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런 우연이. 여기서 다 뵙네요.
-아.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오메가 3호와 바 안쪽 공간으로 향하던 서태천이 뒤를 돌아봤다. 이지운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 서태천이 불만 어린 표정을 내비쳤다. 그러다가 다시금 평상시의 매너 좋은 그로 돌아와 여자를 에스코트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고, 대강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민 대리도 별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이지운은 느낄 수 있었다.
태천C, 나랑 기 대리가 데이트하는 모습… 아니꼬워했구나! 질투했어.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이지운이 감격과 흥분에 겨워 있는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힐긋 액정을 보니 메시지 발신자가 ㅌㅊC였다.
어…? 지금 보낸 건가. 저 앞자리에서…?
이지운은 저 멀리 1열에 앉은 서태천의 뒷모습을 한번 쳐다보고, 살짝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자신이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버전의 숙려둥이 이모티콘이 도착해 있었다.
[나도 사랑해요, 여보.]
한쪽 눈을 찡긋하는 숙려둥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아아악! 서태천 너무 귀여워! 소리라고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숨소리만 거칠어졌다.
“이 주임, 괜찮아? 부끄러워서 그래?”
“아, 아니…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민 대리가 옆에서 이지운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쐈다.
***
상영이 끝나고 자리를 뜨는 직원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처럼 삼삼오오 수다를 떨어댔다.
“결국 알파 1호랑 오메가 1호는 최종 커플이 안 됐네.”
“아쉽다. 알파 1호도 오메가 1호한테 마음 있는 줄 알았는데… 속마음 인터뷰에서도 그때 누굴 좋아했는지 명확하게 안 나왔고.”
“데이트는 오메가 3호님이랑도 하고 1호님이랑도 했는데 결국은 다 안 이뤄졌네.”
이지운은 한 박자 늦게 일어나서 군중에 묻혀 나왔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본부장님은 나중에 누구랑 결혼하시려나.”
“그러니까. 아까 보니까 배려도 잘해 주고 데이트 매너도 좋던데, 난 결혼은 둘째치고 본부장님이랑 하루만 사귀어 봐도 소원이 없겠어.”
여직원이 구시렁거리며 터덜터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지운의 귀 끝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 주임.”
“네? 대리님.”
“흠… 최종 선택 원래 알파 1호님 하려던 거 아니야?”
“저, 저요? 아니에요! 전 진짜로 고를 사람이 없어서 선택 안 한 거예요. 하하.”
이지운이 뒷머리를 긁으며 둘러댔다.
“그래? 그런데 참 잘 어울리더라.”
“누가요?”
“주임님이랑 본부장님.”
“네? 에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지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맞아요. 우린 제법 잘 어울린답니다!
풋풋하고 달콤한 이지운의 심경과 달리,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팀장은 뭐 씹은 얼굴로 감사 위원회에 불려 다니느라 바빴고, 덕분에 업무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쌓여만 갔다.
나름대로 조용하던 회사 내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가끔 가다가 현수막 사건도 팀장과 연루되어 있는 거냐고 묻는 직원들이 있었지만 이지운은 말을 아꼈다.
감사가 본격화되면서 회사는 더욱 분주해졌다. 그 말은 곧 뭐냐, 서태천이 몹시도 바쁘단 뜻이었다.
기껏 사귀기로 하고 달달한 무드도 잡았는데, 그리고 러브 빌리지 시청을 통해서 그 역시 자신을 과거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힌트도 얻게 되었는데. 막상 서태천이 정신없이 바빠지는 바람에 연인 간에 할 법한 대화나 데이트스러운 만남을 가지질 못해 이지운은 애석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서태천은 이지운이 이미 잠든 새벽녘에 들어왔고, 이지운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출근해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지운의 옆자리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바쁜 사람 붙잡고 연애 놀음이나 하자고 할 수도 없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보고 싶고 같이 놀고 싶다. 한 집안, 한 회사 안에 있는데 이렇게 그리워만 해야 하다니 너무 속상해.
책상에 앉은 이지운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운 주임. 어디 안 좋아?”
“네?”
“표정이 안 좋네.”
고민에 빠진 이지운의 낯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민대리가 짐짓 신경을 써 주었다. 월요일에 출근할 때만 해도 기운찬 강아지처럼 날아다니던 지운이 오늘은 왜 또 축 처져 있는 건지.
“아니에요. 그냥 좀… 기운이 없어서.”
“우리 오랜만에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
“그럴까요?”
부장과 팀장은 아침나절부터 쭉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나갔다 와도 괜찮을 듯싶었다.
“좋아요. 잠깐 나갔다 와요, 대리님.”
이지운과 민 대리는 옥상 카페테리아로 향해 커피를 한 잔씩 시키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지운 주임, 뭐 고민이라도 있어?”
민대리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지운은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민 대리라면 기존에 말을 터놓은 부분이 있으니 고민 상담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저…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 기억나세요?”
“아, 그! 내가 저번에 조언해 줬던 친구 아니야? 애매한 관계에 처해 있어서 고민이 크다던.”
“네. 맞아요.”
“무슨 일 있대?”
민 대리가 슬쩍 몸을 앞으로 굽히며 경청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실은 그 둘이 그때 외딴섬에서 결실을 맺지는 못했는데….”
“어. 맞아 그랬지.”
“근데 사귀…기로 했대요.”
“헐!”
민 대리는 급하게 사레가 들려 가슴을 팡팡 쳤다. 듣던 중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자신의 가설에 의하면 지금 서태천 본부장과 이지운 주임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100%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자신과 김민지 비서 간에 공유된 정보에 의하면 이지운이 말하는 상대는 분명 서태천이 틀림없었다.
엊그제 러브 빌리지 영상을 봤을 때도 확실히 이지운과 서태천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지운이 서태천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고 선택하기도 했고, 서태천은 스페셜 데이트권을 이지운에게 썼다. 나름 오붓하고 정답게 데이트도 하더니만, 역시는 역시였다.
“대리님, 닦으세요.”
이지운이 화들짝 놀라 티슈를 내밀었다. 민 대리는 입가를 적신 커피를 닦아 내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우연히 사레가 들렸어. 하던 이야기 계속해 봐요.”
“네. 그런데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고민이 생겼대요.”
“무슨 고민…?”
“그게… 사귀는 사이에 할 법한 일 있잖아요. 같이 좋은 데 가서 밥을 먹는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사귀는 거 맞나? 싶어서 고민이 된대요.”
이야기를 듣던 민혜경 대리가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수긍의 눈빛을 보냈다.
당연하지. 회사가 이렇게 바쁜데 본부장님이 데이트할 시간을 빼기란 힘들겠지.
“그 사람이 많이, 그러니까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연애 상대가 많이 바빠서 이해는 한대요. 그렇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멀게만 지내니까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 주임, 내 조언 좀 전달해 줘.”
민 대리가 남은 커피를 시원하게 원샷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회란 만들어 가는 거야.”
“만들어 가는 거라고요?”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어서 알아.”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띠었다.
“가까워질 기회…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그냥 덮쳐. 과감하게.”
“컥.”
이번에는 이지운이 사레들렸다.
“그, 그건 어렵대요.”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날 잡고 덮치라고 해. 잊지 마. 연애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적극성이야.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어.”
“그렇군요.”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혹시 내가 너무 수동적인 자세로 있었던 건 아닌가, 이지운은 반성하게 됐다.
오후 업무 시간. 이지운은 일을 하는 중간중간 서태천과 관계를 개선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 내 선에서 태천C를 배려하면서 최대한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도 하고, 바쁜 일 끝나면 놀자고 미끼도 던져 보는 거야. 최대한 능동적으로 임해 보자고.
이지운이 야심차게 결심을 하며 보고서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핸드폰 메신저가 울렸다.
ㅌㅊC
오늘은 제시간에 끝날 것 같습니다.
으아! 제시간에 끝난다고? 이게 얼마 만이야. 이지운은 너무 기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저도요!
ㅌㅊC
뭐 먹고 싶은 것 없습니까?
그러자 또 서태천이 칼답을 했다.
어, 먹고 싶은 거라니…? 혹시 데이트인가?!
전 뭐든지 좋아요♥
이지운은 문장 끝에 조심스럽게 까만 하트를 붙여 보았다. 두근거리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자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트를 보고 서태천이 조금이라도 웃어 주었으면 하는 게 이지운의 바람이었다.
ㅌㅊC
그럼 프렌치 코스 갔다가 칵테일 괜찮습니까?
안 될 리가요! 너무 좋죠.
이지운의 얼굴이 싱싱하게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