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매니저와 신나게 쇼핑을 하고, 이지운과 서태천은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백화점을 떠났다.
“잘 입을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차에 올라타서도 이지운은 쇼핑백을 꼭 끌어안고 탔다.
“뒷좌석에 두지 그래요. 불편할 텐데.”
“우리 태천 씨가 사 준 선물이니까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어요. 이러고 집까지 갈래요.”
“흠… 그럼 좀 하기가 힘든데.”
“네? 뭐가요?”
이지운이 시동을 거는 서태천을 쳐다보며 물엇다.
“사례를 받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진짜요? 뭐 받고 싶으신데요?”
말로만 고맙다고 할 게 아니었구나. 그래, 나도 성의를 보여야지. 이지운은 준다고 신이 나서 덥석덥석 선물만 받은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어… 근데 지금 음… 이 코트랑 옷이랑 합치면….”
하긴, 이 정도 고가의 코트를 사 줬는데 맨입은 그렇긴 해. 잠깐. 통장 잔고가 얼마 남았지? 엊그제 카드값으로 다 털리지 않았나?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이네요.”
“네? 아… 그, 그게… 사례를 얼마나 해 드릴 수 있을까 계산하느라.”
서태천이 시동을 걸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그러면서 이지운을 빤히 쳐다봤다.
“물질적인 게 아닙니다.”
“네? 그러면요?”
“애인 사이에 고마움을 표하는 방법이 따로 있겠죠.”
그의 진지한 듯, 한편으로 장난스러운 물음에 이지운은 뒤늦게 말귀를 알아들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네. 그, 그러면….”
“값을 좀 후하게 치러 주시겠습니까.”
차 안은 어두웠고 지하 주차장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차 내부에는 서태천과 자신뿐, 이지운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지운이 눈을 감고 서태천의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뺨에 쪽, 하고 작게 입을 맞춘 그가 소심하게 눈을 떴다.
“음. 이걸로 끝입니까?”
“네?”
“많이 모자란데요.”
“아….”
“안 되겠습니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받기로 하죠.”
서태천이 엄하게 꾸짖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화난 척하는 연기가 너무 우스워, 이지운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네… 그럼 얼른 집에 가요, 태천 씨.”
아, 신난다. 거의 쾌지나칭칭 나네가 따로 없다. 기분이 하늘을 날 것만 같아, 이지운은 격렬하게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근데 이 남자 연애 안 해 본 거 맞아? 감히 모솔 주제에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난리가 나도 되는 거냐고?!
이지운은 속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
“다음 주 토요일 정오 출발… 돌아오는 건 일요일, 오케이. 연차는 따로 안 내도 돼서 좋네.”
[뻔뻔하게 재결합 캠프] 날짜를 달력에 표시하며, 이지운은 두 번 세 번 남은 날짜를 헤아려 봤다. 꼬박 일주일이 지나야만 캠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프로그램이 기대됐다.
나도 참 웃기네. 전에는 숙려 앱이랑 숙려 과제 주어지면 질겁하면서 쳐내기 바빴는데 이제는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날이 무슨 날이야, 주임님?”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던 민혜경 대리가 이지운의 달력을 가리켰다.
“아, 네?”
“주말에 약속있나 보다, 주임님.”
캠핑 날짜에 동그라미를 하도 시커멓게 친 탓에, 달력 종이에 구멍이 뚫리려 하고 있었다.
“아… 친구 결혼식인데 까먹을까 봐요!”
“그렇구나. 혹시 그 친구는 아니지?”
“네? 누구요.”
“그… 연애 상담해 줬던 주임님 친구의 친구의 친구.”
앗차.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저고요… 저 결혼해요. 대충 봄쯤에 할 거 같지만 죄송하게도 상대가 누군지는 지금 밝히기 어려워요. 회사 생활하는 동안 과도한 관심을 받고 싶진 않습니다.
“그… 그 친구는 아니고요. 하하, 다른 친구요.”
“그렇구나. 그 친구는 좋은 소식 없대?”
“엄… 분위기가 아주, 좋은 것 같던데요.”
“진짜?”
이지운은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잘 지낸대요.”
“결혼까지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하. 그럴지도요.”
그나저나 우리 태천C는 뭘 하고 있으려나. 연락이나 한번 해 봐?
이지운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사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조직도의 한참 위쪽에 [마케팅본부장: 서태천] 님이 온라인 모드로 접속해 있었다.
개인 메신저도 좋지만 오늘은 스릴 넘치게 사내 메신저로 대화해 볼까? 누가 볼까 두렵고 짜릿한 그것이 바로 사내 연애의 묘미… 그래. 그 맛에 하는 거지.
이지운은 혼자 북을 치고 장구를 치며 신나했다.
뭐라고 말을 걸지, 궁리를 하고 있던 그때였다. 부장이 입구에서 낯선 남자를 옆에 끼고 걸어 들어왔다.
“자자! 우리 마케팅 1팀, 2팀 여러분들 잠시 주목 바랍니다. 새로운 1팀장님입니다.”
부장의 목소리에 좌중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1팀장을 맡게 된 송호종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송 팀장은 호텔리어 출신이라 키가 크고 잘빠진 스타일이었다.
“저 사람이 내가 말한 그 팀장님이야. 훈훈하지?”
우리 태천C만큼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괜찮구나. 이지운은 송 팀장의 훈훈함을 인정하긴 했지만, 사랑에 빠져 콩깍지까지 쓰인 상태였다. 그 어떤 절세미남을 눈앞에 갖다 놓아도 다 내다 버리고 서태천을 찾아 떠돌 정도로 이지운은 본부장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훈훈… 네. 그렇네요.”
송 팀장이 민혜경 대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송호종입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요.”
“네! 팀장님. 여기서 뵙게 되니까 너무 좋네요.”
다른 팀원들도 일어서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상투적인 인사말과 가벼운 악수가 반복되었다. 이지운도 자리에서 일어나 송 팀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이지운 주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지운… 주임이라. 그렇군요.”
송 팀장은 악수하면서 이지운을 빤히 들여다봤다. 손에 유달리 강한 악력이 실린 것 같기도 했다.
“잘 지내야겠습니다.”
“네?”
“잘 지내고 싶어서요.”
송 팀장이 이지운과 다시 한번 눈을 맞췄다. 이지운은 순간 송 팀장의 눈빛에서 기현진 대리가 자신을 볼 때와 비슷한 뉘앙스를 느꼈다.
연애 쪽으로는 촉이 하나도 없고 눈치조차 죽어 버린 그였지만, 제주 러브 빌리지에서 본의 아니게 삼각관계를 형성한 이후 이지운은 그쪽으로 미미하게 성장했다. 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이 처리했을 시선이 분류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누가 자길 쳐다보면 그게 그냥 쳐다본 건지, 맘에 들어서 쳐다본 건지 대충 구분이 됐다.
어… 그래도 이건 기분 탓이겠지? 송 팀장님이 아까부터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데.
이지운은 곁눈질을 하며 은근슬쩍 송 팀장을 살폈다. 송 팀장은 부장과 잠시 대화하거나 컴퓨터를 들여다보다가도 이따금 이지운을 쳐다보았다.
에이. 세상 모든 남자가 날 좋아한다고 망상하지 말자. 그건 병이야. 병. 원래 달달느끼 팀장님으로 유명했다고 하니까 그냥 나를 좀 쳐다보는 시선이 끈적하면서 뜨끈하다고 생각해야겠다.
아까 태천 씨한테 말 걸려다가 말았었지… 뭐하냐고 심플하게 물어볼까?
본부장님 나른한 오후 뭐하고 계십니까│
아냐. 말투가 너무 딱딱하잖아. 이런 거 말고 사내 연애의 재미를 잘 살린 문장 없을까?
이지운은 여러 차례 문장을 손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느라 본부장실 문이 열리고 서태천이 나온 줄도 몰랐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등장한 서태천 때문에 이지운은 허겁지겁 대화창을 내리고 자리를 반듯이 했다. 다른 직원들은 갑자기 내선 전화를 걸고 키보드를 부술 듯이 내리치며 바쁘게 일하는 척했다.
“아이고. 본부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부장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서태천 옆에 섰다. 송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추스르며 서태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케팅 1팀원 여러분께 간단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서태천이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더 나은 마케팅팀이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소란스러웠던 것은 잊고, 앞으로는 업무에만 매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태천의 목소리는 근사했으며, 말투는 우직하고 단단했다. 이지운은 새삼스럽게 서태천이 본부장님 그 자체로 보였다. 요새 여보, 태천C하고 노느라 잊고 있었지만 서태천은 엄연히 이 그룹의 주인이었다.
“인수인계 절차가 없어 힘드셨겠습니다. 그래도 힘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본부장님.”
송 팀장이 꾸벅 인사했다. 곧이어 부장과 송 팀장, 서태천이 본부장실로 향했다. 그러느라 자연스럽게 서태천이 이지운의 책상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고, 네이비색 넥타이에 한 줄기 빛나는 넥타이핀이 어른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아… 진짜 멋있다. 서태천 너무 잘생겼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지만 사내 연애라서 참는다!
이지운이 혼자 부들거리면서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서태천이 이지운의 핸드폰을 슬쩍 건드렸다. 액정을 툭툭 치는 바람에 액정이 켜졌다.
뭐지? 핸드폰 열어 보라는 건가.
임원진들이 본부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이지운은 재빠르게 액정을 켰다. 그러고는 바로 기절할 뻔했다. 서태천이 메신저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한 숙려둥이를 하나 보내놓은 것이었다.
[오늘도 힘내요. 사랑하는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