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6시가 언제 오나 하염없이 시계만 바라보며, 이지운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5시부터는 시곗바늘이 하도 더디게 움직여 혹시 시간이 멈춘 건 아닌가 강하게 의심하기도 했다.
5시 40분부터는 1분이 1시간 같았다.
“으으….”
“왜 그래, 지운 주임? 몸살이라도 났어?”
“아니에요. 민 대리님.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하긴. 오늘 목요일이니까 피곤하긴 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팀 감사 때문에 이번 주 내내 시달리긴 했잖아.”
팀장 감사 건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마 중징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번 주 내로 결판이 날 테니 빠르면 내일인 금요일이나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에 해임 공지가 나지 않겠냐는 것이 사내 여론이었다.
조만간 팀장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뒷맛이 썼지만, 차라리 이쯤에서 그의 비리 행적을 멈추고 클린한 분위기로 환기하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이지운은 생각했다.
“주임님, 6시다.”
“헉. 죄송한데 저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지금 나갈 건데 같이 엘리베이터 타자.”
민 대리가 가방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그녀 역시 지하 주차장, 그것도 서태천 근처 블록에 차를 댄다는 것을 잘 아는 이지운은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아니에요. 저 계단으로 내려갈 거예요.”
“…여기 19층인데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간다고?”
“네. 건강을 위해서 계단으로 다니기로 했어요.”
“내려가는 건 무릎 관절에 치명적이라던데, 그러지 말고 엘리베이터 타요.”
“아닙니다. 내려가는 운동도 열심히 해야죠! 나약한 관절에 긴장감을 줘 보려고요.”
이지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헛소리를 하며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비상구로 들어가 아래로 쭉쭉 뻗은 계단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하… 잘못하면 대리님하고 마주칠 테니까 그냥 천천히 내려가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무릎 관절을 혹사시키며 까마득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무릎에서 까드득 와드득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헉… 헉.”
이지운이 지하 2층까지 내려왔을 때, 그는 기진맥진해서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민 대리의 차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서태천의 차를 찾았다. 서류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숙인 뒤 후다닥 달려가 조수석에 날듯이 탔다.
“늦어서 죄송해요.”
서태천은 땀에 흠뻑 젖은 이지운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얼굴이….”
“아, 저 걸어서 내려왔어요.”
“이런. 어쩌다가요.”
“팀 동료한테 들킬까 봐… 그분도 여기 지하에 차 대시거든요.”
“말하지 그랬어요. 천천히 내려와도 되는데.”
“태천 씨랑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
여기까지 말한 이지운이 말을 꿀꺽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 건 너무 직설적이었지 않나 싶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이지운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서태천은 픽 웃고 말았다.
“그랬군요. 얼굴에 땀을 많이 흘렸어요. 닦고 가죠.”
서태천이 조수석 앞 글러브 박스로 손을 뻗어 물티슈와 손수건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셀프로 닦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앗.”
서태천이 직접 티슈를 꺼내 이지운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지운은 놀람과 함께 짜릿함을 느꼈다.
으아, 얼굴이 막 불타는 것 같아.
“가만히.”
“…네.”
서태천의 손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고 손끝을 따라 높은 체온이 전달됐다. 이지운은 아까 19층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올 때보다 지금이 더 벅찼다.
“땀은 지워진 것 같네요. 그럼 손수건으로 닦겠습니다.”
“아, 네.”
향수를 뿌린 건지 아니면 체향인 건지, 평소 서태천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이 깔린 손수건이 얼굴에 닿았다. 이지운은 숨을 멈췄다가 어설프게 호흡하기를 반복했다.
“긴장할 것 없어요.”
“네? 아니… 네.”
겨우 얼굴을 닦아 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지. 아, 못 살겠다.
“그럼 가죠.”
서태천의 손수건이 멀어졌다. 이지운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은 힘차게 나댔다.
***
차로 30여 분쯤 달렸을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한강 변에 위치한 루프탑 레스토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서태천과 이지운을 2층으로 안내했다.
“와, 여기 너무 좋아요.”
“맘에 듭니까?”
“네. 완전 멋있는데요.”
“다행이군요. 어딜 좋아하는지 아직은 취향을 잘 몰라서요.”
“전 음식만 맛있으면 다 좋아해요.”
이지운은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 주는 서태천이 오늘따라 더 근사해 보였다. 평소에도 멋지기는 했지만, 사귀는 사이가 되어서 그런가? 행동 하나, 말 하나하나가 다 멋져 보였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네? 아니에요. 한강 쳐다봤어요.”
자기만 열띠게 서태천을 바라보는 것 같아, 이지운은 저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 다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서태천이 테이블 위에 있던 이지운의 손을 잡았다.
헉. 이지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태, 태천 씨….”
“한집안에 살면서도 얼굴을 통 못 봐서, 오늘은 꼭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눈을 부드럽게 응시하는 서태천 때문에, 이지운은 조금씩 맥박이 상승했다.
“전채입니다. 스프와 함께 드시면 됩니다.”
그때 갑자기 웨이터가 트레이를 들고 나타나 테이블에 음식을 깔았다. 하지만 서태천은 얽은 손을 풀어 주지 않았다.
“저, 밥을 먹으려면… 손을 놔주셔야.”
이지운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놔주기 싫은데 어떡하죠.”
“예?”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나가서, 이지운은 웨이터 보기가 창피했다. 하지만 웨이터는 프로인지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세팅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래도 지운 씨가 배고픈 건 싫으니까 놔주죠.”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막상 온기가 사라지자 조금은 아쉬운 이지운이었다.
“그럼 많이 먹어요.”
“네… 안 그래도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사실 눈앞에 있는 게 돌인지 프렌치 요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지만, 이지운은 특유의 먹성을 발휘해 무화과를 이용해 만든 전채를 팍팍 먹어 치웠다.
“맛있어요.”
“입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저, 그런데요. 본부장… 아니 태천 씨.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런 자리에서 회사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워낙 궁금해서요.”
“뭡니까.”
“그… 팀장님 건이요….”
이지운이 살짝 서태천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거라면 잘 처리되었습니다.”
“처리되었다니요?”
“해고될 겁니다. 곧 최종 보고서 나오고 사내 공고문도 게재할 거고요. 그동안 뒤로 빼돌린 게 상당하더군요. 민사도 민사지만, 형사 고발도 같이 진행할 겁니다.”
생각보다 큰 건이었구나. 형사 고발이란 단어에 이지운은 솔직히 말해 놀랐다.
“그런데 어쩌다가 조사하게 된 건가요? 익명 제보라도 있었나요?”
서태천이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선을 넘는 걸 싫어합니다. 내 것을 건드리는 건 더 싫어하고요.”
그러면서 이지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지운은 설마,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 상황에서 저 사람이 내 것이라고 칭할 만한 건… 회사? 아니면 혹시 나?!
“설마 창립기념일 현수막 건… 때문에 시작된 일은 아니시죠?”
“맞습니다.”
“네?”
“이지운 씨 때문이라고 하면 부담스럽겠죠. 하지만 계기는 그게 맞습니다. 지운 씨한테 막말을 퍼붓는 그 인간을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
“그래서 정황을 조사해 보니 친척이 운영하는 업체에서 수년간 엉망진창인 홍보 물품을 만들어 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원칙대로라면 가격 경쟁력이 있으면서도 퀄리티가 좋은 업체가 선정돼야 하니 그 업체는 진작 도태되었어야 하는데 말이죠.”
“...네. 그렇죠.”
“뒤로는 비리를 저질러대면서 업체 잘못을 지운 씨에게 뒤집어씌우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우리 회사에 머무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지운은 서태천이 대단한 사람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철두철미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 혈통만 재벌 후계자인 게 아니라 머리가 좋아.
…하지만 더 마음에 와서 꽂힌 것은, 내 것이라는 단어다. 나 때문에 팀장을 털기 시작했다니…. 날 공격하는 팀장이 미웠구나.
이지운의 얼굴이 펑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내가 자기 거래, 이지운은 서태천 거….!
“얼굴이 왜 빨갛죠? 혹시 알레르기 있는 재료가 있었나요?”
서태천이 미간을 좁히며 이지운의 얼굴을 살피려 들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그렇다고 얼굴이 빨개지다니….”
“하하.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이지운은 급하게 대답하고 접시에 남은 채소와 소스를 박박 긁어먹었다.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요.”
“네네.”
젠틀하고 신사적인 사람이 이렇게 급발진하면서 훅 들어오면 제 심장이 남아나겠어요?!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