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차는 한 시간 넘게 달려 국립 휴양림에 속해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잔디밭, 그곳에는 이지운과 서태천 커플 외에도 다섯 쌍이 있었다.
알파-오메가 형질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이다 보니 성별 조합은 자유분방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재결합을 희망하는 사람들답게 상당히 다정다감한 모습이었다는 점이었다.
이지운은 예전에 오프라인 숙려 교육을 들으러 갔을 때가 생각났다. 드로잉 수업과 숙려 일지 교환 낭독 시간에 싸움을 벌이던 커플도 있었는데, 그에 비해 이곳은 굉장히 평화롭고 달달한 공기가 흘렀다.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커플도 있고, 팔짱을 끼고 있는 커플도 있었다.
어? 나랑 태천C는 그냥… 나란히 서 있기만 하잖아. 남들은 다 얽히고설켜서 한몸이 되어 있는데 왜 우리만….
이지운이 조금 뻘쭘해지려는 찰나, 서태천이 손을 뻗어서 이지운의 손을 감쌌다. 이지운은 깜짝 놀라서 서태천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아주 유쾌하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저희요?”
“네. 그림 같아요.”
맞은편에 있던 남녀 알파오메가 커플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유난을 떨어 주었다.
아, 좋아. 누가 봐도 우리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그렇고말고!
이지운은 자꾸만 찢어지려는 입매를 관리하며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여러분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캠프장 한구석에서 숙려 감독관과 공무원 몇 명이 등장했다.
“빠짐없이 오셨군요. 다 모이셨으니 일정 관련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전에 문자로도 알려 드렸지만 저희 캠프는 재결합을 희망하시는 분들을 위해 특별한 코스를 엄선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펀하게, 편하게, 뻔뻔하게!”
숙려 감독관이 블루투스 확성기에 대고 말하자 커플들은 어색하고 뻘쭘한 듯 웃기만 했다.
“자 뭐하십니까, 다들 따라 하세요. 우리 캠프는 뭐다? 펀하게, 편하게, 뻔뻔하게 재결합 캠프!”
오늘따라 기운이 넘쳐 보이는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어색하게 구호를 읊조렸다. 지나가는 일반 휴양림 관람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이지운은 살짝 창피했다.
“이래서야 재결합 하겠습니까? 자, 다시 한번 외쳐 보시죠!”
“펀하게, 편하게, 뻔뻔하게!”
참가자들이 나름대로 힘 있게 진행자를 따라 외쳤다. 감독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축의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인 게임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첫 프로그램은 퀴즈 게임이었다. 가끔씩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포맷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며 모든 힌트를 몸짓으로만 줘야 하는 룰이 적용되었다. 퀴즈를 맞힐 사람은 오직 배우자가 주는 정보만을 활용해서 관용어구, 속담, 단어 등을 추리해내야 했다.
“1등 한 커플한테는 상품이 주어집니다. 다들 최선을 다해 주세요.”
감독관의 말에 이지운의 귀가 솔깃해졌다. 상품이라니 뭐지? 전에 회사 워크숍 때 받은 여행 상품권 정도는 되려나? 아니면 문화상품권이나 뮤지컬 티켓? 최소 영화 예매권은 되겠지.
“태천 씨, 우리 잘해 봐요.”
“그럽시다. 재미있겠는데요.”
서태천은 의욕에 불타는 이지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기분 좋고 설레서 이지운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자! 그러면 1팀부터 시작해 볼게요. 스케치북 여기 있습니다. 한 분은 설명하시고 한 분은 정답을 맞히세요!”
잔디밭 한가운데 자기 오메가랑 마주보고 서서, 알파가 손짓, 발짓을 시작했다. 제시어는 무려 ‘사랑’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워 보였다. 알파는 혼자서 키스하는 척을 했다가 구애의 춤을 췄다가 난리를 쳤고, 오메가는 끝내 문제를 맞히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포복절도했다.
“2팀도 준비해 주세요.”
“네!”
문제는 팀당 10문항이 주어졌는데, 말로 하지 못하고 모든 걸 몸으로 표현해야 했기 때문인지 다들 난항을 겪었다. 그나마 제일 많이 성공한 커플이 10개 문제 중 4개를 맞춘 커플이었다.
“아… 이번 기수 썩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6조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요?”
드디어 이지운과 서태천의 차례가 왔다. 서태천이 맞히는 쪽, 이지운이 연기하는 쪽이었다.
후우. 긴장되네. 여기서 점수를 많이 따야 1등을 할 텐데.
이지운은 게임에 단순하게 임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점수를 많이 딴다가 곧 두 사람이 잘 통한다는 점수 매기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자신이 없으면서도 잘 맞히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우린 저 사람들처럼 연애하다가 결혼한 게 아니라 아직 서로를 잘 몰라. 만날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제3 자에 의한 착오로 맺어진 관계였잖아. 그래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이지운은 꿀꺽 침을 삼켰다. 드디어 첫 번째 문제가 오픈되었다.
“아….”
하필이면 마지막 순번이라 그런지 단어가 첫 번째 문제부터 심상치 않게 어려웠다.
<계란찜>
사람이 이걸 표현할 수 있는 게 맞아?
이지운은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읍읍!”
말을 하지는 못하니 끙끙대며 손목시계를 가리키고, 환상적으로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다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잔디밭에 쓰러졌다.
엄청난 파격 퍼포먼스에 좌중은 압도당했다. 아니, 저게 계란찜이 될 수 있어? 다른 커플들이 어처구니없어하면서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태천의 입이 열렸다.
“음… 계란찜?”
“맙소사. 정답입니다.”
이지운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오늘 아침 서태천이 직접 만들어 준 계란찜이 너무 맛있어서 아까 이지운이 기절하는 시늉을 했는데, 그걸 재현한 것이었다.
“대단하네요, 6조! 다음 문제 가겠습니다.”
<미치광이 과학자>
“말도 안 돼.”
고난도의 문제에 나머지 조들은 경악했다. 저걸 어떻게 표현하고 또 맞힐 것인가? 의문을 품는 와중에 이지운은 바로 머리를 벅벅 긁어 며칠은 안 씻은 말티즈와 같이 떡진 머리를 연출했다. 눈빛에는 선명한 광기가 어려 있었고, 손을 바쁘게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과학자…?”
“어! 정답 근접입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가 볼까요?”
숙려 감독관도 이지운의 심상찮은 연기과 서태천의 천재적인 눈썰미에 감탄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이 문제를 통과시켜 주고 싶었다.
이지운이 갑자기 허공을 쳐다봤다가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다. 마치 비커와 플라스크가 보이는 듯, 엄청난 연기력이 폭발했다. 그러다가 이지운이 풀썩 무릎 꿇었다.
“미치광이 과학자!”
서태천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확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답입니다! 어떻게 이걸 맞히죠! 저희가 내면서도 이 문제는 망하라고 낸 건데 말입니다.”
감독관과 진행 공무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박수를 쳤다.
최종 결과 이지운과 서태천은 10문제를 모두 클리어했다. 한쪽은 광기 어린 연기력을, 한쪽은 신들린 촉을 갖고 있었다.
“1등은 6조! 일동 박수!”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이지운조차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커플 대박이다. 애당초 이혼하려고 했다는 게 놀라운데?”
“내 말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분! 우리 뻔뻔하게 캠핑 역사상 이런 점수가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힘찬 박수 부탁합니다!”
사람들이 박수 치며 환호해 주었다.
“태천 씨!”
“지운 씨!”
서태천과 이지운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가 서로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떻게 내 마음을 다 읽었어요?”
“지운 씨가 워낙에 잘하더라고요. 무슨 말 하는지 한눈에 알겠던데요.”
“고마워요, 맞혀 줘서.”
두 사람은 서로 대단하다 잘했다 난리 부르스를 췄다.
“자! 여기 선물 드리겠습니다. 좋은 거예요. 열어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감독관이 자신 있게 외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선물 상자가 좀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안에 상품권이나 무선 이어폰, 태블릿 같은 전자 제품 정도는 들어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마사지 건이나 눈 마사지기 수준은 되지 않을까? 이지운은 기대를 품고서 시원하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상자를 열어 본 이지운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굳이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포장된 상자를 헤집어 보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며칠 전 두 사람의 집으로 배송되었던 것들과 매우 유사했다.
“축하합니다. 숙려둥이 머그컵 세트입니다!”
감독관이 대단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뻐겼다. 이지운은 대체 이게 뭐라고… 싶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자신과 서태천이 잘 맞고 소통이 훌륭하게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실망한 이지운과 달리 서태천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집에 놔두면 되겠네요. 커플 머그컵이니까.”
어라? 그렇네. 이건 우리한테 특별한 의미가 될 수도 있겠어. 커플 머그컵이잖아! 이건 무려 재회 캠핑 퀴즈쇼 1등 커플만이 가질 수 있는 커플들의 특권 커플 아이템이야!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그러네요, 커플 아이템이에요.”
이지운은 햇살과 인사하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참 신기했다. 이상하게도 꿀꿀하고 우울하고 시시한 것들도, 서태천이 좋게 말해 주면 정말로 화사하게 피어나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착오로 시작된 신혼이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