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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38화 (38/100)

38화

다음 날 아침, 이지운이 눈을 떴을 때 그는 혼자였다.

으음… BBG 어디 갔어. 벌써 일어났나?

침실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서태천이 보이지 않길래, 이지운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욕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서태천은 언제 일어나 준비했는지 잘 다린 셔츠 차림에 포마드 헤어를 완벽하게 세팅한 채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네. 오늘 중으로 둘러보려고 합니다. 예, 결과 말씀드릴게요.”

이지운은 잠결이라 비몽사몽상태였다. 눈도 다 못 뜬 채로 비틀거리자, 전화를 끊은 서태천이 이지운을 쳐다봤다.

“일어났습니까?”

“네… 누구랑 통화하셨어요?”

평소의 이지운이라면 본부장이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굳이 캐묻지 않겠지만, 잠결이라 정신이 없어 그만 묻고 말았다. 그런데 서태천은 흔쾌히 대답했다.

“아버지랑 잠깐 통화했습니다.”

“회장님이요?”

“네. 보고드릴 게 좀 있어서.”

“그렇구나.”

이지운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자, 서태천이 이지운의 옆으로 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씻고 나와요. 아침 먹고 출발합시다.”

손길이 제법 다정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병일까? 이지운은 젠틀하게 제 어깨를 감싸는 서태천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네. 얼른 나올게요.”

욕실로 들어간 이지운은 거울을 바라보며 지난밤을 회상했다. 간밤에 어깨 주물럭거리고 아주 좋았지. 아침까지 그러고 잤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았다! 회색 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그 꽉 찬 근육, 엄청 단단하더군.

오늘따라 바디샤워 향이 상쾌하다고 느끼며, 이지운은 룰루랄라 노래까지 부르며 몸을 씻었다.

욕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핸드폰을 열어 숙려 앱을 점검했다. 매일 자정을 기해 점수가 업데이트되었기 때문에, 어제 변동 사항이 있었다면 오늘 반영돼 있어야 정상이었다.

<위험 경보 - 1단계 클리어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사유: 부부 동반 여행 보고서 미작성(데드라인 경과)>

화면 속 숙려둥이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휴.”

다행이구나. 결국 이렇게 마감을 놓쳤으니 점수는 날아가 버렸고, 되살릴 방법은 없다. 그나저나 본부장님도 여행 보고서 작성 안 했나 보네…? 내가 업로드 안 하더라도 본부장님이 작성하면 인정해 주는데… 연락이 안 갔나?

이지운이 생각하는 서태천은 점수를 꼬박꼬박 챙겨 레벨 클리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남자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의아했으나, 지금 ‘혹시 보고서 안 쓰셨어요?’라고 물을 이유는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

“나왔으면 밥 먹어요.”

“아, 네.”

서태천이 이지운을 불렀다. 식탁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평상시 보기 힘든 화려한 요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 이거 다 본부장님이 만든 거예요?”

“간만에 솜씨 좀 부려 봤습니다.”

도톰한 프렌치토스트에 메이플시럽을 듬뿍 끼얹고, 신선한 채소에 드레싱과 리코타 치즈를 조화롭게 버무렸다. 거기에 피망과 양파를 잘게 다져 넣은 오믈렛을 커다랗게 부쳐내 접시를 꽉 채우니 식탁 위가 특급 호텔 조식당 못지않았다.

“와. 너무 맛있겠다.”

“프렌치토스트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번 해 봤습니다.”

“네! 정말 좋아해요. 와… 비주얼 예술이야. 맛도 있어요!”

한입 잘라 먹어 보니 입 안에 향긋하게 감도는 꿀과 우유 향이 장난 아니었다. 이지운은 입을 틀어막으며 발을 굴렀다.

“너무 맛있어!”

“어젯밤에 다 나았다고 들었긴 했는데, 정말 속 괜찮은 거 맞죠?”

“당연하죠. 이제 죽은 굿바이. 빵 먹어도 돼요.”

명스까스 덕분에 이지운은 일주일 동안 속을 잘 다스렸다. 이제는 맛있는 것을 잔뜩 먹어도 됐다.

본부장이 나를 위해 아침상을 차려 주다니. 그것도 이렇게 맛있고 정성스럽게…!

이지운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지만 자제하기로 하고, 대신 먹다 말고 사진을 찍어 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본부장이 물었다.

“혹시 앱에 올리려는 겁니까?”

“네?”

“숙려 앱 업로드하냐고요.”

그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미세한 표정의 변화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이지운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동시에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점을 캐치했다.

“아, 아니요. 그냥 개인적으로… 배고플 때마다 보려고.”

“응?”

“배고플 때마다 맛있는 거 사진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이지운이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그제야 서태천의 표정이 평상시처럼 풀어졌다.

뭐지, 저 표정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야?

이지운 속에서 미묘한 생각이 솟아났다.

지금 저 반응, 앱에 올리지 말라고 넌지시 돌려 말하는 거 맞지? 뭐… 어차피 올릴 생각도 없었지만, 본부장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오믈렛 식겠습니다. 좀 들죠.”

이지운의 상념은 오믈렛을 권하는 본부장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피망이 아주 싱싱했어요. 씹는 맛이 좋을 겁니다. 치즈도 스위스산으로 넣어 봤는데, 어떤지 좀 말 좀 해 줘요.”

“네!”

오믈렛을 큼직하게 썰어 입 안에 넣자, 순간 천국으로 슝 날아오르는 착각이 들었다.

“미쳤다. 이건 미친 요리야.”

이지운이 입을 틀어막았다. 태어나서 숱한 계란 요리를 먹어 봤지만 그 어떤 것보다 이게 맛있었다.

“하나 더 주실 수 있어요?”

“기꺼이.”

서태천이 자기 앞에 있던 접시를 이지운에게 건넸다. 이지운은 어느새 복잡한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조식을 흠뻑 즐겼다.

***

“와, 가을 날씨네요.”

“늦가을인데 오늘 정도면 쌀쌀하지도 않고 딱 좋군요. 꼭 봄 같기도 하고요.”

“그러게요. 너무 좋아요.”

꼭 데이트 가는 것 같다. 아니, 이건 데이트야. 그렇고말고.

이지운은 차의 조수석에 오르면서 자기 세뇌를 했다. 저렇게 잘 차려입고 오늘따라 얼굴도 잘 준비된 서태천과 자신은 어딜 가는지 몰라도 좋은 데를 갈 것이고, 그럼 대충 데이트 아닌가.

운전석에 탄 서태천이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 그가 입력한 주소지는 이지운에게도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어? 새로 런칭한 파주 리조트네요.”

“네.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최근 중점적으로 밀고 있는 곳, 앞으로 경기도 최고의 캐시카우가 될 것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파주 지점이었다.

뭐지.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업무 추진이었어? 주말 매상 점검 뭐 이런 거 가는 거야? 블랙 쇼퍼 이런 거냐고…!

이지운은 순간적으로 실망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자기 회사 호텔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이지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천은 묵묵히 차를 몰았다. 이지운은 살짝 삐진 감이 있었기 때문에 차창 밖을 내다보며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가, 턱을 괴었다가, 막판에는 간식이나 까먹었다.

“심심합니까?”

“아니요.”

“근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일하러 가는 것 같아서요.”

솔직하게 말하자, 서태천이 확 웃었다.

“일이요? 아닌데.”

“네? 일 아니에요?”

그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이지운은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키며 서태천을 잘 관찰했다. 서태천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웃다니. 정말 설레는 광경이었다.

“일 아니라고 하니까 금방 기분 좋아졌군요. 웃고 있잖아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근사해서 웃는 거예요.

이지운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파주 리조트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자연 친화적인 에코 힐링이 컨셉이었기 때문에, 여타의 리조트와 달리 대문 없이 숲을 하나의 입구로 조성해 둔 모습이었다.

“파주는 처음이죠?”

“네. 저 여기 생기고 처음 와 봐요. 너무 좋다.”

이지운은 널따란 부지에 펼쳐진 초록 숲의 경관을 보면서 감탄했다. 수목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오래된 것들이라 고혹적이고 또 신비한 이미지를 자아내며 리조트를 더욱 매력 있게 빛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본부장님.”

“지배인님, 오랜만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조트 지배인이 서태천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저, 이분은….”

“안녕하세요.”

“이지운 주임입니다.”

이지운이 직함을 밝히려는데, 서태천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지배인이 아, 소리를 내며 바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지? 왜 가려고 하는 거야.

“그럼 천천히 둘러 보십시오. 본부장님, 주임님.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알아서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지배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지운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무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은 신규 나부랭이고 지배인은 부장급 이상의 파워를 지니고 있는 자리로 알고 있는데,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깍듯한지…? 내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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