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저 무뚝뚝해 보이고 빈틈 하나 없는 남자가 잠깐 틈을 타서 이런 깜찍한 이모티콘을 보내?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티 하나 안 내다니…! 태천C 너무 멋있잖아! 이건 반칙이라고요!!
나도 질 수 없다. 느끼하고도 진솔한 이 감정을 표현해 보자.
이지운은 미친 듯이 이모티콘 탭을 뒤져 대형 숙려둥이를 찾아냈다.
[자기가 있어서 행복해요♥]
좀 과한 감이 있긴 했지만 애정 표현으로 이만한 게 없다 싶어서 이지운은 후다닥 전송 버튼을 눌렀다.
***
기다리는 것이 있을수록 일상은 지루해지기 마련. 주말 캠핑만 손꼽아 기다리는 이지운은 하루하루가 너무 굼벵이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출근하면, 또 한 번만 출근하면 이번 주가 끝난다고 스스로를 달래 가며 이지운은 나름대로 평일을 열심히 소화해 냈다. 신규 팀장은 전 팀장과 달리 의욕이 넘치는 스타일이었다. 업무 면에서 부하 직원들을 궁지까지 몰아붙이며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 같았다.
이지운으로서는 꼰대 비리 아저씨에 비해 지금의 팀장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팀장이 시도 때도 없이 자길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기분 상한 티를 내거나 부담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 새 팀장은 이지운에게 은연중에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래도 이제 오늘 하루만 잘 버티면 드디어 내일 태천C랑 캠핑 간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이지운은 탁상 달력에 구멍이 날 정도로 집중해 파란 글씨와 빨간 글씨로 인쇄된 주말란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퇴근하고 캠핑에서 해 먹을 음식 재료를 장 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과일은 뭘 사고 바비큐 재료는 뭘 사야 할까. 요즘은 캠핑장용 밀키트가 잘 나온다던데 그런 걸 사 가도 괜찮겠지?
그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푸짐한 캠핑 식탁을 그려 보았다. 어려서는 가정 형편이 쪼달렸고 커서는 남들 MT가고 동아리 활동할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이지운은 제대로 된 캠핑장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난 회사 워크숍 때 바비큐를 구워 먹었던 날이 그나마 가장 캠핑에 가까운 기억일 정도였다.
나도 애인, 아니 남편 생겨서 같이 캠핑 여행을 다 가 보는구나. 가면 레크레이션도 하고 향초 만들기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할 거라던데. 숙려 감독관 말로는 바비큐 장비나 텐트는 다 준비되어 있으니 개인 용품과 음식만 챙겨 오라고 했다. 난 태천C랑 먹을 것만 가져가면 하루 재밌게 놀 수 있는 거야. 생각만 해도 설레네.
이지운이 혼자 흐흐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송 팀장이 이지운을 힐긋 보고 손목시계를 한 번 체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점심은 다 같이 드시죠. 새로 왔는데 팀점 한 번을 제대로 못 해서 맘에 걸렸어요.”
“팀점이요? 좋죠.”
민 대리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그려 보였다. 나머지 팀원들이나 이지운은 평소 구내식당에서 고만고만한 메뉴를 먹었기 때문에 외부로 식사 나간다는 말에 다들 화색을 띠었다.
“제가 살게요. 초밥 어떻습니까?”
송 팀장이 이지운을 콕 집어 물었다.
“저 말씀이세요? 어… 저야 괜찮지만 다른 분들 의견은 어떠신지….”
왜 하필 나한테 메뉴 정하라고 하는 거야?
이지운은 한 마디 톡 쏘아붙여 주고 싶었으나 상대는 상사. 그냥 초밥 어떻냐고 주변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난 초밥 좋아.”
“저도요.”
맞은편 박 대리와 김 과장, 최 과장이 전부 찬성했다.
“그럼 제가 근처 초밥집 예약하죠. 12시에 내려갑시다.”
“와! 팀장님 최고.”
“감사합니다.”
팀원들은 간만의 공짜 점심에 신이 난다며 박수를 쳤다.
업무 처리를 하며 바쁘게 오전을 보내자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자 송 팀장이 식사하러 가자고 팀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 같이 건물 바깥으로 나와 예약한 초밥 전문점에 도착하자 점원들이 이지운 무리를 반겨 주었다.
“룸으로 들어가세요. 바로 식사하시면 됩니다.”
이지운은 핸드폰을 열어 서태천과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모티콘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숙려둥이 이모티콘에는 없는 표현이 없는 것인지, 맛점하라는 이모티콘도 있었다.
[꼭꼭 씹어먹어요. 자기야.]
알맞은 이모티콘을 골라 톡 쳐서 전송시켰다. 처음 봤을 때는 느끼하게만 보이던 숙려둥이도 적응이 되니 마냥 귀엽게만 여겨졌다.
숙, 숙, 숙! 려, 려, 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요~
이지운은 저도 모르게 숙려 캠페인 로고 송을 흥얼거렸다.
“주임님. 요새 좋은 일 있나 봐?”
“네? 저요?”
“응. 얼굴이 아주 환한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민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녀의 안경 너무 형형한 눈빛에 순간 뜨끔해, 이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아무 일도 없어요. 너무 지루하다, 아아.”
“흠. 그런가. 주말에 친구 결혼식 가잖아. 지방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주말 바쁘게 지나가겠네.”
“아… 네! 강원도로 가요.”
“멀리 간다. 이번 주에 맑고 화창해서 나들이객들 많이 나올 거라고 하던데 차 안 막히게 잘 내려가.”
“맞아요. 날씨 좋다더라고요. 여자친구랑 근교로 데이트 다녀와야겠어요.”
맞은편의 박 대리가 맞장구를 쳤다. 젊은 사람들끼리 있어서 그런지 편안한 분위기에서 스몰토크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박 대리님 여자친구 있나 보네.”
송 팀장이 박 대리를 힐긋 쳐다봤다.
“네. 결혼 전제로 사귀고 있습니다.”
“오. 그러면 잠깐 보자, 과장님들은 기혼이시고… 나랑 민 대리, 박 대리가 솔로네요. 그리고 우리 이지운 주임님… 아직 미혼이죠?”
송 팀장이 다시 눈을 돌려 자기 맞은편에 앉은 이지운을 쳐다봤다.
“아, 저요?”
“네. 미혼으로 알고 있는데 맞죠?”
회사에는 착오로 혼인 신고 당한 다음 가족 관계 증명원을 제출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아직 사내 인트라넷 상으로 이지운은 미혼이었다. 이지운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을 거예요.”
“그럼 혹시 애인 있어요?”
어?! 이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 애인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
짧은 순간 혼란에 잠긴 이지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스스로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네니오?”
“음…? 있다는 건가요, 없다는 건가요.”
“아! 없어요. 없죠.”
배우자는 당연히 없는 척해야겠고, 애인도 그냥 없다고 대답해야겠다 싶어 이지운은 손사래를 쳤다.
“아… 왜 아직까지 혼자죠?”
“네?”
“다들 지운 주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송 팀장은 이지운을 향해 느끼하게 웃어 보였다. 이 척박한 회사 안에서 분명 눈에 띄는 훈남은 맞으나, 지나친 날티와 은은한 기름기에 이지운은 조금씩 그에게 질려 갔다.
“어서 먹어요.”
송 팀장이 새우튀김이 담긴 접시를 이지운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죄송한데 제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초밥 먹을 때는 새우 초밥을 빼고 먹으면 됐기 때문에, 이지운은 아까 예약할 때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으로 훅 다가오는 새우튀김을 보자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분들 드세요. 전 못 먹으니까요.”
“이렇게 맛있는 걸 왜 마다해. 그러지 말고 조금만 먹어 봐요.”
“아, 아니에요. 저 정말 못 먹어서요.”
팀장이 배려인지 강요인지 모를 행동을 하자 이지운은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때 민 대리가 끼어들었다.
“이 주임 새우 먹고 응급실 실려 간 적 있대요. 잘못하면 사람 잡아요, 팀장님. 알레르기 우습게 보면 안 된대요.”
그녀가 최대한 부드럽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다. 그제야 송 팀장은 아깝게 됐다며 자기가 이지운 몫까지 2인분을 먹겠다 나섰다.
…멋모르고 새우 먹었다가 병원 실려 간 거 진짠데.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나 업고 택시도 안 잡히는데 몇 km를 뛰어가 주셨지.
어릴 적 생각을 하니 이지운은 마음이 애틋하기도 하고 좀 불편하기도 했다. 이렇게 쌀쌀했던 계절의 일이어서 안 그래도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웠는데, 새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꾸만 그분들이 보고 싶었다.
그때 이지운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ㅌㅊC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핸드폰을 테이블 아래로 넣어서 살짝 터치해 보니 [밥 잘 먹어요.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고.] 하는 간단한 내용이 도착해 있었다.
별것도 아닌 짤막한 메시지가 뭐라고, 이지운은 금방 맑게 갠 하늘처럼 기분이 보송해졌다.
새우 빼고 열심히 먹을게요. 잘 체하진 않아요. 손 한번 따인 다음부터는 무조건 꼭꼭 씹어먹거든요.
이지운이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희미하게 웃는 것을, 송 팀장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는 것을 이지운은 꿈에도 몰랐다.
어라… 이 오메가 좀 봐라?
송 팀장은 이지운을 훔쳐보듯이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