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 간지러워.”
살살 머리를 털어 주고 꾹꾹 덮어 주니 이지운이 간지럽다고 웃었다. 하얀 뺨에 장밋빛 홍조가 물들면서 입꼬리가 곱게 올라갔다. 웃으면서 몸을 비틀 때마다 헐렁하게 걸친 티셔츠 아래로 늘씬한 몸의 윤곽이 비쳤다.
“…더 간지럽게 하고 싶네요.”
“네? 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
“아닙니다.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라면 끓이죠.”
서태천이 이지운을 놓아주었다. 조금만 더 안고 있다가는 라면이고 뭐고 텐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 키스하면서 오전 나절을 다 보내버릴 것 같았다.
“라라라, 면면면. 한 번 더 먹어 보세요.”
이지운은 정체불명의 라면 송을 부르며 라면을 맛깔나게 끓여 냈다. 요리에 쓰고 남은 김치, 양파, 대파, 비엔나소시지를 송송 썰어 넣자 안 먹고는 견디기 어려운 라면이 탄생했다.
“잘 먹겠습니다!”
“저도 잘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지운 씨.”
“음! 맛있어.”
한 젓가락을 흡입한 이지운이 감탄했다. 맑은 물로 끓여서 그런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라면 맛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훌륭했다.
“어…? 맛있습니다.”
“그렇죠! 괜찮죠!”
평소 요리실력이 썩 뛰어나지 않은 이지운이었지만, 이번 라면만큼은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았다. 서태천이 최고의 라면이라고 칭찬해 주자, 이지운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공기는 상쾌하고, 날씨는 청명하고, 라면은 맛있고. 눈앞의 알파는 과하게 다정해 날 달콤하게 질식하게 만든다.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이지운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포만감을 느꼈다.
***
“1박 2일 캠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어떠셨나요. 자기 배우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셨습니까?”
“네. 아주 좋았습니다.”
해산을 위해 집결한 참가자들의 얼굴이 아주 밝았다. 다들 간밤을 즐겁게 보냈는지, 배우자와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서태천과 이지운 역시 손을 꼭 잡고 깍지를 꼈다.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 때마다 간질간질 이지운의 가슴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1조부터 6조까지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붓한 시간 보내셨으리라 믿고, 그럼 우리 재결합 팀들 다음 시간에 또 만납시다.”
“네!”
“감사합니다!”
감독관의 안내에 따라 커플들은 짐을 싸고 각자 차로 흩어졌다. 이지운과 서태천 역시 텐트 안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가져온 옷가지와 짐들을 잘 챙겨 트렁크에 실었다.
“저 이 옷 입을래요.”
이지운은 서태천이 둘둘 말아 집어넣는 중이던 바람막이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그건 갑자기 왜요? 춥습니까?”
“네. 지금 되게 춥잖아요.”
이지운이 자기 점퍼 위에 바람막이를 걸쳤다. 사이즈가 넉넉해 소매와 기장이 남아돌았다.
“추워요? 오늘 굉장히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혹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제가 워낙에 추위를 잘 타서.”
“컨디션 안 좋으면 바로 말해요. 병원을 들르든 어딜 들르든 할 테니까. 주치의 불러도 되고.”
“에이, 그 정도는 절대 아니에요.”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몸이 좀 춥다, 정도였다. 일요일 정오만 해도 이지운은 거의 정상에 가까웠단 소리다.
그러다가 이지운이 자기 상태에 이상을 느낀 것은 일요일 밤, 캠핑에서 돌아와 쉬던 중이었다.
원래는 허니문 여행지로 적합한 곳이나 구경하고, 내친김에 내년 1월에 있을 서태천의 생일 파티를 기획해 볼 생각이었다. 나름 마케팅팀 소속이라 아이디어를 내고 일을 추진하는 데 특화된 이지운이었다.
진짜 생일에 맞춰서 케이크를 만들어 주자. 베이커리에서 사 오는 것보다 내 손으로 직접 구운 케이크를 선물해 주면 좋아할 거야.
이지운은 요리 실력 대비 자부심이 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자기 손으로 케이크를 만들겠다는 발상을 했다.
생일 선물은 뭘로 하지? 내가 웬만한 물건을 선물해도 그 사람 눈에는 안 찰 텐데. 명품을 선물하기엔 내 월급이 너무 자그맣고 하찮다.
음… 역시 나를 선물하는 게 좋을까? 기왕이면 야릇하게?
이지운은 자기 몸에 풍성한 리본을 묶는 상상을 하며 혼자 히죽거렸다. 그러다가 아예 기획안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알파를 놀라게 하면서도 달달하게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을까. 이지운은 오직 그것이 궁금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부모님이 떨어져 계신 상황에서 어머니 혼자 서태천을 낳아 길렀다는데, 그렇다면 진짜 생일이 각별하면서도 조금은 쓰라린 기억일 수 있겠다는 게 이지운의 생각이었다.
내가 아주 화끈하고 행복한 생일로 각인시켜 드리겠어요. 기다려요, 여보.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지운은 기획안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꺼내러 작은방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너무 심하게 추웠다.
으으. 추워. 왜 이렇게 으슬으슬하냐.
감기라도 들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떨리고 추웠다. 난방 온도를 체크해 보고 혹시 몰라 옷도 한 겹 더 껴입어 봤지만, 오한은 멈추지 않았다. 깜찍한 기획안을 작성하는 동안은 손이 추워 더 이상 타자를 치기 어려웠다. 결국은 노트북을 덮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이거 심상치 않아. 증상으로 봐서는 몸살감기 같은데. 음, 그래. 야외에서 자서 그런가 보다.
이지운은 서재 문을 보며 슬그머니 거실 서랍장으로 이동했다. 이 시간에도 일하는 서태천을 방해하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감기가 들린 것 같다고 말했다가는 응급실에 가자는 둥, 의사를 부르자는 둥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감기약 먹고 푹 쉬어야겠다.
이지운은 다 그만두고 쉬자며 서랍장을 뒤졌다. 그런데 약통 안에 이렇다 할 감기약이 없었다. 해열제, 진통제도 보이지 않고 온통 연고와 밴드뿐이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곤 파스 정도였다.
아… 어쩌지. 일요일 밤이라서 약국도 다 닫았을 텐데, 편의점에서도 감기약 파나?
잠깐 나갔다 올까 생각하던 이지운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스쳤다. 이럴 때는 따끈한 쌍화탕을 먹으면 효과가 좋지 않던가. 서태천의 어머니가 일전에 줬던 한약을 데워 마시면 어느 정도 약효가 있을 것 같았다.
약의 정확한 성분이야 모르겠지만 항상 그 약을 먹으면 힘이 솟고 몸이 더워지는 느낌이라 감기를 떨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고.
이지운은 냉장고 야채칸에 고이 모셔 놓은 한약을 세 팩 꺼내 그릇에 부었다. 하얀 도자기 그릇에 시커먼 한약을 담으니 마치 사극에 나오는 사약 같아 좀 우스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전자레인지로 약을 데운 다음, 이지운은 쓴 냄새가 나는 약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캬.”
어떻게 된 게 벌써부터 기운이 치솟는 거 같지? 기분 탓인가.
약 먹었으니까 이제 한숨 자자. 일찍 자야 낫지.
단단히 결심한 이지운은 부부 침실로 가 잠자리에 누웠다. 몸이 시원찮아서 그런지 잠은 금방 들었다.
그러다가 이른 아침,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지운은 심각한 추위에 잠에서 깼다. 후끈후끈 열이 났다. 이마를 짚어 보니 확실히 체온이 평소보다 1도 이상 높은 듯했다. 머리도 살짝 어지럽고 미미한 두통이 있었다.
“…태천 씨…?”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서태천이 없었다. 자리가 싸늘한 것으로 보아 서재에 딸린 침실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서태천은 가끔 늦게까지 일하는 날마다 이지운을 깨우기 싫다며 서재에서 자곤 했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인 듯했다.
“으음… 목말라.”
이지운은 머리맡에 놓인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다음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서태천이 옆에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체온이 오르고 상태가 안 좋은 걸 보면 그가 놀랄 테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따로 출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쉬고 싶지만 그러면 아픈 게 들키니까 안 돼. 걱정할 테니까… 그러면 안 되지. 일단 회사에 갔다가 너무 힘들면 외출을 내고 병원에 가자. 수액 맞고 약 처방 받으면 좋아질 거야.
이지운은 스스로의 병명을 환절기 감기로 진단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것 아예 서태천이 일어나기 전에 빠르게 준비하고 나가 버리자는 마음이었다.
“약은 한 그릇 더 먹어야지….”
어제저녁에 했던 것처럼 한약을 한 팩 데워 마시고, 이지운은 빠르게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
“좋은 아침입니다.”
“이 주임, 얼굴이 왜 그래요?”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민 대리가 미간을 좁혔다.
“저요?”
“다크서클이 장난 아니네. 잠 못 잤어요?”
“아뇨. 잤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그렇게 말하고 무심코 거울을 보니, 이지운 스스로가 보기에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살짝 풀려 있었고 얼굴에는 열이 올라 홍조가 피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수척하고 아파 보였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실은 감기 기운이 좀 있어요. 어제 종일 밖에 있었거든요.”
“아아, 요새 환절기 감기 유행이잖아. 조심해야 돼.”
“네. 더 심해지지 않길 바라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