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심지어 서태천의 셔츠 단추는 위에서부터 하나, 둘, 세 개가 풀려 있어서 단단한 가슴팍이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였다.
세상에, 오마이갓, 하느님, 부처님, 알라여.
이지운은 꽥꽥거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게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을 냈나 보다. 서태천이 몸을 살짝 움직이면서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했다. 이지운은 숨을 삼키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대로 서태천이 깨어나서 등을 돌리고 잘까 봐, 팔베개를 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본부장은 제대로 깨어나 버린 모양이었다.
“으음….”
“헉, 깨셨어요.
“인기척이 나서… 몸은 좀 어때요.”
서태천은 이지운을 끌어안은 그대로 말했다. 자신을 얽은 팔을 치울 줄 알았는데 포즈가 변하지 않자, 이지운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저, 저는… 이제 괜찮아요. 개운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더 자죠.”
“네?”
그렇게 말하며 서태천은 팔에 힘을 줘 이지운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어, 뭐지. 잠결에 이러는 건가? 혹시 습관…?! 애인이랑 잠잘 때 습관 아닐까. 지금 나를 과거에 사귀었던 오메가들하고 착각하고 이러는 것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좀 슬플 것 같은데. 아니, 속이 쓰린 건가….
치열하게 아르바이트하고 취업 준비하느라 20대 내내 연애 한 번 못 해 본 이지운이었다. 알파와 가까이 몸을 맞댄 것도, 한 침대에 누운 것도 서태천이 처음이었다.
BBG는 연애 많이 해 봤겠지?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고, 지난번 러브 빌리지에서도 인기투표 1위 할 정도로 오메가들에게 먹히는 매력 포인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애할 여유가 있었을 테니… 여러 오메가를 만나 봤겠지.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했을까?
재력가의 알파나 오메가들은 베타에 비해 빠르게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월한 유전자와 훌륭한 집안 배경을 서로 선점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부모가 나서 자녀들을 이른 나이부터 결혼 시장에 진출시키고 아예 약혼을 일찌감치 시켜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본부장도 재벌 형질인들 결혼 시장에서 되게 인기 많았을 텐데… 아름답고 능력 좋은 오메가를 만나려면 진작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랑 이렇게 얽혀 버린 걸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와… 해프닝에 불과할지라도 한순간이나마 부부라는 이름으로 엮였네.
모르겠다. 참 어렵고 복잡해.
이지운은 어느새 목마름을 잊은 지 오래였다. 다시 졸음이 몰려와, 서태천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햇빛이 눈 부셔, 이지운은 인상을 찡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벽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9시였다.
“후아암.”
기지개를 켜며 옆자리를 봤는데 어라, 자신은 혼자 누워 있었다. 베개에 침 자국을 남기기 일보 직전이라 습, 입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방안 어디서도 본부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어. 나 놔두고 서울 갔어…?
이지운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두리번거리는 사이, 서태천이 욕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꼴로 봐서 벌써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일어났습니까?”
“아, 네.”
“이 주임도 씻고 와요.”
“네.”
“여기 수건이요.”
서태천이 마른 수건 한 장을 이지운에게 건넸다. 손끝이 닿자 이지운은 괜스레 지난밤 끌어안고 잤을 때 느낀 체온이 떠올라 민망해졌다.
아니… 간밤에 그렇게 끌어안고 자 놓고 이렇게 다시 내외하는 이유는 뭐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등을 기댄 채, 이지운은 한참 숨을 골랐다. 온몸에 지난밤의 열기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아 찬물로 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괴로워.
한번 마음을 자각하니까 이렇게 괴롭구나. 흑흑.
이지운은 눈물 젖은 샤워를 하며 찔끔 울었다.
다 씻고 밖으로 나와 보니 서태천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훤히 열린 문 너머 집주인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이고, 일어났구만.”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야 뭐 아침잠 없지. 그나저나 체기는 괜찮은겨?”
“이제 괜찮아요.”
이지운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자, 할머니는 다행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행이네. 지금 애인이 죽 좀 쒀 달라고 해서 그거 만드는 참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네…? 애인…이요?”
“응. 그짝 애인.”
할머니가 콕 집어 가리키는 것은 방안에 들어앉은 인물, 즉 서태천이었다.
“어… 어….”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커플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 맞다. 하지만 애인이라니 그건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혼 예정 부부예요. 그걸 또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지운이 머뭇거리는 사이 할머니가 덧붙였다.
“애인이 많이 걱정했어. 여차하면 병원까지 업고 뛸 기세더라고.”
“네?”
“소화제 없다고 하니까 손 딸 바늘이라도 달라고 얼마나 통사정을 하던지. 애인 잘 두셨네.”
“아….”
이지운은 적지 않게 놀랐다. 본부장이 나를 많이 걱정했다니. 무심한 표정만으로는 짐작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쩌면 본부장도 나를?
이지운 안에서 기대감과 설레임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서태천은 똑바로 서서 전신 거울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죽 쒀 주신대요.”
“네. 이 주임 아직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가 살짝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대답했다. 늘 깔끔하고 남자다운 스타일로 머리를 넘기고 다니는 서태천이었지만, 오늘은 별도의 헤어용품이 없기 때문인지 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같이 사는 사이이다 보니 이지운은 서태천이 머리를 내린 것을 자주 봤지만, 집이 아닌 장소에서 이런 모습을 보니 색다르게 느껴졌다.
좀 젊어 보이네. 소년미가 있어 보여. 몰랐는데 나 이런 스타일 좋아하는구나. 남자다우면서도 청순한 타입.
“…어제는 감사했어요. 저 챙겨 주신 덕분에 다 나았어요.”
이지운이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서태천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이지운은 깜짝 놀랐다.
“예?”
“죽 다 됐나 보네요. 밥상 받아 오겠습니다.”
“아… 네.”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가 상을 들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서태천이 후다닥 달려나가 할머니에게서 상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소고기 야채죽이네요. 잘 식혀서 먹어요.”
“아, 네.”
곱게 갈린 죽은 담백하면서도 속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몇 입 먹으니 기운도 나고, 동시에 속이 편안해졌다.
이지운은 죽 한 그릇을 다 비운 다음, 같이 따라 나온 매실차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천천히 마셔요. 또 체하면 답 없습니다.”
“천천히 먹고 있어요.”
일찌감치 죽 그릇을 비운 서태천이 턱을 괴고 이지운이 차 마시는 광경을 쳐다봤다. 이지운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태천의 눈치를 살짝살짝 봤다.
나 먹으라고 죽까지 부탁하다니. 여간 정성이 아닌데? 게다가 아까 아무렇지 않게 우린 부부 사이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도 했지.
설마 진짜로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이지운의 기대감이 한층 상승했다.
밥을 먹고 나서 조금 쉰 다음, 두 사람은 오전이 지나기 전에 방을 정리했다. 장미 문양이 새겨진 이불에서 이런저런 일은 벌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끌어안고 잤으며 다정한 보살핌을 받았으니 그렇게 망한 것만은 아니라고, 이지운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저희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지내다 갑니다. 나중에 또 오고 싶어요.”
민박집을 나서기 전, 두 사람이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말씀이라도 고맙네그려.”
“진짜예요. 할머니 밥이 너무 맛있어서요.”
“체하게 해서 미안한데 무슨.”
“제가 속이 안 좋아서 체한 거지 할머니 밥은 최고였어요. 정말 잘 먹고 잘 쉬다 갑니다. 이만 갈게요!”
이지운이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멀어져 가는 알파 오메가의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서 장미 무늬 이불을 덮고 잔 쌍은 무조건 득남 득녀여. 내가 특별히 배려했네, 오메가 청년.”
외딴섬 민박의 전설. 다양한 이불 중 장미 이불을 덮고 자면 그 커플은 나중에 반드시 아이를 데리고 섬에 돌아오게 되어 있다. 민박 경력 30년 할머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그 이불이 깔린 방을 내어 준 것이다.
“꼭 뜻을 이루시게. 애 데리고 다시 꼭 찾아오시고….”
간밤 체해서 일은 치르지 못했겠지만,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며 할머니는 아련하게 두 사람을 배웅했다.
***
선착장으로 가서 티켓을 끊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뭐할까요?”
“바닷가 산책이나 하죠. 어제랑 다른 코스로요.”
“좋아요.”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가을의 바닷가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인적도 드물고, 조용해 무척이나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흠뻑 마시며 이지운과 서태천은 꽤 멀리까지 걸어갔다.
“이런 데 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의외인데요? 본부장님 섬 좋아하시나 봐요.”
서울 출신에, 외국 유학 잠시 다녀온 것 빼고는 서울 바깥으로 나가 본 적 없다고 들었는데 시골 느낌을 좋아해? 의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