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저, 그러니까… 본부장님은 혹시 예전에 어떤 분과 사귀셨어요?”
여기까지 말한 이지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괜히 물어봤나. 그게 이 주임과 무슨 상관이죠? 이혼할 사이에 별걸 다 묻네요! 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침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역시 괜히 물어봤나 봐. 망신스럽다…!
“아, 아니에요. 방금 질문은 취소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아, 낮잠이나 자야겠다.”
이지운은 먼지떨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갑자기 졸리다며 하품을 했다. 잠이 오는 척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데 서태천이 덥석, 이지운의 손목을 잡았다.
“헉!”
이지운이 깜짝 놀랐다. 더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서태천이 얼굴을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붙여 코와 코가 닿을 만큼의 간격만 남긴 것이다.
“…그건 왜 묻습니까?”
그런데 그의 표정은 이지운이 걱정했던 대로 차갑거나 냉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띠고 물어오는 그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면서 지운이 터득한 본부장의 표정 빅데이터에 의하면 그랬다. 굳이 수치화하자면 호기심 20%, 즐거움 50%, 놀람 10%, 기타 분석할 수 없는 수치 20% 정도랄까.
“아… 저…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 연애사가 죽도록 궁금해요. 어떤 오메가 사귀었어요? 청순 타입입니까? 섹시 타입입니까? 열성이나 남성형도 괜찮게 생각하시는지? 혹시 진지하게 만난 적 있다면 저 질투로 부글부글댈 것 같은데 이런 제가 주제넘은 거겠죠…!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기에, ‘그냥’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이지운이었다.
“흠, 그래요? 별일이군요. 이주임이 나한테 개인적인 관심을 다 가지고.”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목을 검지로 가볍게 쓸었다. 이지운은 흠칫했다. 나 심장이 손목으로 이사 갔나? 왜 손목이 쿵쾅쿵쾅거려? 미치겠다. 열도 나는 것 같아.
“개,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여쭤보는 거예요.”
이지운이 일부러 톡 쏘듯이 말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자 서태천이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쩌죠. 아쉽게도 없습니다.”
“네? 뭐가 없어요.”
“사귀었던 사람이요.”
“…예?”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온 얼굴로 정색했다.
“어떻게 없어요? 말도 안 돼.”
얼굴도 잘났고, 키도 엄청 크다. 수도꼭지 틀면 돈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 성격이 좀 로봇 같아서 그렇지 사실 은근히 챙겨 주는 자상함까지 갖추었지 않은가. 완벽한 알파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요소. 웃을 때… 싱그러운 초록빛 내음이 난다. 그런 남자가 솔로였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거짓말 마세요.”
“진짜입니다. 일에 치여 사느라 제대로 연애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소개해 줘서 식사 자리를 갖거나 연락처를 교환한 적은 있습니다만, 적어도 제 측에서 교제를 신청해 만남을 지속한 적은 없습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이지운 역시 연애 경험은 미천했다. 사귀자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저녁이나 주말에 데이트할 시간조차 낼 수 없는 게 대학생 이지운의 팍팍한 현실이었다. 그럴 시간 있으면 한 시간이라도 연장 근무를 하거나 과외 한 건을 더 뛰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상대방과 스스로를 위해 연애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건 조부모님이라는 보호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느라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길이었지, 만약 삶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래도 완전 솔로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독신주의자이긴 하지만 연애를 혐오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니니까.
이지운은 자신의 사례를 생각하자 더욱 본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저렇게 생겼고 환경도 여유로우면 숨 쉴 때마다 오메가를 바꿔 가며 만날 것 같은데… 아무도 안 사귀었다고?
“충분한 대답이 됐습니까?”
“어, 네… 네.”
이지운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엉거주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묻죠. 지운 씨는 어땠습니까?”
이지운은 정신이 없는 나머지, 서태천이 자신을 이 주임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대화 분위기가 지극히 사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 저… 저의 연애사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지운은 약간 당황했다. 그러면서 갈등이 됐다.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허세를 부릴 것인가? 이지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시만. 만약에 내가 전 애인이 한 트럭 있었다고 한다면, 알파들한테 인기 폭발하는 타입이라고 말한다면 서태천의 질투심을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이지운은 근거 없는 판단을 내리고 바로 말을 뱉었다.
“저 과거 화려했어요! 너무 많이 사귀어서 셀 수가 없는 지경인데.”
그가 호기롭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현실은 대학교 수업이 끝나면 빛의 속도로 강의실을 탈출해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기 바빴다. 고백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장소에 손님으로 온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받았었다.
“그래요? 어떤 사람들이었는데요.”
서태천이 여유롭게 물었다. 질투는커녕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그를 보며, 이지운은 초조함을 느꼈다.
일단 어떻게든 말을 끼워 맞춰야 할 텐데… 망할. 연애를 해 봤어야 알지. 아 몰라. 대충 지어내.
“음. 일단 저는… 어, 잘난 알파만 만났는데요.”
“그랬군요.”
“키! 키를 봅니다. 키가 커야 하고요. 머리 색이랑 눈 색은 까만 알파를 선호해요.”
“오, 그래요?”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서태천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머리 스타일은… 넘겨도 멋지지만 내리면 또 그 나름대로 멋지고요.”
“그리고?”
“웃으면 소년 같은 사람이… 좋아요.”
이지운이 겨우 대답을 끝마치자 본부장이 환하게 웃었다. 이지운이 말한 바로 그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이지운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 저 졸려요. 자야겠다.”
“청소하다 말고요?”
“이따 마저 할게요. 아, 졸려 미친다.”
이지운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 코 고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눈은 말똥말똥 뜬 상태였다.
어떡해. 돌았다. 우리나라, 아니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소야.
아까의 미소가 자동으로 재생되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바로 옆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본부장의 체향이, 체온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이 주임, 안 자죠?”
“허걱, 꽥.”
자는 척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화들짝 놀란 이지운은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안 자는 거 다 알아요. 이불 좀 걷어 봐요. 숨 막히겠네.”
“…….”
이지운이 이불을 슬쩍 내려 눈을 드러냈다.
“내일 시간 됩니까.”
“내일이요?”
“어디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네? 어딘데요.”
이지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인간, 나한테 외출 제안을 하는 건가?
이런 일은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결혼 생활 내내 없던 일이었다. 이지운은 귀를 의심했다.
“몇 군데 알아볼 곳이 있어서 그럽니다. 드라이브 겸해서 교외에 좀 다녀오죠.”
설마 이것은 데이트 신청인가?
이지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따라오면 점심 맛있는 거 사 줄게요.”
“네! 좋아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지운은 즉답을 했다.
앗차, 이러면 밥에 낚여서 좋다고 한 것처럼 들리잖아.
이지운은 잽싸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밥도 좋지만 드라이브도 좋다는 말이에요. 본부장님과의 외출이 아주 즐거울 것 같아서 수락한다는 거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마저 자요.”
서태천은 담담하게 말하더니 침실의 불을 꺼주었다.
이지운은 다시 자리에 누워 어둠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스, 아싸, 예아, 얼씨구나.
오늘 성과가 아주 좋았다. 조금 쪽팔리기는 했지만 서태천에게 지나간 오메가가 없다는 것도 알아냈고, 자신의 연애 경험은 부풀려 서태천에게 자극을 줬다. 게다가 내일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지 않은가.
이지운은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음. 어릴 적 소풍을 앞둔 전날 밤에도 이렇게까지 두근거리고 설레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자는 척하며 슬쩍 몸을 돌려서 본부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서태천은 똑바로 누워서 눈을 감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차분하고 규칙적이었다.
자나 보다.
이지운은 본부장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슥슥 움직여 본 다음, 그가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슬쩍 어깨에 고개를 기대보았다. 감촉이 아주 예술적으로 단단하고 듬직했다.
이지운은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은근슬쩍 서태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떡하죠? 나 당신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