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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31화 (31/100)

31화

“그럼… 들어갈까요.”

“아, 네… 네!”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이지운은 침을 꼴깍 삼키고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침착하자. 일을 치려면 정신줄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해.

차에서 옷가지와 억제제 같은 간단한 짐은 가지고 내렸기에 가볍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지운이 먼저 댓돌에 신발을 벗은 다음, 배정받은 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아…!

방은 TV 드라마에서 클리셰적으로 다루어진 세트장보다 훨씬 작았다. 가구도 없는 주제에 예전에 이지운 혼자 살던 원룸보다도 더 아담했으며, 한쪽 구석에 욕실로 추정되는 문이 꼴랑 한 개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바닥에는 두 사람이 간신히 몸을 뉘일 만한 요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장미꽃을 큼직하게 수놓은 비단 이불과 베개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배 끊긴 섬에서 역사를 쓰라고 판을 깔아 주는 모양새였다.

예스. 바로 이거야. 됐다, 됐어!

이지운은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을 흠뻑 맞으며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좁아터진 방구석이라면 넓은 곳보다는 상대적으로 분위기도 야릇하고 삼삼할 것이었다. 뭐, 요란한 이불 무늬도 썩 맘에 들고.

“안 들어가고 뭐 합니까?”

“아, 방을 좀 구경하느라.”

“아담하고 좋네요. 들어가죠.”

서태천이 이지운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워낙 큰 그이기에 약간 과장 보태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아무것도 없네요.”

“그러게요. 이부자리만 달랑….”

은근슬쩍 누워 볼까? 피곤하니까 일단 한숨 자자고 해 봐?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저 이불 위에 서태천과 함께 누울 수 있을지 이지운이 각을 쟀다.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에 이지운은 성큼성큼 걸어 이부자리로 향했다. 그러다가 자기 가방에 발이 채여 털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어!”

“이 주임!”

서태천이 팔을 뻗어 이지운의 몸을 받치려 했으나 타이밍이 조금 안 맞았다.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넘어지는 이지운을 끌어안고, 서태천은 낙법을 하듯 방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서태천이 먼저 바닥에 쓰러지고 그 위를 이지운이 덮쳤다.

“헉!”

이거 완전 짐승처럼 덮치는 자세잖아. 미, 민망해.

이지운은 식겁해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둘의 팔다리가 뒤엉켜 있는 데다가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다친 덴 없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뺨을 감싸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그에게서는 남자다운 향수 냄새가 났으며, 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아… 천국이 따로 없네.

이렇게 탄탄하고 흔들림 없는 감촉은 난생처음이야. 초호화 침대보다 더… 더 황홀한 느낌이다.

서태천과 부부가 된 이후로 거의 매일 한 침대를 써 왔지만 매일 나란히 누웠을 뿐 몸을 겹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진하고 밀접한 스킨십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지운이 기억하지 못할 뿐 두 사람은 워크숍의 밤, 키스까지 나눈 사이였지만.

더듬더듬.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서태천의 탄탄한 가슴과 돌덩이같이 발달한 복근을 만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숲속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듯 아찔하고 먹먹한 향이 쏟아져 들어와 치명적인 기운을 남겼다.

청량함이 살짝 묻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묵직한, 알파의 페로몬 중에서도 우성만이 가질 수 있는 향기였다.

아예 눈을 감고 향과 감촉을 음미하던 이지운의 고개가 서태천의 목덜미로 향했다.

“…이 주임.”

자기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저 집중 또 집중에 빠져든 이지운이었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의 허리와 등을 감싼 양팔에 힘을 줬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몸이 더 가까워져서 이지운은 저도 모르게 흐릿한 신음을 흘렸다.

“…아,”

이지운이 감았던 눈을 떴다. 길고 짙은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이지운은 숨을 멈추고 서태천의 검은 눈을 응시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태천의 눈동자가 자신을 빨아들이듯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지금 이지운의 눈앞에 있는 것은 평소의 로봇 같은 남편이라고 믿을 수 없이 야성적인 수컷, 무르익은 향기로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눈 안에는 지금껏 찾아볼 수 없었던 뜨거운 열기가 일렁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우리가 가까워진다면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지운은 슬로우 모션처럼 서태천의 얼굴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서태천은 여전히 불타오르는 시선을 품고 이지운을 뚫어져라 응시했으며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 반응에 힘입어 이지운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한없이 가까워져만 갔다.

그렇게 이지운의 사심이 채워지려는 순간이었다. 낡은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악!”

이지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태천은 한 박자 느리게 상체를 일으키며 문지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이지운이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서는 삑사리가 났다.

“난디.”

“하, 할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집주인 할머니였다. 저녁밥을 챙겨 주러 온 것이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밥상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 내가 눈치가 없었구만!”

할머니가 상을 내려놓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이고야, 내가 큰 실례를 했네. 난 아무것도 못 봤으니 걱정 마! 하던 일 마저 해!”

“그게 아니… 아니라요, 할머니.”

이지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할머니는 두 사람이 초저녁부터 이불 위를 뒹구는 중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민박 경력 30년인데 나답지 않아. 요새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빠른데… 미안하네!”

할머니는 변명도 듣지 않고 후다닥 나가버렸다.

“할머니… 그게 아니고요…!”

이지운이 그녀를 아련하게 불러 보았으나,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밥상이네요.”

서태천이 일어나서 방문을 닫고 돌아왔다. 이지운과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서태천은 헛기침을 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도 했다.

아…! 텄다, 텄어. 한 걸음만 더 가면 키스할 수 있었는데 이 분위기, 망하고 말았구나.

이지운은 방금의 상황이 민망하면서도 너무나 아쉬웠다.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서태천과 스킨십할 수 있었을 텐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깨져 버린 분위기,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냄새가 끝내주는데?

문간에 놓인 밥상에서 맛있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부장님… 저기.”

“저녁 먹죠. 이 주임 배고플 텐데요.”

“어떻게 아셨어요.”

“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 네.”

이지운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서태천은 문간으로 가 밥상을 번쩍 들고 와 이부자리 옆 빈 공간에 놓았다. 생선조림과 불고기를 비롯해 각종 나물, 밑반찬이 거의 열 가지 가까이 차려진 상이 아주 푸짐했다.

“우와. 반찬 엄청 많아요.”

“그렇네요.”

“불고기 진짜 맛있겠다!’

방금의 시츄에이션은 다 잊었는지, 이지운은 서둘러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서태천은 은근슬쩍 고기류를 이지운 앞으로 몰아주고, 밋밋한 밑반찬은 제 앞으로 옮겼다.

사실 배가 고프긴 했으나, 이지운은 이 상황이 지독하게 어색하고 긴장됐다.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급하게 밥을 퍼먹으며 이지운은 서태천의 시선을 피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가 허송세월을 보냈다. 양치와 샤워는 진작에 마쳤지만 밖에 나가기가 보통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나가면 자야 하는데, 내가 다시 그 무드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은데….

맘 같아서는 페로몬이라도 확 풀어 버리고 싶었지만 억제제를 먹은 데다가 타고나길 열성으로 태어나 페로몬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웠다. 페로몬으로 알파를 유혹할 수 있는 건 히트 사이클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이지운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다 말고 결 좋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본부장님, 욕실 쓰세요.”

“그래요.”

서태천이 욕실로 들어간 다음, 이지운은 선뜻 자리에 눕기가 뭐해 방안을 빙빙 돌았다. 어릴 때 유도라도 배워 둘걸. 그러면 확 메치고 엎어 쳐서 이불에 눕힐 것 아닌가?

한숨이 길게 나오고 속이 답답해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퍽퍽 때렸다.

“아야.”

그런데 가슴께가 유난히 아팠다. 정확히는 심장 쪽이 아니라 그 근처, 위장 있는 쪽이 콕콕 쑤시고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어…? 왜 아프지.”

배를 눌러 보자 이번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팠다.

설마 체했나? 마음이 불편해서?

가슴을 퍽퍽 때려보고 물을 마셔 보았지만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체기였다.

“아… 제대로 체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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