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오전을 열정적으로 보낸 다음에는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주최 측이 시원한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다. 서태천과 이지운은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 빨대 꽂은 음료수를 한 잔씩 마셨다.
“후… 꿀맛이네요.”
“지운 씨. 이것도 마시겠습니까?”
서태천이 오렌지 에이드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태천 씨 마셔야죠.”
“저는 물만 마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건 지운 씨가 좋아하는 맛인 것 같은데요.”
“저도 마시고 있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음, 이거 좀 웃긴 말일 수도 있는데….”
“무슨 말인데 그러죠?”
“제가 좋아하는 맛이 어떤 맛인지, 한번 느껴 보시면 어때요.”
말해 놓고도 조금 웃긴 이야기인 것 같아 말을 취소하려는데, 서태천은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제가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지운 씨 이야기가 맞아요. 한번 당신 취향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진짜요?”
서태천이 음료수를 한입 마셔 보더니,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자주 마시게 될 것 같네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 얼굴이 소년 같아, 이지운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면 볼수록 내 취향이야. 전에는 왜 몰랐을까, 서태천이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내 이상형이란 걸.
이지운은 지난날을 돌이켜 봤다.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사랑이란 감정이 처음이라서 이게 사랑인 줄 모르고 길을 헤맸던 것 같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법조차 잘 몰라, 여러 번 자신의 마음을 부정했지 않았던가.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예쁘게도 웃네요.”
“네?”
“방금, 제 눈에 저장 기능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지운 씨가 아름다웠어요.”
“아니, 태천 씨…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 전에는 안 이랬잖아요.”
“제가 전에는 안 이랬다니요.”
이지운이 기가 막혀 묻자, 서태천은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애정 표현 말이에요. 전에는 잘 안 하시더니 사귀고 나서는 장난 아니네요.”
“좋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입술을 찾아 짧게 입 맞췄다.
“사, 사람들 있는데 왜 이러세요!”
“지금 저희 빼고 다 키스 중입니다.”
“뭐라고요?”
주변을 둘러보니 서태천의 말은 진짜였다. 잔디밭에 흩어져 앉은 커플들은 서로를 물고 빠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그럼 뭐.”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네.”
이지운이 싱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햇살을 맞으며 나누는 오렌지 맛 키스는 달콤했다.
***
오후에는 향초 만들기 클래스가 열렸다. 휴양림 한편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다목적실로 들어가, 커플들끼리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서니 강사가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향초 수업을 맡은 일일 강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커플들이 박수로 강사를 맞이해 주었다.
“사랑에 빠진 분들을 위해 오늘은 두고두고 피울 수 있는 대형 향초 두 개씩을 만들어 볼 건데요, 주제는 로맨틱입니다. 제가 향료 베이스를 하나씩 설명 드린 다음에 이곳 중앙 테이블에 둘 테니 가져가서 마음껏 조합해 보세요.”
강사가 플로럴, 우디, 포레스트, 시나몬, 시트러스, 허브 등 다양한 향을 설명해 주면서 커플들에게 시향을 권했다.
“어떤 향이 가장 끌리세요?”
이지운 차례가 왔을 때 강사가 물었다. 이지운은 망설임 없이 포레스트를 골랐다.
“전 이거요.”
“이유가 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이게 좀 쑥스러운 이야기인데… 저희 알파분 향기랑 좀 닮아서.”
좌중에 부러움을 섞은 야유가 쏟아졌다. 아까부터 보니 사이가 남다르다는 둥, 서로 좋아 죽는다는 둥 이지운과 서태천에게 다른 수강생들이 한 마디씩 남겼다.
“그래요. 자기 배우자를 연상하게 만드는 향초를 만들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럼 이제부터는 앞에 적힌 레시피를 참고해서 향초 만들기에 돌입해 볼게요.”
이지운은 아까 목표했던 대로 포레스트 향을 베이스로 해 우디와 허브를 소량 첨가한 향을 조합했다.
“내 냄새가 그렇게 좋아요?”
재료를 휘젓고 있는 이지운에게 서태천이 물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뉘앙스가 장난스럽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좋… 네. 좋아요. 당연한 말씀을.”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이지운은 열심히 재료를 배합했다.
“근데 태천 씨는 향 뭘로 할 거예요?”
“쓸모없는 걸 묻는군요.”
“예?”
“진작 골라 왔습니다. 이름을 몰라서 좀 헤매긴 했지만 바로 찾아낼 수 있었어요.”
이지운이 서태천 앞에 놓인 향료 냄새를 맡아보았다. 다양한 허브 향기 중에 세이지에 가까운 톤 같았다. 그 옆에는 새콤달콤한 시트러스 에센스가 소량 담겨 있었고.
“설마 이거….”
“지운 씨 향기예요. 아직 제대로 맡아본 적은 없습니다만, 가까이 가면 살짝 느껴집니다.”
“태천 씨….”
날 연상시키는 향초를 만들려고 하다니. 태천C 완전 나한테 푹 빠졌네? 이런 사랑쟁이를 다 보았나?
“나는 태천 씨 만들고, 태천 씨는 나 만들고… 너무 좋아요.”
이지운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 하자, 서태천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으로 입가를 가렸다.
“왁스 녹여야 하니까 차분하게 움직여요. 다칩니다.”
“알았어요. 이제 불 끌게요.”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중탕한 왁스를 꺼내고, 향료를 섞었다. 이지운은 심지가 바닥 면부터 똑바로 서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서태천이 병에 왁스를 담았다. 두 향초의 향기가 섞이며 감미로움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지운은 환하게 웃으며 향초 사진을 찍었다. 나란히 놓인 한 쌍의 향초, 왜 이걸 만들라고 시켰는지 알 것 같았다.
“잘 챙기세요. 세상에 하나뿐인 향초니까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겠죠?”
“네!”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포장지와 쇼핑백을 나눠 주었다. 이지운은 누가 자기 향초를 훔쳐 가기라도 할세라, 꼼꼼하게 포장하고 이중 삼중으로 향초를 싸서 케이스에 넣었다.
나중에 이 향초를 어떻게 써먹게 될까, 그런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집에 모셔 놓고 깊숙한 데 감춰 놔야겠다. 그런 계획이었다.
향초 클래스에서 빠져나오자 어느덧 노을 지는 시간이었다.
“와,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죠?”
“순식간이군요.”
이거 슬슬 배가 고파 오는데?
이지운이 그렇게 생각하며 잔디밭으로 이동했는데 다행히도 저녁 시간이라는 공지가 전달되었다.
“여러분 장 봐 오신 걸로 편하게 식사하시면 됩니다. 각 텐트 앞에 나무 테이블하고 의자가 다 세팅돼 있고요, 숯이랑 그릴 그리고 토치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는 분은 저희한테 말씀해 주시면 빌려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거지. 이날을 위해 나는 그토록 장을 봤나 보다…!
이지운은 쾌재를 부르며 텐트 앞으로 달려갔다.
“지운 씨. 천천히 가요.”
“빨리 밥 먹고 싶어요!”
아까 처음 도착했을 때 6조 텐트 앞에 가져다 놓았던 아이스박스가 보였다. 이지운은 씩 웃으며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제 사 모은 식량들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뭐부터 먹지? 일단 바비큐부터 할까?
“태천 씨. 우리 소고기 구워 먹어요!”
“좋죠. 불부터 피워야겠습니다.”
“네. 같이 해요.”
이지운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바구니에 짐을 챙겼다. 수돗가에 가서 씻어올 것들을 챙기는데, 손길이 살짝 서툴렀다. 제대로 된 캠핑 경험이 없어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어… 청포도 씻어와야 하고… 음, 라면은 지금 끓여야 할까요? 아니다. 고기부터 굽기로 했지. 숯은 어디 있어요?”
“내가 할게요. 지운 씨는 쉬고 있어요.”
서태천이 토치를 집어 들며 이지운을 말렸다.
“아니에요. 그럼 저는 채소 씻어 올게요! 상추가 많기도 하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지운은 상추와 깻잎을 챙긴 다음 공용 수돗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해 야채나 다른 요리 재료를 씻는 사람들이 많았다.
찬물을 틀어 상추를 씻고 있자니 회사 워크숍 때가 생각났다. 그때 태천 씨는 수십 인분의 고추와 상추를 순식간에 씻는 저력을 보여 줬었지… 그 사람은 도대체 부족한 게 뭘까.
괜히 기분이 좋아져, 이지운은 혼자 흐뭇하게 웃었다.
“어머. 아까 퀴즈대회 1등 하신 분 맞죠?”
옆 수도를 쓰던 참가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맞아요!”
열연을 펼쳤던 때를 생각하니 살짝 민망해져, 이지운이 머쓱하게 웃었다.
“진짜 대단하던데요, 두 분이 손발이 척척 맞던데. 어쩌다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이혼자 캠프이다 보니 결혼,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방금 전 향초 클래스 때도 나란히 선 커플들이 이혼 사유에 대해서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 들은 터라, 이지운 역시 이 질문에 악의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구청 직원의 착오로 혼인 신고된 케이스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냥 좀… 오해가 있었어요.”
착오와 가장 비슷한 단어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이지운은 오해란 말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