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같은 시각, 본부장 비서실 소속인 김민지는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본부장실 바깥으로 잠시 나와 소파에 앉아 있던 서태천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뜬금없이 팍 웃었다.
깜짝이야. 본부장님이 왜 저러시지?
항상 무뚝뚝하고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보이는 완벽한 상사. 냉철하고 철두철미해 다가가기 힘든 이미지의 본부장 서태천. 그의 표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환하고 즐거워 보였다.
웃었다가, 심각해졌다가, 그러다가 다시 피식거렸다가. 조그마한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재미있는 흥밋거리를 지켜보는 사람 같았다.
저렇게 풍부한 표정을 지으실 줄도 아시는구나.
아예 주먹으로 입을 막고 쿡쿡거리는 서태천을 보며, 김민지는 속으로 당황하기까지 했다.
“김 비서.”
“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서태천이 고개를 들어 김민지를 쳐다봤다.
“아, 네. 본부장님. 여쭈십시오.”
“보통 이모티콘이라는 거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는 것 말고… 좀 특별한 것, 그러니까 공공기관 캐릭터를 응용한 이모티콘은 어디서 구합니까?”
“공공기관 캐릭터 이모티콘이요? 어떤 건지 혹시 보여 주실 수 있으세요?”
김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태천의 옆으로 가려 하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아, 보여 줄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흠… 보통 그 기관 홍보용 SNS에 들어가면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아요. 지자체 캐릭터나 공공기관 캐릭터는 보통 다 무료 배포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한 서태천은 여지껏 김 비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뒤돌아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뭐야. 웬 이모티콘? 그런 거 보고 웃을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김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여러분! 지금 20층 대강당으로 모여 주세요. 필수 인력 빼고 다 올라와 달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습니다.”
각 팀 서무들이 파티션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며 공지 사항을 뿌렸다.
“아, 맞네. 오늘 이 주임 나오는 그거 틀어 주는 날 아니야.”
민혜경 대리가 이지운의 어깨를 톡톡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지운은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네… 러브 빌리지요.”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 직원끼리 연애 리얼리티를 찍다니, 아 진짜 살다 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그렇…죠. 재미있죠.”
오늘은 <러브 빌리지>의 편집이 완료되어 전 직원이 함께 컨텐츠를 시청하는 날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출연진의 한 명으로서 이지운은 러브 빌리지에서 너무 감정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기본적으로 회사 사람들에게 사적인 모습을 노출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보러 가기 싫다는 마음까지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출연진이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궁금증도 일었다.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본부장이 자신을 날 바라보는 눈빛이 어땠는지. 그가 오메가 3호님과 있을 때의 표정은 과연 어땠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설마 나 본부장 좋아하는 거 티 나게 찍힌 건 아니겠지. 막 심장 울렁거려서 수영장 못 들어가겠다고 쥐 난 척 연기하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영상으로 보면 적나라하게 티 나는 것 아니야?
서태천과 프라이빗 데이트할 때 얼빠진 표정을 짓진 않았을까 걱정도 됐고, 또 그가 다른 오메가와 데이트하는 장면도 함께 나올 거라 생각하니 열이 받기도 했다. 기현진 대리의 처절한 록발라드와 고백 또한 골칫거리였다.
“끙….”
“뭐해? 얼른 올라가자. 좋은 자리 맡으려면 빨리 가야 돼.”
민 대리가 이지운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이지운은 그녀와 함께 20층으로 올라가 대강당으로 입장했다. 직원들은 마치 영화라도 보러 온 듯 신이 나서 삼삼오오 극장식 좌석에 앉아 있었다.
“대리님. 저희 구석에 앉아요.”
“저기 앞줄에 자리 있는데, 왜?”
“저기는 좀… 본부장님도 계시고.”
“아… 맞네.”
1열에는 서태천과 김민지 비서가 떡하니 앉아 있었다. 서태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이모티콘 실수가 생각나 쪽이 팔렸다.
그나저나 왜 답장을 안 해 주는 거야….
부끄럽기도 하고 살짝은 삐진 마음도 있었다. 또한 러브 빌리지를 보는 내내 얼빠진 제 모습을 들킬 것 같아, 이지운은 민 대리를 데리고 구석진 뒷자리로 향해 자리를 잡았다.
“이제 상영 시작합니다. 사내 커플 매칭 프로젝트 <러브 빌리지>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재미있겠다.”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며 박수를 쳤다. 곧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에 <러브 빌리지 in JEJU>라는 자막이 떴다. 이지운은 침을 꼴깍 삼키고 화면에 눈을 고정시켰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훨훨 버리고-
아련한 제주 노래와 함께 푸른 바다가 화면에 떠올랐다. 출연진들의 실루엣이 슬로우 모션 처리되어 신비롭게 스크린을 채웠다.
“PD님 연출 실력 대박이야.”
“아름답다.”
“저렇게 잘생긴 직원이 있었나?”
“오메가인가 봐. 오메가 1호라고 명찰 달았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이지운의 모습에 좌중이 감탄했다. 이지운은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두려워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알파 1호 명찰을 단 서태천의 자기소개 장면이 뜨자 장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헉, 멋있다.”
“본부장님 슈트 핏 좀 봐.”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갑자기 합류한 거라며.”
“어. 그렇다고 하더라. 혹시 본부장님 최종 커플 됐는지 안 됐는지 알아?”
“스포는 못 들었어. 만약에 최종 커플 됐으면 대박인데? 우리 사내에 신데렐라가 생기는 거잖아.”
와… 근사하다.
이지운 역시 화면 속 서태천이 유난히 멋있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가 얼마나 빛이 나고, 또 반가웠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운 주임,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
“네?”
“농담이야. 입을 하도 크게 벌리고 있어 가지고.”
민혜경 대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지운은 혹시 제 얼굴이 달아오르진 않았는지 걱정하며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굵직한 폰트의 자막과 함께 이지운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뭐, 뭐야.”
놀라서 입을 틀어막는데 PD와 나누는 대화가 날 것으로 송출되었다.
-첫인상이 가장 좋은 분은 누구였나요?
-알파 1호님입니다.
“어머. 이 주임, 본부장님한테 투표했네?”
민 대리가 즐겁다는 듯 깔깔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아….”
“저 중에 제일 낫긴 하지. 나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상대긴 한데… 이 주임이 저런 스타일 좋아하는지는 몰랐어서!”
바로 속마음을 들켜 버렸네. 이지운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데이트 씬, 위험천만한 알파인 코스터를 타는 장면, 해변가를 따라 걷는 모습을 보며 이지운은 추억에 잠겼다.
“본부장님하고 분위기 좋았구나?”
“아, 아니에요.”
“정말 아니야?”
“네. 저 최종에서 아무도 선택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사람이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건 나였을까? 저 때도… 나에게 마음이 있었을까? 나더러 결혼하자, 연애하자 하는 걸 보면 태천C도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 러브 빌리지 때도 나에게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너무 궁금해.
이지운은 모르는 게 많았다. 서태천으로부터 연애하자는 말을 들은 지 불과 이틀이 지났을 뿐이고, 아직까지 ‘왜, 언제부터, 어째서’ 자신을 진짜 배우자로 낙점했는지 알지 못했다. 자세히 물을 경황도 없었고 또 좀 쑥스럽기도 해서.
사귀고 결혼하잔 말을 들었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어련히 나중 가면 해 주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지운은 일단 궁금했다. 서태천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대하는 태도가 과연 어떠한지 이 영상은 굉장히 소중한 시청각 증거가 될 예정이었다.
…영상을 조금 더 보다 보면 힌트가 나오겠지?
“기 대리가 주임님한테 들이댔었네? 아이씨, 저게 뭐야.”
영상이 휙휙 지나가 기 대리의 처절한 발라드 신이 나오자 민혜경 대리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황급하게 눈을 가렸다.
“네. 그런 일이… 있었죠.”
“으아, 내가 다 창피해.”
민 대리가 끙끙거렸다. 그러는 와중에 영상은 카드 찾기로 커플을 랜덤 매칭하는 대목에 이르렀다.
맞아. 저 데이트 때, 태천C는 오메가 3호님하고 짝이 되었었지… 너무 질투 나고 마음 아팠어.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화면은 이내 오메가 3호와 함께 바로 입장하는 서태천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