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본부장이었다고? 날 남몰래 챙겨 주던 명스까스 요정이 서태천이었단 말인가.
이지운이 경악으로 부들부들 떠는 동안, 서태천은 망설임 없이 이지운의 책상 위에 드링크를 올려놓았다. 때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는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받으며 그가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예. 가고 있습니다. 네, 로비에서 뵙죠.”
서태천이 완전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면서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이지운은 식은땀을 닦으며 탕비실에서 빠져나왔다.
“헐….”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이지운은 비틀비틀 걸어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명스까스야. 널 사다 준 사람이 바로… BBG였어.”
이지운이 흥분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이 울렁대 토할 것만 같았다.
범인은 BBG!
이지운은 명스까스 병을 품에 안고 발을 굴렀다. 그럴 리 없는데 명스까스가 활활 불타는 열기를 품은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음을 냈다.
그날 오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이지운은 들뜨고, 또 멍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지운 주임. 뭐 하나? 자네 뭐 해?”
팀장이 자꾸 태클을 걸고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지운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안 됐으므로 영혼 없이 대답만 했다.
“네! 팀장님.”
“뭐 하길래 내가 부르는데도 못 들어.”
“죄송합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팀장이 인상을 쓰며 묻는데도 이지운은 배시시 웃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창문 밖으로 날아서 퇴근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퇴근길에 꼭 물어봐야지. 당신이 바로 명스까스의 주인공이었냐고. 어쩌자고 그렇게 깜찍하게 날 챙겨 주었냐고.
이지운은 광대를 씰룩거리며 일을 대충 했고,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드디어 시곗바늘이 6을 가리키자, 이지운은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서류 가방을 들고 쩌렁쩌렁 인사했다.
“저 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빛의 속도로 달려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그는 일찌감치 주차장에 잠복했다. 곧 서태천이 내려와 차 앞에 섰다.
“깜짝이야. 웬일로 먼저 내려와 있었습니까.”
“아, 금요일이니까 칼퇴하려고요.”
“그랬군요. 어서 타요.”
“네.”
보는 눈이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이지운은 닁큼 차에 올랐다. 서태천을 힐긋 보자 이상하게 평소보다도 그가 멋지고 잘생기게 느껴졌다.
이렇게 잘난 남자가 매일 명스까스를 챙겨 주다니, 귀엽기도 하지. 귀여워 보이면 끝장이라던데 난 이제 진짜 제대로 코가 꿰였구나.
이지운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 중, 차가 신호에 걸렸다. 아차차, 지금이로구나. 이지운은 급하게 대사를 내뱉었다. 나름 하루 종일 연습한 질문이었다.
“본부장님, 까스 하면 명스까스 아시죠?”
“…네?”
“아니, 나 뭐래. 제 말은 명스까스…! 아시냐고요.”
이지운이 뱉은 것은 최근 명스까스의 CF 문구였다. 까스 하면 명스까스.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재치있는 영상과 음악이 어우러진 광고 멘트가 최근 화제가 되는 중이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올 건 아니잖아…!
이지운이 난감해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까스… 소화제 아닌가요.”
“맞… 맞는데, 제 말은.”
서태천이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저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요!”
“명스까스 먹고 싶어요? 여전히 속 안 좋아 보이던데.”
“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밤마다 배 앓으면서 자는 거 알아요. 사회생활이니 뭐니 해서 혼자 밥 안 먹으면 팀원들 눈치 보여서 억지로 점심 먹고 다니는 것도요.”
“아….”
서태천이 이지운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명스까스 하루에 하나씩 꼭 마셔요. 알겠죠?”
“네? 네.”
탐정스럽게 ‘범인은 바로 당신이지?’ 이런 대사를 치고 싶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이지운은 얼굴만 시뻘게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멋있고 자상해. 미칠 것 같다.
***
“까스 까스 명스까스~”
CF송을 근본 없는 계이름으로 고쳐 따라부르며, 이지운은 창틀의 먼지를 떨었다. 여유로운 주말을 맞이해 안방 청소에 나선 것이다. 평소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계셨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밝고 활기찬 이지운은 손수 청소에 나서 프로 자취생으로 지내오며 어느 정도 갈고 닦은 청소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내가 요리는 잘 못해도 청소는 그럭저럭한단 말이지. 먼지 털고 걸레질하고 그런 건 꽤 해요.
“까스, 까스!”
먼지떨이의 움직임이 격렬해짐과 동시에 노랫소리가 점점 커졌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명스까스 사태 이후 이지운의 마음속에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그는 변함없이 서태천을 동경하고 또 사랑하고 있었으나, 여기에 미묘한 자신감이 추가돼 자꾸만 긍정적인 가능성을 점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서태천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동거 기간 동안 지켜본 서태천은 다른 사람을 세심하게 챙겨 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냉철하고 또 남과 선을 잘 긋는 그런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명스까스를 챙겨 주다니. 이것은 분명히 좋은 신호가 틀림없었다.
물론 가끔가다가 이성적인 이지운이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했다.
야, 이지운아 정신 차려라. 그 양반은 별생각 없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또 모르지. 예전에 사귄 다른 사람한테는 너한테보다 더 잘해 줬을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지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튼 꿈을 꾸다가 개망신 당하고 상처 입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감상적이고 긍정적인 이지운도 만만치 않게 고집이 셌다.
저 로봇 같은 본부장이 점심시간마다 명스까스를 가져다 놨잖아. 이게 일반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면 또 본부장이 저에게 마음이 있는 것만 같아 귀가 팔랑거렸다. 그러니 이성적인 이지운과 감성적인 이지운은 서로 자기 말이 맞다며 걸핏하면 머리채를 잡고 싸워댔다.
“훠이, 훠이. 청소 좀 하자.”
이단 오늘은 즐겁게 청소를 하고 싶었다. 이지운은 손을 휘휘 저어서 두 마리의 자신을 모두 쫓아낸 다음, 신나게 먼지를 닦아 냈다. 하지만 속으로는 ‘본부장도 내게 관심 있다’에 살짝 한 표를 던진 상태였다. 왜냐, 그게 기분이 좋으니까. 아주 단순하고도 솔직한 이지운이었다.
“청소하고 있었습니까?”
안방 욕실 문이 열리고, 회색 가운 차림의 서태천이 걸어 나왔다. 물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나오는 그의 가슴팍이 노골적으로 떡 벌어져, 이지운은 청소를 하다 말고 군침을 삼켰다.
“아, 네. 창틀에 먼지가 좀 많아서.”
“그랬군요.”
서태천은 오늘도 그렇고 요즘 들어 통 검은 가운을 입지 않았다. 줄곧 회색 가운만을 찾는 그를 보며, 이지운은 역시 이것도 자신 때문인가 싶었다.
한번 마음을 터놓고 물어봐? 혹시 내가 검은 가운 혐오해서 안 입기로 한 거냐고.
“저, 본부장님.”
“네. 이 주임.”
“그러고 보니까 요새는 검은 가운 안 입으시네요?”
머리를 닦고 있던 서태천은 그 말에 이지운을 돌아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검은 가운이 별로라는 말이 있어서요.”
이지운은 순간 헉 소리를 낼 뻔했다. 아니, 본부장이 가운 색깔 별로라는 내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사람이었다고? 이거 분명히 내가 제주도에서 검은 가운 입는 알파 싫다고 해서 이러는 게 확실한데…!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에도 검은 가운을 피해 다른 색 가운을 입고 있었더랬지. 미쳤다, 미쳤어. 내 말 한마디 한마디 신경 쓰고 있었어. 서태천…! 당신,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정색했다가 광대를 씰룩였다가 입을 찢었다가 입술을 짓씹고 눈을 질끈 감는 이지운을 보며 서태천은 이지운이야말로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보고 있으면 하여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서태천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뭔데요. 할 말 있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분 탓인지 말투가 부드럽고 자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가 샘솟았다.
“저… 본부장님, 진짜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요.”
“네.”
“내키지 않으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뭐길래요.”
사실 이지운이 가장 궁금한 부분은 서태천의 과거 연애사였다. 예전에 사귀었던 오메가들에게는 어떻게 대했는지, 명스까스를 챙겨 주듯이 잘해 주었는지 아니면 더욱 자상하게 굴었는지. 어른스럽게 리드하는 타입이었을까? 아니면 질투도 하고 집착도 하는 스타일이었을까. 이지운은 궁금한 게 많았다.
나한테는 무심한 듯 뒤에서 잘해 주는 일이 가끔 있는데… 예전 연인들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솔직히 말해 궁금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한 호기심이 피어올랐지만 이지운은 ‘우리가 사적인 정보를 공유할 만한 사이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지운이 쉽사리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서태천은 인내심 있게 질문을 기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