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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29화 (29/100)

29화

라면을 실컷 먹고, 이지운은 냉동고 안 군만두 두 접시와 아이스크림까지 클리어했다.

“아이스크림 더 가져다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는 드릴 말씀이 있는데….”

“뭡니까.”

이지운이 맞은편에 앉은 서태천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우는 얼굴의 숙려둥이와 함께 경고 메시지가 떴다.

“제 점수가 많이 낮아져서 보완책이 필요하대요. 캠프랑 원데이 상담, 그리고 단둘이 여행 이렇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흠… 그렇군요. 사실 나도 숙려 일지 업데이트를 못 한 지 좀 되어서 점수가 낮습니다.”

서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이대로 놔두면 저희 점수가 너무 많이 떨어져서 미흡 되는데….”

“알고 있습니다. 실은 저한테도 오늘 알람이 왔었습니다.”

“아.”

맞다. 저쪽에도 알람이 갔겠구나. 이지운은 어떻게 해야 단둘이 여행 선택지로 이야기를 몰아갈지 살짝 걱정이 됐다. 바쁘기로 소문난 서태천이라면 활동적인 것보다 원데이 부부 상담 유형을 더 선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태천이 내놓은 대답은 이지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단둘이 여행 어떻습니까. 토요일 당일치기면 크게 부담되지 않을 것 같은데. 다녀와서 일요일에 푹 쉬면 되니까요.”

“저, 정말요?”

이지운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사실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럼 본부장님! 여행 계획 제가 짤게요. A부터 Z까지. 교통, 관광! 그리고 맛집!”

“맛집 중요하죠. 그건 이 주임이 저보다 훨씬 전문가일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서태천이 피식 웃었다. 이지운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 알파, 이제부터 내가 정복해 나간다!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보자고!

***

다음 날 아침, 이지운은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했다.

어떻게 회사에 들어오면서 미소를 띠고 노래를 부를 수 있나. 많은 직장인이 보기에 굉장히 이해가 안 가는 풍경이었지만, 이지운은 오늘이 너무나 행복했다.

우선 팀장과 부장이 세트로 출장을 가는 날이다. 심지어 바쁜 일도 없으므로 오늘은 직장인 버전의 어린이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과연, 민 대리와 팀원들은 평소보다 밝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혜경

이 주임. 어제 수고 많았어. 근데 현수막 때문에 팀장이 개지랄했다며?

민 대리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좀 그렇긴 했는데 괜찮아요.

민혜경

되게 웃긴다. 자기가 아는 업체에 맡겨 놓고 뭔데 화를 내?

그래도 잘 넘어갔어요. 본부장님이 제 편들어 주셔서….

타자를 치고 있던 민 대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민혜경

본부장님이?

네. 뭐 어떠냐고 그대로 진행하라고 커버쳐 주셔서 수습됐어요.

민혜경

오… 그래? 그렇구나.

민 대리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둘이 뭔가 있다, 있어.

“그런데 대리님.”

이지운이 민혜경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응?”

“저… 안 바쁘시면 잠깐 카페테리아 다녀오실래요?”

“오! 나야 좋지. 오늘 윗대… 아니, 윗분들도 안 계신데 커피 한잔 즐기지 못한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민혜경이 지갑을 챙기며 씩씩하게 일어났다. 이지운과 그녀는 옥상에 위치한 직원용 카페테리아에 들어가 각각 바닐라 라테와 수박 주스를 시켰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 중 이지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실은요, 대리님.”

“어어. 뭔데. 말해 봐.”

혹시 또 본부장 이야기가 나오진 않을까, 민혜경은 기대가 됐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제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 연애 이야긴데요.”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 그건 남 아닌가? 딱 봐도 거짓말. 본인 이야기로구만!

민혜경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이지운더러 썰을 풀어 보라 했다.

“그게,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누굴 좋아하…게 됐대요. 근데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니까 되게 고민이 된대요.”

“오, 그래?”

민혜경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상대방도 자기한테 마음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되게 어색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잖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민 대리는 시무룩하게 풀 죽은 이지운을 보면서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남의 이야기인 척하면서 상담을 걸어왔으니 보편적인 대답을 해 주는 게 예의 같았다.

“음. 글쎄… 그럴 때는 돌직구를 던져서 정면 승부를 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어… 정면 승부요?”

“그래. 지운 주임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괜히 흔들리고 있겠어? 뭔가 그쪽도 날 좋아하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드니까 혼란스러운 거 아니야?”

“어어!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이지운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크흠, 하며 주변 눈치를 본 다음에 민 대리에게 살짝 물었다.

“조만간 단둘이 어딜 놀러 간다는데… 어떻게 좀 잘해 볼 방법 없을까요.”

“어디로 놀러 가는데?”

“네? 그건 아직 안 정했다는데….”

“그거 알아? 연애에 있어서는 데이트 장소가 8할은 먹고 들어가.”

민혜경 대리가 유례없이 진지한 눈빛을 띠었다.

“데이트 장소가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요?”

“당연하지! 내가 진짜 중요한 조언 하나 할게. 애매할 땐 섬이야, 무조건 섬을 가.”

“서… 섬이요?”

이지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일치기 여행이다 보니 경기도 쪽이나 멀어야 충청도 쪽에 가서 맛집 체험, 드라이브나 하다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섬이라니. 민 대리의 말은 매우 임팩트가 있어 보였다.

“왜 섬이죠?”

“하, 왜냐니. 이 주임 드라마 많이 안 봤나 봐? 대대로 내려오는 클리셰 있잖아. 배가 끊기는 작은 섬에 가서 일부러 배를 놓치면 일은 저절로 흘러가게 돼 있어.”

“네? 배를 놓쳐요?”

“인천 쪽에 내가 아는 작은 섬이 있어. 강화도에서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데… 저녁 되면 칼같이 배가 끊기거든. 그런 데 가서 배 놓치고 민박집으로 유도해. 그러면서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는 거지.”

이지운은 무릎을 탁 쳤다. 당일치기라는 고정 관념에 갇혀 시야가 너무 좁아져 있었다.

자신이 알기로 서태천은 이번 주말에 딱히 일정이 없다. 그래서 당일치기 여행 후 일요일에 푹 쉬자는 소리를 한 것이고. 그렇다면 역으로 이용해서 그런 섬에서 1박 2일을 보내면 좋지 않겠는가.

언제나처럼 집이 아닌 공간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면서 하룻밤을 나게 된다면…! 일이 생겨도 틀림없이 생길 터. 이지운은 바로 이거다 싶었다.

“정말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대리님.”

“감사는 뭘.”

꼭 잘 돼라, 후배여. 민혜경 대리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

이지운은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과연 민혜경이 알려준 섬은 저녁 7시면 배가 칼같이 끊겼다.

또한 정보에 따르면 이 섬은 등산로 하나가 볼거리의 전부라, 이렇다 할 리조트나 펜션도 없이 작은 민박집만 몇 개 있다는 게 블로거들의 후기였다.

이지운은 빠르게 배 시간표를 숙지하고 차량 선적, 맛집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루하루 디데이를 세며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고, 이지운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 날씨 좋다!”

한 시간 겨우 자고 일어난 이지운은 기지개를 활짝 켜고 맑은 날씨를 감상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고 깨끗해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의 연애를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음… 억제제랑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이 정도면 됐나.”

이지운이 짐을 싸며 중얼댔다.

“다 챙긴 것 같은데.”

이지운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주먹을 쥐고 허공에 잽을 날렸다. 그러고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춤을 추라면 출 수 있을 듯했다.

서태천이 채비를 마치자 출발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사진, 사진 찍어요.”

“아. 깜빡할 뻔했습니다.”

두 사람은 차를 움직이기 전 셀카를 찍고 앱에 현 위치를 태그했다. 사진을 찍느라 가까워지는 몸에 이지운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어떡하냐. 나 너무 신나…!

이지운은 흥을 음악으로 승화했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드라이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찾아 플레이리스트에 올리고, 창문을 열어 바깥바람을 듬뿍 마셨다.

“이 주임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여행 가서 신납니까?”

“아, 네. 제가… 여행 가는 게 되게 오랜만이라서요.”

“그렇군요. 나도 오랜만인 것 같아요.”

서태천 역시 연애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국내 여행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항상 일을 위한 출장뿐이었지, 즐기기 위해 어딘가를 찾는 건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

“다 왔네요.”

차가 여객 터미널에 도착했다. 티켓을 산 두 사람은 50인승 배에 차를 싣고 작은 섬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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