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서태천이 집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분 뒤였다. 황급하게 현관을 열어젖힌 그를 숨 막히는 세이지 향이 맞이했다. 허브향을 뚫고 존재감을 발하는 오렌지 향에, 서태천은 이 집안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향을 쫓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지운이 바닥에 엎드려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샤워 가운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 속살이 보였으며, 혼자 지분댔는지 가슴 돌기는 톡 불거져 있었다.
힘없이 바르작거리는 다리와 멍하니 풀린 눈. 명백한 히트 사이클의 증거였다.
“지운 씨…!”
서태천은 서둘러 무릎을 꿇고 이지운의 몸을 받쳐 들었다.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정신 차려 봐요. 괜찮아요?”
그러나 제 알파가 왔음을 감지한 오메가가 진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싸한 숲 냄새가 폐부를 파고들자, 이지운의 열기는 한층 심해졌다.
“태천 씨, 나… 나 좀 어떻게.”
이지운이 서태천의 목덜미에 팔을 휘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다급하고 간절한 동작에 서태천 역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처럼 농도 짙은 페로몬을 뿜어내는 오메가가 제 품에서 떠는데, 흔들리지 않을 알파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평소에 끔찍하게 만지고 싶었던 그런 오메가라면.
“지운 씨.”
“저, 너무 더워요. 몸이 이상하고….”
이지운이 그렇게 말하며 서태천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곳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창구라도 되는 듯이.
습하고 뜨거운 숨결이 와 닿자, 서태천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를 보였다. 그라고 해서 이지운을 안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열기를 띠는 몸이 그 증거였다. 그 역시 점점 이성이 흐려졌다.
“지운 씨.”
“네, 네… 하아….”
이지운이 서태천의 목덜미와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대답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 알아요… 태천 씨잖아요.”
“내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할지도 알고 있고?”
서태천이 경고하듯 말했다. 이지운은 순간 가슴이 오싹하게 죄어왔으나, 열에 취한 오메가는 그마저도 흥분으로 치환해 생각했다.
“…알아요. 태천 씨라면 좋으…니까, 제발 얼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지운의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지금까지 서태천이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억센 힘이었다.
“따라와.”
“아읏,”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목을 낚아채 단단히 거머쥐었다.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본능이 그러라고 시켰다. 서태천은 이지운을 침실로 끌고 가며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조급증이 일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방문을 걷어차듯이 열어젖히자, 두 사람이 항상 함께 눕던 침대가 모습을 내보였다. 전에는 어색하게 누웠고, 가끔은 장난을 쳤으며, 요즘은 다정하게 누워서 서로를 포근히 안아 주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 둘이 할 일은 과거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침대로 내던지고 빠르게 그 위로 올라탔다. 거침없이 가운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이지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입으로는 더운 숨을 내뿜으며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거렸다.
“태, 태천 씨…!”
흥분한 서태천으로부터 알파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페로몬은 젠틀하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마치 음습한 뱀처럼,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이지운의 발목부터 종아리와 허벅지를 감아 은밀한 곳까지 범하는 기분이었다. 그게 또 강렬한 자극이 돼, 이지운은 속절없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 봐.”
“하….”
“내가 누군지 생각하면서 해.”
“태천 씨….”
서태천이 자기 옷을 뜯어내듯 벗어 던졌다. 단추가 없어지든, 날아가든 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어서 빨리 이지운의 열기를 제가 흡수하고, 또 이 숨 막히는 향에 자신의 몸을 묻고 제 저열한 욕망을 풀어내고 싶다는 점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뜨거운 입술이 이지운의 입술을 짓이기듯 눌렀다. 마치 평생을 기다려 왔다는 듯, 여린 속살이 서태천을 반겼다.
“으, 으응….”
이지운이 무릎을 세워 서태천의 허벅지를 꽉 조였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 서태천의 흥분은 도를 모르고 폭발했다.
“후우… 이렇게 하면 이지운 씨,”
서태천이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쥐어 짜내며 으르렁거렸다.
“조절이 안 될 것 같은데.”
“상관없어요, 어서… 어서 저 좀, 어떻게…!”
이지운이 애원하며 서태천의 헐벗은 어깨에 뺨을 비비고, 손으로는 거침없이 그의 허리께를 더듬었다. 서태천은 그 발칙한 손들을 붙잡아 이지운의 머리 위로 고정시켰다. 늘씬하게 뻗은 몸에 군데군데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속살이 매혹적이었다.
입술을 내려 여린 살결을 빨아들이자, 이지운이 파드닥 허리를 튕기며 헉 소리를 냈다. 서태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지운의 상체를 짓누르며 곳곳에 제 자국을 남겼다. 서태천에게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페로몬이 이지운의 사지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 아… 응,”
이성이 흐려져 갔다. 황홀함과 아찔함, 고통을 넘나들며 이지운은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페로몬이 한데 섞여들며 지독한 쾌락을 선사했다.
***
이지운은 문자 그대로 죽은 듯 잤다. 뒤척이지도 않고, 소리도 안 냈다. 몸 안의 모든 기력을 소진한 탓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물가물 눈을 떴다.
“목… 말라.”
머리맡을 뒤졌는데 물이 없었다. 귀찮은데 주방까지 가야 하나 생각하며 침대 아래로 한 발을 내디딘 순간, 이지운은 허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헉,”
아니다, 정정. 누가 허리에 대못을 박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뿐 아니라 허벅지 안쪽은 근육 경련이라도 온 듯 후들거렸으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목도 무언가에 꽉 붙잡혔던 사람처럼 아팠다.
몸이 왜 이래. 감기 기운은 사라지고 열도 내린 것 같은데 대신 몸살이 찾아왔나?
이마를 짚어 보자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던 추위와 열기, 오한은 사라져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몸 안쪽 컨디션은 가뿐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깥쪽은 멍석말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프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잘 모르겠고 물이나 마시자.
이지운이 나머지 한 발을 내딛자 몸에 걸쳐져 있던 이불자락이 사르륵, 아래로 내려가며 헐벗은 몸이 드러났다. 이지운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제 알몸을 내려다보고 다시 한 번 헉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아예 입을 틀어막고 전신을 살폈다.
생각났다. 어제 오후 회사에서 돌아와서 너무 몸이 안 좋았고 태천 씨한테 전화를 했었지. 그런 다음에 생각나는 기억은 토막토막 생각나.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고압적인 서태천의 목소리,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숨결, 그리고 끝내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그 쾌감.
이지운의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시뻘게졌다.
진짜야? 이거 실화인가. 내가 태천 씨랑… 잤, 잤다고?
뒤늦게 밀려드는 창피함에 이지운은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그런데 땀과 그렇고 그런 체액으로 젖어 있어야 할 몸이 지나치게 보송했다.
나 땀 엄청 흘린 것 같은데. 그리고 땀 아닌 것도 많이 흘렸을 텐데 왜 이렇게 쾌적하지? 설마 태천 씨가 날 닦아 줬어?!
“으아악!”
이렇게 민망할 수가. 신이시여! 이게 꿈이라면 현실로 돌아오게 해 주시고, 현실이라면 차라리 꿈속으로 보내 주세요.
이지운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왜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멀끔하게 셔츠와 바지를 입은 서태천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지운은 알몸을 보일 수 없다는 일념하에 그대로 침대로 몸을 날려 얼굴까지 이불로 가렸다.
“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까. 어디 안 좋아요? 비명은 왜 지른 거고.”
“너… 너무 부끄러워서 그래요.”
이지운이 이불 밖으로 눈과 코만 빼꼼 내놓고 울상을 지었다. 그 말에 서태천이 웃더니 이지운을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뭐가 부끄럽습니까. 볼 거 다 봤는데.”
“으아아!”
이지운이 반항해 보았지만 이불에 갇혀 있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나왔다.
“목소리는 또 왜 이렇지.”
“어제 소리를 많이 질러서 그럴 겁니다. 당분간은 좀 힘들 거예요.”
“…창, 창피해….”
이지운이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서태천은 몇 번 피식거리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이지운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서태천이 트레이를 들고 방안으로 돌아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크림 수프와 함께 이지운이 좋아하는 망고, 딸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물도 넉넉하게 준비돼 있었는데 얼음물부터 미지근한 것, 뜨거운 것까지 세 종류였다.
거기에다가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홍차와 재스민 티를 언제 또 우려냈는지, 작은 트레이 안은 알찬 것들로 구성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