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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30화 (30/100)

30화

배는 푸른 바다를 가르고 30분을 달려 작은 섬에 도착했다.

“다 왔네요. 어서 내립시다.”

“하아… 드디어 도착이다.”

인구수가 채 500명이 되지 않는다는 작은 섬은 관광객도 적은지 백팩커로 보이는 친구 무리와 노부부 한 쌍, 그리고 서태천과 이지운만이 내렸다.

선착장에는 <유류 할증료 인상 안내 및 배 시간 변경 알림 이라는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강화도의 선착장으로 나가는 배 시간은 하루에 딱 세 타임이었는데 5시가 그중 마지막이었다. 비고란에는 조그마하게 여름 성수기가 지나 기존 마지막 출항 시간이었던 7시 타임을 없앴다는 부연 설명이 적혀 있었다.

좋아. 난 저걸 놓쳐야 한다! 6시 반쯤 선착장에 도착해서 망연자실하는 거지. 7시 배가 없어진 지 몰랐다고 변명하면서 말이야. 후후.

“돌아가는 티켓 지금 끊어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태천이 포스터가 붙어 있는 매표창구 방향으로 걸어가려 했다. 이지운은 식겁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아니에요. 이런 섬에는 배 티켓이 남아돌죠. 저 지금 속 안 좋으니까 빨리 나가요.”

“아직도 안 좋습니까? 이런.”

“네. 바다 냄새 맡기 싫어요. 우욱.”

이지운은 억지로 연기를 하며 서태천을 질질 잡아끌었다.

황급하게 여객 터미널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지운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동반 여행으로 인해 숙려 점수가 올라가는 것을 각오하고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어 가야 할 터.

첫째. 이번 여행에서 나는 반드시 서태천의 이상형을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한다.

둘째. 이따가 마지막 배를 놓쳤을 때… 미천한 연애 경험으로 인해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화를 시도한다. 진솔한 마음의 대화는 무조건이고, 육체적 대화까지 뒤따르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지운은 제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는 줄도 모르고 씩 웃었다. 서태천은 그 옆에서 변화무쌍한 얼굴을 지켜보며 역시 이지운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출발하죠!”

이지운이 활기차게 외치며 길을 이끌었다. 이번 여행의 투어, 맛집 담당은 그였기에 자신이 모든 코스를 이끌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놓은 상황이었다.

“저쪽으로 가면 언덕이 나와요. 그 위에 올라가서 풍경 보면 끝내준대요.”

“괜찮겠네요. 거기서 사진 좀 찍죠.”

두 사람은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고 백팩커들과 등산 마니아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난 정도의 섬이었기에, 지자체에서 관광 시설을 잘 갖춰놓은 느낌은 아니었다.

길도 비포장도로가 많았고 이지운이 말한 언덕에 도착해서도 관리되지 않은 코스를 통해 길을 올라야 했다.

이지운은 평소 등산의 디귿 자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낯선 곳의 언덕을 수 킬로미터 오르려니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찼다.

하지만 서태천은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지 아주 가뿐하게 길을 앞장섰다. 아니, 한약 먹는 건 난데 왜 저 인간이 더 체력이 좋아? 볼 때마다 먹는 건 시커먼 커피밖에 없구만… 끙.

“읏차.”

이지운이 제 무릎을 짚으면서 힘겹게 나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서태천이 뒤를 돌아보며 이지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요.”

“네?”

“이 주임 속도에 맞춰 걸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아….”

이지운이 손을 뻗어 서태천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러자 가슴이 주체할 수 없는 리듬으로 콩닥거렸다. 크고 단단한, 굳은살이 느껴지는 알파의 손이었다.

이 손을 잡고 설레지 않는 건 불법이다. 불법!

이지운은 오두방정을 떨고 싶었으나 차마 리액션을 취할 수 없어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

언덕에 올라 서해 풍경을 한눈에 담고 사진을 찍었다. 숙려 앱에 사진을 올리며 다시 한번 현 위치를 태그하고 나니 시간이 어느덧 오후 한 시였다.

“배는 안 고픕니까?”

“엄청 고파요.”

이지운이 오만상을 썼다.

“저, 본부장님이 뭘 가장 좋아하실까 고민하다가 식당을 세 개 알아냈는데요.”

“세 개나요?”

“첫 번째는 버섯 불고기, 두 번째는 장어구이, 세 번째는 백숙이요.”

“다 맛있겠네요. 이 주임 먹고 싶은 데로 가요.”

“진짜요?”

마음 같아서는 셋 다 가고 싶었지만, 오늘 이지운의 마음은 장어로 쏠렸다. 고소하고 기름진 장어를 먹는다면 기운도 나고 기분 전환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정력은 덤이다.

정력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이지운은 야심 차게 웃었다.

“그럼 장어구이 집으로 모실게요.”

언덕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이 섬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소문난 곳에 위치한 장어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동네 맛집인 듯, 손님이 몇 테이블 있었다. 이 정도면 외진 섬에서 상당히 잘나가는 가게라고 할 수 있었다.

“장어구이 양념된 걸로 8인분만 주세요.”

“둘이서 8인분을 먹는다고?”

주인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지운은 머리를 긁으며 멋쩍어했다.

“장어란 게 먹다 보면 끝이 안 나더라고요.”

“우리야 좋지. 기다려요, 맛있게 해 줄게.”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간 후, 이지운은 서태천에게 변명을 했다.

“오늘 밥은 제가 살게요. 장어 8인분은 비싸니까요.”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이 주임 먹고 싶은 만큼 제가 사 드리죠.”

“네?”

“16인분, 아니 32인분 시켜도 됩니다.”

“정말요, 본부장님?”

이지운이 토끼 눈을 했다. 서태천은 얼마든지 그러라고 말하며 이지운 앞으로 반찬을 몰아주었다.

곧이어 초벌구이한 장어가 나오자 이지운은 반쯤 눈이 돌았다. 입안에 살코기 한 점을 넣고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와, 살살 녹는다. 넣자마자 입안에서 녹아 버렸어.”

“맛있네요.”

“제 인생 27년에 이렇게 맛있는 집은 처음이에요.”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서태천은 이지운에게 물컵을 건네며 엷게 웃었다. 이지운은 양념이 묻은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몰래 미소 지었다.

역시 내가 밥을 잘 먹을 때마다 좋아하는구나. 신난다.

식당을 나선 두 사람은 해안의 절경을 감상하며 섬을 천천히 돌았다. 코끼리를 닮아 유명해졌다는 바위도 구경하고, 섬에 단 하나뿐이라는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이지운은 평소 취향대로 바닐라 라테를, 서태천은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마주 앉아 창밖을 봤다.

“풍경 진짜 좋네요. 하늘이 깨끗해서 그런가? 저 먼바다까지 다 보이고.”

“그러게요. 작은 섬이지만 정말 아름답군요.”

이지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손목시계를 봤다. 현재 시각 4시 45분. 마지막 배 시간인 5시를 불과 15분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보자. 이지운이 결심한 순간 서태천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 마지막 배 시간이 언제입니까?”

헉. 지금 물어보면 곤란한데. 이지운은 순간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 일곱 시에요! 일곱 시요.”

“확실해요?”

“화, 확실하죠. 제가 이번 여행 계획 짠 사람이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있을까 봐요? 하하.”

이지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잔에 고개를 처박았다. 제발 찾아보지 말아라, 핸드폰으로 배 시간 검색하지 말아라.

하지만 얄궂게도 서태천은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망했구나. 인터넷으로 배 시간 찾아본 거야. 성수기 지났으니까 7시 배가 사라지고 5시 배가 마지막 배인 걸 알아채겠지. 여기서 선착장이 멀지 않으니 지금부터 죽어라 밟으면 마지막 배 탈 수 있는데… 하아.

이렇게 망해가나 싶을 때였다. 서태천이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이 카페 주스 후기가 좋네요. 과일 주스나 스무디 좀 먹어 볼래요?”

“네?”

“배 시간 넉넉하니까 음료수 한 잔씩 더 마시고 바닷가까지 산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 배 시간을 찾아본 게 아니라 이 카페에 대해 검색한 거였어?

이지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저는 토마토, 자두, 복숭아 주스 각각 한 잔씩이요.”

그렇게 음료수 세 잔을 클리어한 이지운은 서태천과 함께 바닷가를 걸었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며 날아가는 와중에 곱게 노을이 지니 풍경이 그림 같았다.

“정말 근사한 곳이네요. 이런 곳 알아내느라 고생했습니다.”

“본부장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만 배 타러 갈까요?”

서태천이 손목시계를 힐긋 보더니 물었다. 이지운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간은 6시. 배는 이미 떠나고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출입로에는 <금일 더 이상 출항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 배를 이용해 주세요.> 라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아, 어떡해. 배가 없나?”

이지운이 딱딱한 연기 톤으로 말하며 식은땀 흘리는 흉내를 냈다.

“어떡해요, 본부장님. 제가 배 시간을 잘못 알았나 봐요.”

이지운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안타까운 척 혼신의 연기를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나 지금 연기하고 있어요, 거짓말 중입니다. 하는 티가 났다.

“흠. 성수기가 끝나서 마지막 배를 없앴다고 저기 쓰여 있군요. 어쩔 수 없네요.”

서태천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고 가는 수밖에.”

“네? 여기서 자고 간다고요?”

이지운은 일부러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두 손을 허공에 펼쳤다. 극도의 어색함이 뿜어져 나왔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사물놀이를 했다.

됐다, 됐어! 이제는 민박집에 가서 한 방에 묵는 일만 남았어!

“그러면… 음… 우리 민박집! 민박집에 가요! 방 있냐고 물어봐요!”

“그러죠. 제가 저기 창구 직원한테 가서 민박집 위치를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 시기에 운영하는 민박집 정보를 알아낸 다음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선착장 직원이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가니 과연 자그마한 시골집에 <방 있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고, 마당에 한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 말씀 좀 여쭐게요. 저희 배가 끊겨서 그런데… 혹시 방 하나 있을까요?”

이지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으로는 불타는 신호를 보냈다.

제발! 하나만 남았다고 하세요, 하나만!

할머니는 이 섬에서 민박만 30년을 해 온 베테랑으로,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딱 봐도 커플 같은 느낌을 주는, 하지만 아직 갈 데까지 가지 않은 포스의 알파와 오메가.

배가 끊긴 이 시각, 이 온도, 습도. 알파와 오메가가 무슨 일을 치기 좋은 이 무드를 보라.

그래. 저 오메가는 지금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구나.

할머니는 빠르게 판단을 마친 뒤, 안타깝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어쩌면 좋아? 방이 있긴 한데 딱 하나 남았네.”

그녀의 등 뒤로는 텅 비어 문까지 활짝 열린 방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이지운은 굴하지 않고 장단을 맞췄다.

“이런. 세상에. 진짜요? 방이 딱 하나? 어떡해.”

서태천의 눈에도 빈방이 여럿 보였다.

이지운도, 할머니도, 서태천도 모두 이 집안에 빈방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어떡해요, 본부장님. 방이 딱 하나래요. 하나!”

“어쩌겠습니까. 같이 자야죠.”

“그려. 내가 이부자리 깔아 줄 테니까 좀 기다려요. 아유, 방이 딱 하나라서 미안하네… 만실이야, 만실.”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향했다. 속는 사람은 없고 속이는 사람만 셋인 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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