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내에 돌던 가십은 사실이었다. 회사 호텔의 럭셔리 웨딩홀의 빈 날짜를 알아보고 있다던 말은, 이렇듯 진실이었다. 지금 이렇게 주말에 시간을 내 멀리 와서 하객의 입맛까지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러면 외간 오메가랑 결혼할 생각이었던 거야? 나랑 숙려 기간이 끝나는 봄에 맞춰서…! 그럼 난 뭔데. 같이 식장 투어나 돌아주는 호구 등신?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지운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다니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봐요!”
이지운이 목이 메인 채로 물어봤다.
“결혼 누구랑 하시는 건데요!”
그가 삿대질을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용기 있는 척, 화가 나는 척했지만 사실 이지운은 서태천의 대답이 너무나 두려웠다.
대체 누굴까. 러브 빌리지를 뒤집어 놓았던 미모의 오메가 3호? 아니면 한때 사내 루머로 돌았던 모 물산의 귀한 고명딸? 그것도 아니면 뭐… 언제 시간을 내서 제3자랑 사귀었나?
아이고, 이 망할 인생. 사랑을 깨닫자마자 차이는 신세가 되다니. 어쩐지 여행 가서 덮치려는데 체하질 않나, 맨날 흉한 꼴만 보이고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다. 흑흑, 변변하게 대시 한 번 못해 보고 이대로 끝이구나.
“어서 말해요!”
이지운이 울먹거리며 다시 외쳤다. 그런데 서태천의 표정이 좀 묘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이없음에 가까운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뭐예요, 그 표정은.”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없긴! 서류상으로는 유부남이면서, 응? 감히 외간 오메가랑 결혼하려고 들다니, 당신이 더 어이없지!”
기왕 이렇게 된 것 시원하게 삿대질이나 하자 싶어, 이지운은 쩌렁쩌렁 소리를 쳤다. 오메가 순정을 짓밟아 놓고 네가 잘살 것 같으냐? 흥분한 이지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외간 오메가랑 결혼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식장 알아보고 있잖아요! 본부장님 결혼하려고요.”
자칫하면 눈물이라도 쏟아지지 않을까. 이지운이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이었다. 서태천이 미간을 좁히더니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 주임. 설마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네! 당연하죠. 누구예요, 빨리 말해요.”
서태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무언가를 목격한 표정이었다.
“누구라니요, 내가 이지운 주임 말고 누구랑 결혼하겠습니까.”
쿵. 이지운은 누가 커다란 해머로 제 머리를 내리치는 착각에 빠졌다. 골 때리는 기분이란 게 이건가 싶었다.
“네? 뭐라고요?”
이지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죠?”
“당신이랑 결혼한다고 했습니다.”
“네? 저요?”
하도 당황한 나머지 이지운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는 바람에 테이블 시트를 밟아 뒤로 크게 팔을 저으며 자빠질 위기에 처했다.
“어어…!”
이대로 흉하게 넘어지는가 싶은 순간, 이지운을 받치는 단단한 팔뚝이 있었다. 서태천이 뛰어와서 이지운의 허리를 받쳐 준 것이다.
“괜찮습니까?”
서태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지운을 내려다보았다.
“괘, 괜찮… 아니, 괜찮지 않….”
이지운은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폭주 기관차처럼 쿵쾅거리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그는 방금 자신이 서태천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는 건 아닐까? 아예 지금 이 상황이 꿈속인 건 아닐까?
“저기… 방금 하신 말씀요….”
“어떤 말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 결, 결….”
“아. 결혼 말이군요.”
“우리 진짜 그거 해요?”
이지운이 서태천을 올려다보며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일단은 내년 봄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시기는 조정 가능합니다. 이 주임이 원하는 때가 따로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꽥!”
이지운이 냅다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왜 그래요!”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본부장님이랑 나랑 결혼을!”
이지운이 파닥거리며 서태천을 밀어 냈다. 자리에 털썩 앉아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신 다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를 보며 서태천이 물었다.
“설마 싫습니까? 내가 내 감정을 강요한 건가요.”
“아뇨!”
이지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아무리 소심하고 땅굴을 잘 파는 그였지만, 지금 싫다고 말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싫지 않아요! 절대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어… 문제라기보다는 너무 갑작스럽… 네. 갑작스럽네요.”
“갑작스럽다라. 우린 이미 혼인 관계이지 않습니까.”
서태천이 팔짱을 끼고 불만 어린 눈으로 이지운을 쳐다봤다.
“아니, 그거는 행정 착오로 인한 거잖아요. 좀 다르죠.”
“그래서 이 주임은 결혼이 싫다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 주시고요!”
아무리 대화를 해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결혼이 싫기는 개뿔, 좋아서 숙려둥이 파워 댄스라도 추고 싶은 게 이지운의 심경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또 법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상식인 이지운으로서는 서태천의 막무가내 청혼을 받아들이기 벅찼다.
정신 차리자! 나라도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해.
이지운은 잔에 남은 물을 모조리 원샷 때린 후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결혼에 앞서 이런저런 절차가 있지 않냐는 말이에요.”
“이런저런 절차가 뭡니까?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연애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 결혼하는 게 보통이지 않냐는 거죠.”
“잘 모르다니, 분명히 알파를 한 트럭 사귀어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태천이 이지운 앞으로 자기 몫의 물을 건네며 피식 웃었다. 네 얕은수를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헉, 맞다. 나 그렇게 말했었지.
이지운은 과거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으나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아, 아니,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결혼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절차가 빠졌단 거예요.”
이지운이 자신감 있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주장이라 스스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흠….”
서태천은 손으로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이지운은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길게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서태천이 곧바로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연애부터 합시다.”
“네?”
“나랑 연애, 어때요.”
서태천이 그렇게 말하며 이지운의 손등을 덮었다. 이지운은 당황과 놀람,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 입술만 달싹였다. 얼굴에 홍조가 오르다 못해 혈관에 피가 쏠려 펑!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나랑 연애 어떠냐고? 서태천과 연애할 거냐고? 우리 이미 결혼했는데 이제부터 연애하는 건가. 이른바 선결혼 후연애, 그런 건가. 아니…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까지랑 상황이 달라지는 건가. 연애를 해 봤어야 알지.
하지만 연애 경험이 없다 한들, 간접적인 체험과 학습은 영화와 책을 통해 많이 해 보았다. 또 친구와 동료의 연애 상담을 통해 ‘사랑’이 무엇이고 ‘연애’란 어떤 것인지 대충 알고도 있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장밋빛 필터로 바라보는 것, 그게 바로 연애 아니던가. 이제 이지운은 서태천의 손을 잡고 입술을 겹칠 수 있고, 좋아한다는 말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서태천이 이지운의 입술을 찾는 일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 외딴섬에서처럼 자신을 뜨겁게 껴안아 줄 것이고, 다정함을 퍼부어 줄 것이다.
내가… 내가 본부장님과 그런 사이가 된다니.
이지운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엉켜 사고가 정지되었다. 몸은 뻣뻣하게 굳어 돌이 되어, 예스고 나발이고 대답을 똑바로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서태천은 멍하니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이지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난 연애랑은 담을 쌓고 살아와서 이런 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주임 말이 맞겠죠. 해 봅시다, 연애.”
말로는 연애를 잘 모른다고 해 놓고는 커다랗고 단단한 손으로 이지운의 손등을 꾹 쥐는 서태천은, 전혀 서툴지 않았다. 오히려 고단수의 향기가 난다면 조금 과장일까. 이지운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지운 씨, 대답.”
“...네.”
당연히 네! 네! 네네! 왜 안 해, 미쳤다고 안 하겠어?
이지운이 미친 듯이 끄덕였다. 서태천이 언젠가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지운의 손을 더욱 강하게 그러쥐었다. 완벽할 정도로 황홀한 미소였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지 몇 달이 흐르고서야,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착오로 시작된 매칭이 이제는 능동적인 길을 찾아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