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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54화 (54/100)

54화

ㅌㅊC

외부 일정이 있어서 먼저 나왔어요. 난 공식적으로 퇴근한 셈입니다.

지운 씨 데리러 6시에 지하 주차장으로 갈 테니 빠르게 내려와서 합류해요.

몇 시간 전 서태천에게 온 메시지에 의하면 그는 출장 중 현장에서 퇴근하는 척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올 것이라 했다. 하지만 6시 20분인 지금, 이지운은 여전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죄송한데 저 조금 늦을 것 같아요.

ㅌㅊC

일이 남았습니까?

아뇨. 팀장님이 안 일어나셔서요.

아직은 새 팀장이 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이지운은 칼퇴하기가 좀 눈치 보였다. 그래도 어제는 6시 좀 넘어서 일어나더니만 오늘은 아예 좌판을 깔았는지 송 팀장은 시계도 안 쳐다보고 일에 전념 중이었다.

“저… 팀장님.”

그래도 가야지 어쩐단 말인가. 이지운은 용기를 긁어모아 조심스럽게 퇴근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가 서류 가방을 주섬주섬 쥐면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송 팀장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시계를 봤다.

“아. 벌써 6시 반이군요. 퇴근들 하세요.”

“네!”

“예!”

민 대리를 비롯한 팀원들은 이지운보다 더 빠르게 사무실에서 도주했다. 이지운은 비로소 안심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서태천에게 지금 내려간다고 연락하기 위해 잠시 멈춰선 그때, 송 팀장이 대뜸 물었다.

“혹시 이지운 주임 약속 있나요?”

“아? 네, 네. 지금 약속 가 봐야 해서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쉽네요. 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저녁 먹자고 할 참이었는데.”

“네?”

이지운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팀장이 팀원에게 금요일 저녁에 밥을 먹자고 한다고? 막말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 주는 끈끈한 인맥도 아닌데 회사 사람과 술을 마실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지운은 까마득한 후배에, 주임 나부랑이였고.

“다음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같이하죠. 단둘이서 분위기 좋은 데로 가요.”

…이거 뭐하자는 거지?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뻔했으나, 이 느끼한 남자 앞을 빨리 떠나고픈 생각에 대충 대답했다.

“네. 팀장님.”

“그럼 즐거운 주말 돼요.”

“팀장님도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지운은 뒤돌아서서 빠르게 복도로 빠져나왔다.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니 평소 같지 않게 엘리베이터가 느려 터진 듯한 기분이었다.

빨리 좀 내려가라. 쑥쑥 내려가자!

초조한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니, 항상 주차돼 있던 곳에 서태천의 차가 보였다. 이지운은 주변을 살피고 잽싸게 달려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쩔쩔매며 사과했는데, 서태천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미안할 건 없습니다. 그런데 벌금을 좀 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혹시 오다가 딱지라도 떼셨어요?”

갑작스러운 벌금 이야기에 이지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서태천은 그 뒤로 별말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태천 씨?”

“뭐합니까, 얼른 벌금 안 내고.”

서태천이 손가락으로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으아, 버… 벌금.”

“얼른 납부하시죠.”

“알았어요.”

이지운은 다시 한번 사방을 살피고 눈을 감은 다음 서태천의 뺨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입술에 쪽, 하고 기습 키스가 날아왔다.

“태천 씨! 뺘… 뺨에 하라면서요.”

“난 그런 말 안 했는데?”

서태천이 씩 웃으면서 시동을 켰다.

“가죠.”

이지운은 밉지 않게 그를 흘기다가 웃어 버렸다.

러시아워와 겹쳐, 동네의 대형 마트까지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막상 안에 도착해 카트를 몰고 다니니 이지운은 신이 났다. 함께 요리해 먹을 재료를 고민하며 장을 보다니, 딱 신혼부부 같은 모습 아닌가. 아니… 우리 신혼부부 맞지. 맞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고.

이지운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기 코너를 둘러 봤다. 그의 눈이 먹을 것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반들거렸다.

“와, 등심 맛있겠다.”

이지운이 마블링이 번쩍이는 한우를 보며 감탄했다. 카트 안에는 이미 음식이 한가득 담겨 있었는데, 어묵탕 키트와 김치 우동 재료, 마시멜로와 구워 먹는 치즈, 각종 라면까지 과연 1박 2일 동안 다 먹을 수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양이었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요. 한우고 뭐고, 지운 씨가 원하는 대로 담아요.”

“진짜요?”

“안 말립니다.”

그 말에 감동받았는지, 이지운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점원에게 달려갔다. 곧 그의 손에 한우 투쁠 등심과 치맛살 따위가 한가득 들렸다. 계산을 하고 장 본 것들을 상자째 담아 트렁크에 실은 후, 이지운은 흥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싹 다 불태우고 와요!”

“좋습니다. 집에 가면 와인 고르죠.”

“아, 맞다. 셀러에서 맘에 드는 거 가져가면 되는 거예요?”

“네. 다 좋은 것들이지만 지운 씨가 좋아할 만한 걸 적극적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어… 도수 센 게 좋은데.”

차에 타면서 이지운은 은근히 말을 흘렸다. 아무래도 부부끼리 공기 좋고 외진 곳에 놀러 가는 것이다 보니 어른스러운 대화 타임이 주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그 분야에 있어서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이었지만, 술을 마시면서 진솔하게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트이지 않을까. 이지운은 그런 생각이었기에 와인을 못해도 세 병은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캠핑용 짐을 싸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일찌감치 눕는다고 누웠으나 이지운은 소풍 전날의 초등학생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는 그의 모습에 서태천이 피식 웃음을 날렸다.

“그렇게 좋습니까?”

“네, 너무 기대돼요. 요새 날씨도 좋잖아요. 밤에 모닥불 피우고 놀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지운이 서태천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태천은 말없이 이지운을 끌어안았다.

“그만 자요.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니까.”

굵직하고 힘 있는 팔뚝이 이지운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었다.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니 이지운은 잠이 싹 다 달아나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지운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굿나잇 키스구나, 이지운이 애써 떨림을 감추며 서태천의 품 안에서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키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태천의 숨결이 곧게 뻗었으면서도 너무 샐쭉하지 않은 콧등과 달아오른 뺨, 그리고 이지운의 입술까지 내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지운은 깊숙하게 입을 맞춰 오는 서태천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고,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의 위로 올라탔다. 묵직한 체중이 저를 누르자 이지운의 흥분이 더해졌다. 애타는 사람처럼 서태천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하아….”

길게 키스하다가 두 입술이 떨어지자, 서태천이 이지운의 젖은 입술을 닦아 주었다.

“왜… 멈추시는 거예요.”

이지운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더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지운 씨가 기절할 것 같으니까 이 정도만 하죠.”

“괜…찮은데.”

“괜찮기는요. 지난번처럼 겁먹을 거면서.”

아쉬운 마음에 이지운은 서태천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보았지만, 말마따나 지금도 이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더한 일을 벌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자그맣게 끄덕였다.

“이제 진짜 자요. 못다 한 건 내일 하고.”

서태천이 낮게 웃으며 이지운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이튿날, 날씨는 쾌청하다 못해 눈부시도록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살랑이는 가을바람이 여행가는 이들의 가슴을 부풀렸다.

“드디어 간다!”

“너무 좋아하는군요.”

“태천 씨는 안 좋아요?”

“안 좋을 리가. 누구랑 가는 건데.”

차 뒷좌석과 트렁크에 짐을 싣는 서태천의 모습은 아웃도어 화보가 따로 없었다. 가격은 캐주얼하지 못했지만 디자인은 비교적 심플하고 간소한 점퍼와 청바지, 무늬 없는 맨투맨을 받쳐 입은 서태천이 너무 근사해 이지운은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주체 못 할 만큼 기분이 들뜨면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렸다.

세상아, 우리 사랑을 지켜보고 있니? 이렇게 재밌어. 너도 연애해. 마치 연애란 상품을 바이럴 마케팅하는 사람처럼, 이지운은 매 순간 환하게 웃었다.

“얼른 타요.”

“네! 노래는 제가 틀게요.”

캠핑지까지 가는 동안 플레이리스트는 이지운이 맡았다. 주로 신나는 기타 스트링을 곁들인 가벼운 인디 팝이었다. 노랫말도 진솔하고 귀여운 것이 많았다.

“이런 취향이었군요.

“앗, 별로인가요? 생각해 보니까 태천 씨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네요… 오케스트라 틀어 드려요?”

“아니에요, 좋아서 그랬습니다. 이런 노래 들을 기회가 잘 없었거든요.”

이내 서태천이 노래의 후렴구를 나지막하게 따라불렀다. 워낙에 발성이 좋고 듣기 좋은 목소리라 위화감이 하나도 없었다.

우와. 노래까지 잘해? 미쳤다, 미쳤어.

이지운은 노래까지 잘하는 자기 남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감탄하면서 후렴구를 따라불렀다. 기분 좋은 합창이 함께하는 드라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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