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여긴 시골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주임은 섬 어떻습니까?”
“음… 저는 섬 좋아해요.”
이지운은 대학 진학을 계기로 상경한 케이스였다. 조부모와 복닥복닥 부대끼던 시골과 달리 서울은 외롭고 또 삭막했다. 겉보기엔 화려한 도시일지 몰라도 단칸방에서 학업과 취업에 전념해 온 이지운에게 원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씁쓸함과 서글픔의 상징일 뿐이었다.
“전 시골이 좋아요. 서울은… 좀 저랑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요.”
“그럼 나중에 서울 아니라 시골에서 살 겁니까?”
“그렇게 물어보시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서울보다는 시골이 제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요. 평화롭고 정도 느껴지고… 당장 이 섬만 봐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시내 특급 호텔에서 묵었다면 지배인이 소화제를 조달해 줬을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할머니의 바늘로 손을 따서 나았어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바닷바람이 불어와 이지운의 머리를 부드럽게 흩날렸다. 얇고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춤추듯 흩어졌다. 서태천은 햇살을 듬뿍 받아 살짝 찡그리고 있는 이지운의 눈꺼풀과 그 아래 콧등, 혈색이 돌아온 입술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안 그래요. 본부장님?”
이지운이 서태천을 바라보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서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아, 맞다. 우리 사진 찍어야죠. GPS 켜고 사진 찍어야 인정돼요.”
이지운이 이마를 짝 소리 나게 치고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의 GPS 기능을 켠 다음 이지운은 바다를 배경으로 서태천과 자신이 프레임에 담기도록 구도를 잡았다.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주세요.”
“그러죠.”
웬일로 서태천이 순순히 응했다.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어… 내가 잘린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주세요, 본부장님.”
이지운이 팔을 뻗어서 조금 더 안정적인 구도를 잡으려 했지만, 키 차이 때문에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래에서 팔을 뻗어서 핸드폰을 조작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줘 봐요”
보다 못한 서태천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긴 팔을 쭉 뻗어 이지운과 자신이 화면 안에 잘 담기도록 만들었다.
“내가 누를게요.”
찰칵.
서태천과 이지운이 나란히 찍혔다.
“어? 본부장님, 사진 찍을 때 안 웃으신다면서요!”
사진 속의 서태천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즐거워하는 표정에, 이지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태천을 쳐다봤다.
“그러네요. 웃어 버렸네.”
웃는 서태천은 근사하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남신 같았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지금까지 수십 번 같이 찍은 사진 중에서 이지운은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배에 차를 싣고 여객 터미널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에 조금 못 미쳤다.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이지운은 꾸벅꾸벅 졸았다.
“으음….”
빙빙 돌아가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이자, 서태천이 오른팔을 뻗어 그의 고개를 부드럽게 받쳐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음냐….”
이지운은 입까지 벌려가면서 열심히 잠꼬대를 했다. 서태천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
어김없이 월요일은 돌아왔고 이지운은 서태천의 차에 실려 버스 정류장까지 출발하는 것으로 출근길을 시작했다. 언제나와 똑같은 평일 아침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주말 간 있었던 일 때문일까. 자기도 모르게 이지운은 자꾸만 서태천의 손에 힐끗힐끗 시선이 갔다.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아, 아니요!”
이지운이 손사래를 쳤다.
“그럼 왜 그렇게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두고 있,”
“오늘은 저 여기서 내릴게요! 스탑!”
“흠. 그냥 회사까지 가죠?”
“네? 왜요. 우리 따로 출근하잖아요.”
“좀 일찍 나왔잖아요. 이 시간이며 지하 주차장에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냥 회사까지 같이 가죠.”
“아, 정말요?”
보통은 칼같이 중간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 내려 주는 서태천이었는데 오늘은 같이 가잔다. 이지운으로서는 덜 피곤한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조금이라도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평상시보다 일찍 나온 게 정말 유효한 모양이었는지, 차는 막힘없이 청담대교를 건넜고 빠르게 회사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선 다음, 이지운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타이밍에 맞춰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올라가는 내내, 이지운은 싱숭생숭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뭐지. 이걸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BBG가 달라졌어. 평소보다 나를 더 젠틀하게 대해 주고 있고, 확실히 챙겨 주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생각에 잠긴 이지운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걸었다. 사무실이 있는 층에 내려 자기 자리에 앉고, 팀장과 과장들에게 영혼 없는 인사를 건네는 동안도 속으로는 서태천 생각을 했다. 그러느라 민 대리가 들어와 옆자리에 앉은 줄도 몰랐다.
“지운 주임!”
“왜 이러지….”
“이 주임?”
“아, 네! 대리님. 오셨네요.”
“뭐 하느라 그렇게 멍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월요일이라 뇌가 파업하나 봐요.”
“어머, 나돈데.”
민혜경 대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주말 동안 어떻게 됐어?”
“네?”
“주임님 친구의 친구의 친구 말이야. 연애 진도 문제로 속썩이고 있었잖아. 진도 뺐대?”
“아….”
맞다. 나 민 대리님한테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랍시고 어떻게 해야 아리송한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냐고 물었었지.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뜻하는 바는 이루었대?”
민 대리가 눈을 접으며 킥킥댔다.
“그게….”
민 대리의 대답에 이지운은 망설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는가? 정답은 아니오였다. 원래 추구했던 육체의 영역으로 들어서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부자리에서 끌어안기도 했고, 데이트스러운 것도 했고,
“어… 만나고 오긴 했는데 좀 애매한가 보더라고요. 완벽하게 해내진 못했고요.”
“그래? 아쉽네.”
머쓱하게 웃는 순간, 이지운의 핸드폰이 지잉 하고 울었다. 팝업 알람을 쳐다보니 숙려둥이가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빡센 춤은 처음인걸? 무슨 일이지.
요 몇 달간 이지운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의 마스코트 숙려둥이는 일반적인 알람을 보낼 때는 살랑살랑 부드럽게 춤을 추었고 급한 건일수록 빠르고 격한 춤을 췄다.
…왜 이런 쓸데없는 기능을 넣었을까. 세금 아깝다.
이지운이 혀를 쯧 차며 숙려둥이를 쿡 누르자 안내 메시지가 떴다.
<여행 후기를 빨리 올려 주세요! 1000자 이상의 후기와 다녀오기 전, 후의 사진을 첨부해서 오늘 자정까지 올려 주셔야 한답니다. 안 그러면 이번 달 점수에서 크게 감점이 되고 말아요!>
이전에 숙려 감독관이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부부 동반 여행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이 많아 검사를 철저하게 진행한다고 했다. 확실히 부부가 함께 다녀온 게 맞는지, 미리 지정된 장소로 다녀왔는지 후기를 통해 감독관이 제대로 체크하므로 후기를 빠르게 올리는 게 이번 과제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래, 후기 올려야지….
이지운은 후기가 제대로 통과했을 때의 점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얼추 보통 등급으로 이번 달을 통과할 만큼 점수가 나올 듯했다.
애초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숙려 점수가 올라갈 것은 각오했던 바였다. 하지만 막상 후기를 쓰려니, 쓰기 싫었다.
이대로 점수가 올라가면 무사히 1단계를 클리어하게 되잖아. 그럼… 본부장과 헤어질 날이 성큼 다가오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이지운은 숙려둥이의 방정맞은 댄스를 쳐다보다가 액정을 확 꺼 버렸다. 아예 핸드폰을 엎어 버리자 숙려 앱이 징, 징 알람을 울렸다. 왜 공지를 무시하냐는 듯 핸드폰이 울어댔지만 이지운은 침묵했다.
…싫어. 1단계를 통과하면 2단계, 3단계가 날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4, 5단계도 훌쩍 지나가 버릴 거야. 그리고 최종 6단계를 통과하는 순간 우리의 이혼은 성립된다.
“하아….”
숙려둥이고 뭐고 다 꼴 보기 싫었다.
같은 시각, 서태천은 본부장실에서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 묵직한 진동 소리를 냈다.
<강남센터 숙려 감독관>에게서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지난 주말여행 참석자 여러분들께 보내는 전체 문자입니다.
배우자분과 함께 여행 일지를 작성해 보세요. 진정성 있게 헤어짐을 논의했다면 보고서 통과 점수를 드립니다. 이번 달 1단계 통과 여부가 불투명하므로 꼭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
점수가 간당간당할 것이라고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다. 일지만 그럴싸하게 썼을 뿐, 나머지 미션은 소홀히 하고 있었으니까.
여행 건은 이지운에게 보고서를 써서 업로드하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태천은 감독관의 문자를 삭제했다. 그리고 책상 위의 내선 전화를 들어 요새 자주 연락하는 번호를 눌렀다.
“납니다. 식장 현황 조사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