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튿날, 이지운은 아주 개운하게 기상했다. 머리는 맑았으며 손발은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따뜻했다. 만성 저혈압 환자답지 않게 아주 기운찬 컨디션에, 그는 역시 한약이 몸에 잘 받는다고 생각했다.
“아, 좋다.”
기지개를 활짝 켜며 몸을 일으켰는데 서태천이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먼저 나간 듯했다.
어젯밤에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이야기도 별로 못했네. 어차피 뻘쭘하고 어색해서 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새삼 루프탑에서 키스한 것도, 현관에서 잡아먹힐 뻔한 일도, 인형 놀이를 하다 들킨 것도 부끄러웠다.
어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으으, 창피해.
이지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씻었다. 거실로 나와 보니 식탁 위에 인형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바로 간밤에 물의를 일으킨 노란색 그리고 파란색 숙려둥이 인형들이었다. 정다운 한 쌍처럼 찰싹 붙어 있는 모습이 이지운의 눈에는 썩 보기 좋았다.
식탁 정중앙에는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가 보였다. 접시에는 숙려둥이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서태천이 휘갈겨 쓴 메모였다.
회의가 있어서 안 깨우고 먼저 나갑니다.
입맛 없어도 챙겨 먹고 나와요.
“나 먹으라고? 어쩜 이렇게 다정하냐…!”
이지운은 크게 감동했다. 햄과 으깬 감자를 넣은 샌드위치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서태천이 새벽같이 일어나 빵을 썰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맛있어!”
워낙에 살아생전 입맛이 없던 적이 없는 이지운이었다. 맨밥에 물만 말아 먹어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데 심지어 이 샌드위치는 맛있기까지 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내 팔자가 상팔자다.
이지운은 실실 쪼개며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먹었다. 접시는 순식간에 싹 비어 갓 설거지한 것처럼 깨끗해졌다.
***
출근해 보니 회사 분위기는 오늘따라 흉흉했다. 인사 팀장과 마케팅 1부 부장, 2부 부장이 정신 사납게 복도를 누비며 회의실로 들어갔다가 본부장실로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이지운과 민혜경 대리, 그리고 나머지 과장들은 조용히 숨죽이고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와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한 직원이 탄식하는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인사 발령 떴네요. 팀장님 해임이에요.”
이지운은 민혜경 대리와 눈빛을 교환하고 빠르게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인사 및 전보 알림 게시판을 클릭하자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게시물이 하나 보였다. 마케팅 1팀장을 사내 내규 위반으로 해임한다는 내용과 함께 새로 올 팀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규 임명: 마케팅본부 1팀장 송호종>
“송호종 팀장님? 처음 듣는데… 어디서 오시는 거지…?”
“나 이분 알아요. 용인 리조트 회계팀에 있을 때 같이 있었거든.”
신입 직원에 속하는 이지운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민 대리는 새 팀장과 구면인 모양이었다.
“어? 대리님, 새 팀장님하고 아세요?”
“응. 젊은 분이에요.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삼십 대 중반도 안 됐을 거예요.”
“아… 젊은데 빨리 승진하셨구나. 성격은 혹시 어떠세요?”
“뭐랄까, 음… 다정 느끼?”
“네?”
“친절하고 엄청 자상하시거든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말도 많으시고. 음, 기존의 꼰대 아저씨 상사하고는 느낌이 확 다를 거예요.”
그런 팀장도 있구나. 전혀 색다른 스타일로 바뀌는 거니까 나도 적응 잘해야겠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대리님.”
“고맙기는. 근데 지운 주임님 핸드폰이 너무 격렬하게 우는데…?”
민 대리가 이지운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전화가 온 것은 아니었고 매우 격한 진동이 징징징! 왕왕왕! 짖고 있었다.
어. 뭐지… 저렇게 격렬하게 울리는 알람이라면 설마 숙려 앱?
화면을 건드려보니 역시나였다. 숙려둥이가 팝핀 댄스와 크럼프를 추며 전신을 요란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무척이나 급하며 반드시 확인을 요하는 알람이 왔다는 의미였다.
<긴급긴급! 최종 심사 결과, 이번 달 점수 미달입니다. 숙려 기간이 자동으로 한 달 연장됩니다. 담당 숙려 감독관과 상의하세요!>
“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스팸 문자예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숙려 절차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거지? 철회 신청 같은 걸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지운은 며칠 동안 숙려 일지도 쓰지 않았고, 앱에 접속하지도 않았다. 아마 짐작건대 서태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담당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얘네 숙려 제대로 안 하고 있네. 벌로 1달 연장 때려.’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쩐다. 태천C한테 이야길 꺼내 봐야겠네. 당연히 그 사람도 나처럼 철회하고 싶겠지? 내가 그렇듯 말이야.
참, 사람 일이란 건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 혼인 신고 사실을 알게 됐을 때만 해도 ‘반드시 이혼해 주겠어!’, ‘당장 이혼하고 싶어!’ 하며 난리를 쳤는데… 문자 그대로 성공적인 이혼을 위해 억지 신혼을 시작했건만, 정신 차려 보니 식장을 알아보고 있다. 결혼 전에 사귀어 보자며 달콤하게 연애도 시작했다.
전후 관계가 좀 심하게 뒤바뀌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지운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저렇게 멋지고, 잘나고, 자상한 알파를 만난단 말인가. 물론 처음에는 로봇이 아닌가 의심을 많이 했지만 가까이 지내보니 제법 인간미가 있다. 키스도 잘하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 태천C는 언제부터 나랑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걸까? 검은 가운 매니아가 내 말 한마디에 가운 색을 회색으로 바꾼 걸 보면 그때부터 날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러브 빌리지 때 이미 날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네.
이지운은 아직 서태천의 마음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서태천이 지독하게도 말수가 적은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프로포즈 제대로 받은 거 맞지, 나? 너무 심플하게 결혼합시다. 바로 하기 그러면 연애부터 하죠. 이렇게 치고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은데… 흠.
이지운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며 손에 쥔 볼펜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오늘 아침. 뭐 쓸 만한 것 없나 싶어 숙려둥이 굿즈 박스를 뒤지다가 그나마 건진 게 숙려둥이 대가리가 달린 볼펜이었다. 필기감도 좋고 나름 귀여워서, 이지운은 그것을 냉큼 집어 와 쓰는 중이었다.
갸우뚱갸우뚱. 이지운이 고민하는 박자에 맞추어 숙려둥이의 대가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대로 그냥 달달하게 사귀다가 결혼하는 건가? 음… 나쁘지 않은 흐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중요한 조각이 하나 빠진 기분인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조금 더 연애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잘 알아챌 수 있었을까, 모르겠네.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행복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지운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찜찜했다. 뭔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이 결혼에 좋은 점이 있다면 혼인 신고를 굳이 안 해도 이미 되어 있다는 거야. 또, 우리의 사랑이 한참 전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특별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아닐까. 한때는 날 분노에 불타게 했던 사실이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니, 나도 제대로 맛이 가 버렸나 보다.
아, 그러면 전에 혼인 기록 소멸 가처분이랑 혼인 무효 소송 건 상담해 주셨던 변호사님한테도 말씀드려야겠네. 태천C 고문 변호사님이시라고 했었지….
좋아. 일단 태천C 회의 끝나면 숙려 건 어떻게 철회할 건지 말해 보자.
이지운이 혼자서 열심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 주임님, 나 볼펜 잠깐만 빌려 줘.”
민 대리가 이지운의 손을 톡톡 쳤다.
“아. 네. 쓰세요.”
그녀는 통화하면서 볼펜으로 메모를 하더니, 이지운에게 펜을 돌려주기 전 숙려둥이의 대가리를 쳐다봤다.
“이 캐릭터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데. 되게 희한하게 생겼다.”
아차차! 숙려둥이 볼펜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반인이 숙려둥이 볼펜을 갖고 있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로 비칠 수 있었다.
“이, 이름이요? 모르겠는데요. 그냥 아무거나 산 건데.”
“되게 귀여워서. 얼굴이 쑥빛이네.”
숙려둥이는 얼굴이 ‘쑥’빛이라 숙려둥이었다. 공무원들의 끔찍한 작명 실력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였다.
“아… 그, 그런가요. 하하. 그거 잘 안 나오는데. 이걸로 쓰세요, 대리님!”
이지운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에서 숙려둥이 볼펜을 빼앗고 대신 다른 볼펜을 쥐여 주었다.
“자세히 좀 보자. 나도 따라 사려고 그래.”
“아니에요. 이거 되게 구려요. 필기감 쓰레기 같아요.”
“응? 글씨 깨끗하게 잘 써지던데…?”
민 대리가 자꾸만 볼펜에 관심을 보였다. 이지운은 그녀가 다시 한번 숙려둥이의 이목구비를 볼까 겁이 나 볼펜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제가 좋은 거 사 드릴게요! 예쁘고 좋은 게 요새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지운이 눈웃음을 지었다. 속으로는 어서 서태천의 바쁨이 가라앉고 차분히 숙려 철회를 논할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