면 해소 방법은 오직 알파의 체액과 페로몬을 점막으로 흡수하는 방법뿐이었다. 쉽게 말해 눈이 뒤집혀서 알파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음, 설마 캠핑장에서 스킨십이 있었다고 내 페로몬 체계가 교란된 건 아니겠지? 아닌 것 같다. 겨우 그 정도로는 사이클이 터질 수 없어. 그건 아닌 것 같고… 짐작 가는 구석이 없네.

병원 한번 가 봐야겠다.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갔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곤란하잖아. 태천 씨가 항상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갑작스럽게 히트가 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번 일의 원인도 알아내고.

근데 나 설마…? 임신하는 건 아니겠지?

이지운의 가슴이 철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제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는 부부였으므로 피임 관련한 물건 따위 집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설령 그랬다 해도 어제의 이지운은 본능에 잡아먹힌 상태라 그런 걸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에 해라 어째라 온갖 상스러운 말은 전부 이지운의 입에서 튀어 나간 것이었다.

아냐. 겁먹지 말자. 난 열성인 데다가 태천 씨는 러트가 아니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나 혼자 히트 사이클이면 임신에는 영향이 없었을걸.

이지운이 배우기로는 알파와 오메가 모두 러트와 히트 상태여야 임신 가능성이 높고, 한쪽만 그럴 경우에는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우성이 아닌 열성은 임신 가능성 자체가 현저히 떨어져, 간밤의 관계가 아무리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고 해도 별일 아니리라, 이지운은 애써 가능성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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