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금요일 저녁, 이지운은 바빴다.
눈으로는 태블릿에서 재생 중인 동영상을 쳐다보고 손으로는 동영상 속 요리 강사가 불러 주는 재료들을 찾아 냉장고를 뒤적이느라 한순간도 멈출 수가 없었다.
[샌드위치의 유래를 아시나요? 일설에 의하면 중세 유럽의 샌드위치 백작이 빵 사이에 이것저것 끼워서 간단하게 식사한 데서 시작되었다고도 하는데요. 구독자 여러분, 우리도 후세에 길이 남을 멋진 샌드위치를 만들어 보아요.]
후세에 남을 만큼 멋진 건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오늘 하루 맛있게 먹으면 됐지.
[재료는 집에 있는 것들을 활용할게요. 식빵은 필수고요, 버터나 마요네즈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속 재료! 달걀, 피클, 머스터드 소스, 사과, 오이 이렇게 넣으면 맛있어요.]
다행히도 재료들은 집에 다 갖춰져 있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이 장을 봐 놓은 덕분이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생각보다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답니다. 일단 달걀을 삶으면서 사과와 오이를 손질해 주세요. 조그맣게 깍둑썰기를 하면 된답니다.]
동영상 속 요리사는 미친 듯한 속도로 사과를 깎아 썰고, 오이를 조졌다. 가공할 속도와 깔끔한 칼 솜씨에 이지운은 약간 당황했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해?
[달걀은 금방 익어 버리니까요. 노른자가 새까매질 정도로 삶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사과랑 오이를 잘게 조각내셔서 믹싱 볼에 담으시고 소금 약간 그리고 후추 한 꼬집을 뿌려 주세요.]
어? 이거 왜 이렇게 빨라. 2배속 재생 설정돼 있는 거 아니야?
이지운은 순간 당황하며 태블릿 피시를 점검했지만, 안타깝게도 동영상은 매우 정상적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또한 그 아래 코멘트들은 ‘이렇게 쉬운 샌드위치 레시피는 처음이다.’, ‘나 요리 진짜 못하는데 이거 따라해서 애인한테 칭찬받았다.’ 같은 소리 일색이었다.
순간 자존심에 금이 간 이지운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래, 내가 안 해 봐서 그렇지 한다면 못하는 사람은 아냐. 그냥 아직 레시피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내가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어서! 어? 에그마요 샌드위치 윤기 좔좔 나게 만들고! 검은 머그컵에 향기로운 커피를 담아 우리 태천C 먹이고 말리라!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빼며, 이지운은 눈빛을 이글이글 빛냈다.
언제 서태천과 숙려 철회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했는데, 그는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한다고 했다. 저녁 시간을 같이 못 보낸다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지운은 밤늦게 돌아올 태천을 위해 야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잊지 마세요. 계란은 금방 익습니다.]
“어…? 어억, 억!”
부글부글. 냄비에 물이 끓어 넘쳤다. 이지운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로 손을 뻗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물이 파르르 넘치면서 인덕션에 범람했다.
“어, 어떡해.”
허둥지둥 인덕션 전원을 차단하려는데, 그 와중에 발치에 주걱이 떨어졌다. 그걸 밟고 이지운은 스케이트 선수처럼 슬라이딩했다.
“으아악!”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질까 봐 겁이 나, 옆으로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다행히도 달걀 삶은 물은 이지운을 덮치지 않았다. 대신 소금과 후추 병이 그의 얼굴과 어깨를 가격했다.
“아이고… 나 살려.”
***
몇 시간 뒤, 밤 깊은 시간. 서태천은 하루 종일 자신을 갑갑하게 조였던 넥타이를 풀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은은한 무드 등이 켜져 있고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피곤하군.”
팀장 비리를 조사하고 해임 결정을 내리기까지, 요 며칠간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린 몸이 피곤을 호소했다. 어제는 그 와중에도 이지운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해서 데이트를 즐기긴 했지만. 그 이유로 금요일인 오늘 두 배로 바빴으니 조삼모사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고 있나?
집안이 유난히도 조용해, 서태천은 이지운이 먼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지운은 침실로 가기 전, 거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든 채로 발견되었다.
“으음… 조심… 뜨거워.”
왜 여기서 이렇게 자고 있지, 불편하게.
서태천은 이지운을 깨우기 위해 소파로 다가가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낮은 테이블에 샌드위치가 몇 조각 담겨 있었다.
혼자 저녁으로 만들어 먹었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으나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접시에는 숙려둥이 메모지가 붙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지운 특유의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맛있게 드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아침에 자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맛있게 드세요’란 말 옆에 뭔가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었다. 아주 새까맣게 덧칠을 해 무슨 글씨였는지 알아보기가 힘들었으나, 뒤집어 보니 원래 적혀 있었던 글자가 보였다. 바로 ‘여보’라는 단어였다. 서태천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아까워서 어떻게 먹습니까.”
서태천은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얌전히 넣은 다음 이지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걸로 봐서 씻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가 그대로 기절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태천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지운은 알량한 샌드위치 한 쪽을 만들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다.
달걀노른자가 예쁜 노란빛이 나올 때까지 거듭 삶고, 오이와 사과는 아삭한 맛을 살리도록 최선을 다했다. 소금과 후추를 적당량 쓰기까지도 꽤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지운은 세 시간 가까이 샌드위치와 죽음의 결투를 벌인 후, 드디어 완성된 샌드위치를 놓고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으음… 냄새 좋아.”
이지운은 잠결에 좋은 향을 맡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것이 자신을 감싸서 휙 들어 올리는 것도 느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까 싶을 만큼 재미있고, 또 아늑했다.
뭘까. 대체 뭔데 이렇게 좋냐….
잠결에도 이지운은 헤실헤실 웃었다.
얼마 가지 않아 등에 푹신한 것이 와 닿았다. 침대 같았다. 이지운은 잠꼬대를 하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잘 자네요. 보기 좋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침대에 내려놓고서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그의 소매를, 이지운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천… 태천 씨… 샌드위치… 머그컵은… 블랙이죠.”
서태천은 피식 웃은 다음 이지운의 이마를 살살 쓸어 주었다. 그러자 잠꼬대가 잦아들며 이지운은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
간만에 늘어지게 잤다. 아이고 개운해라.
이튿날 눈을 뜬 이지운은 하품을 하며 팔다리를 쭉쭉 뻗으려 했다. 그런데 단단하고 딱딱하면서 온도 높은 것에 둘러싸여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았다.
뭐지…?
상황을 파악해 보니, 서태천이 자신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회색 가운은 방탕하게 앞섶이 풀어 헤쳐진 상태라 속살이 다 보였다.
억. 아침부터 좋은 구경한다.
이지운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리면서도 은근히 손가락 사이를 벌려 시야를 확보했다. 얄궂게도 그 타이밍에 서태천이 눈을 떴다.
“…깼습니까?”
“아! 네…! 일어났어요.”
민망해라. 내가 자기 가슴 보고 있었단 건 몰라야 할 텐데.
이지운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서태천은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지, 이지운의 귀에 대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때문에 깬 건가….”
“아니에요. 아, 아니… 그냥 눈이 떠져서.”
“조금만 더 잘까요.”
서태천이 팔에 단단히 힘을 줬다. 그 바람에 이지운은 납작 만두가 되어 그의 품에 꽉 갇혀 버렸다.
으아, 심장이 남아나질 않네! 이러다가 고혈압 오겠어.
“일, 일어났으면 식사하죠.”
“아… 그럴까요.”
“제가 차릴게요! 먹을 거 있어요!”
이지운이 서태천의 팔을 풀며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런데 어젯밤에… 샌드위치 만들어 놓고 내가 어쨌더라? 태천C가 돌아와서 먹었을까?
“내가 차리겠습니다. 씻어요.”
“어? 네.”
서태천이 이지운을 욕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어물쩡 씻고 나와 보니 서태천이 모카 포트로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자신이 애써 만든 샌드위치가 함께 놓여 있었다.
“엇, 이거…! 보셨어요?”
“네. 일부러 안 먹고 남겨 놨어요.”
“왜요.”
“아침에 같이 먹으려고요. 혼자 먹기 아깝더라고요.”
이지운이 배시시 웃으며 서태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샌드위치가 좀 잘나긴 했지…!
속으로는 자아도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커피 저도 해 볼래요.”
“뜨겁습니다.”
“뜨거운 거 잘 만져요. 으아악!”
수증기가 새어 나가 이지운의 손가락을 스쳤다.
“찬물에 식혀요, 어서.”
“아이고… 네.”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을 찬물에 담그고, 아예 얼음을 가져와 싱크대에 부었다. 손끝 조금 데인 것을 가지고 왜 이렇게 유난을 떨까 싶기도 했지만, 이지운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날 잘 챙겨 주네. 역시 태천C는 날 많이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말은 안 해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