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방울토마토가 낙하하는 순간, 이지운의 심장도 함께 덜컥했다.
“아….”
난데없이 봉변당한 느낌. 예기치 못한 일이라 충격은 두 배, 세 배였다.
“음식 치워 드리겠습니다. 발밑 조심하십시오.”
연회팀 직원이 다가와 이지운이 흘린 방울토마토를 치워 주었다.
“바비큐 코너 이용 안 하십니까?”
“아, 네… 네. 먹… 아니요. 안 먹을래요.”
이지운은 고기 굽는 연기로부터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털썩, 앉는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
“그럼 이것으로 창립 기념일 행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회자가 폐회를 알리고 사람들이 힘차게 박수를 쳤다. 서 회장과 각 임원들이 의전을 받으며 행사장을 빠져나간 후, 홀은 텅 비었다.
김민지 대리와 T/F 구성원들은 연회팀과 함께 뒷정리를 시작했다. 현수막과 꽃장식을 떼고 부산스럽게 마무리를 하고 있자니 서태천이 다가왔다.
“여러분 덕분에 올해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에 정말 감사합니다.”
직원들은 피로와 땀, 보람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마주 웃었다. 오늘 너무 힘들지 않았냐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뒤따랐다. 하지만 이지운은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결혼… 웨딩홀. 본부장이 웨딩홀을 알아보고 있다….
그 생각에만 빠져 있느라, 이지운은 어느덧 밤 9시가 넘은 줄도 몰랐다.
“지운아. 내가 데려다줄까?”
“아, 아니요. 기 대리님 피곤하신데 먼저 가세요.”
“너 태워다 주는 건 하나도 안 피곤한데.”
기현진이 은근슬쩍 이지운에게 추근댔다.
“전 따로 갈게요.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집에 갈 때는 BBG 차를 얻어타고 갈 계획이었기에, 이지운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서태천의 눈치만 살폈다. 아마 곧 문자로 어디로 나오라는 연락을 하겠거니 싶었다.
지잉. 예상대로 핸드폰이 울렸다. 이지운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문자를 확인했다.
“어…?”
그런데 어디 주차장에서 만나자는 이야기가 없었다.
BBG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늦을 것 같습니다.
먼저 귀가하세요.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이 오밤중에?
이지운이 미간에 주름을 가늘게 잡았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웨딩홀 이야기 진짜인가요? 당신 결혼이라도 해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게 이지운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사적인 질문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숙려 기간이 끝난다면 누구와 어떻게 살림을 차리든, 그건 서태천의 자유다. 이지운은 그 객관적이고도 잔인한 사실에 손을 베인 사람처럼 따끔함을 느꼈다.
결국 기현진을 따돌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거의 매일 함께 출퇴근하다가 늦은 밤 홀로 택시를 타니 기분이 울적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밤 풍경은 불빛이 가득한데도, 이지운은 묘하게 쓸쓸해졌다.
집에 들어와서도 그 쓸쓸함은 계속되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 침묵에 싸인 주방. 이지운은 원래도 넓었던 이 집이 유난히도 허전해 보였다.
그는 대충 씻고 거실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몸을 돌려 웅크리고 누웠다.
그래. BBG도 사람이니까 중간에 마음이 바뀔 수 있지. 말로는 철저한 독신주의자라고 하지만 계기가 있어서 생각을 고쳐먹었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어서 러브 빌리지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저 사람과 꼭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다든가….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데?
이지운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 주임.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우리의 신혼생활, 이제 막을 내리는군요.’
‘저, 저기… 본부장님. 잠깐만요.’
‘여기는 내 새로운 배우자 되는 사람입니다.’
상상 속의 본부장은 훤칠한 모습으로 턱시도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아리따운 오메가 3호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집에서 나가요.’
상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망상 속 이지운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이미 추운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불쌍하기가 성냥팔이 소녀 수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취방 유지할걸. 6개월 치 월세가 뭐 그리 아깝다고 방을 뺐을까…!
흑흑. 난 이제 어떡해. 내가 본부장과 셀카를 찍던 침대도 빼앗기고, 숯검댕이 토스트를 먹던 주방도 빼앗겼는데.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알파도.
“뭐?!”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이지운이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방금 마음속의 자아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좋아하는 알파? 내가… 내가 본부장을 좋아해?”
이지운은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이 떨림은 분명 본부장을 떠올릴 때마다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혼이 성립되는 게 무섭다. 이대로 숙려 기간이 끝나고 본부장과 평사원 사이로 돌아가고, 그의 곁을 다른 오메가가 꿰찬다면…!
“싫어. 절대 싫어!”
이지운은 드디어 제 감정을 인정했다.
나는 로봇 같은 본부장, 서태천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고 뜨겁게.
“BBG, 넌 내 거야!”
빈집에 이지운의 고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
“그런데… 그럼 이제 어떡하지.”
한참 소파 위를 뒹굴며 고민을 거듭했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서태천은 다른 오메가랑 썸을 타고 있는 듯했고, 이지운과 서태천의 이혼은 이제 4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띠링.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이지운은 탁자에 엎어놓았던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경고: 이지운 님, 숙려 점수가 너무 낮으세요. 만회하려면 다음 활동 중 하나를 선택하셔서 점수를 얻으셔야 합니다.>
“아… 점수가 많이 떨어졌네?”
얼마 전까지 80점대를 유지하던 점수가 어느새 65점까지 추락해 있었다. 이지운이 알기로는 60점 미만이면 얄짤 없이 숙려 활동 미흡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숙려둥이인지 나발인지 하는 마스코트가 이렇게 격렬하게 춤도 추고 알람도 보내는 것일 테다.
[확인]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이지운 님, 배우자와 상담해서 만회 코스를 골라보세요.
1. 부부 동반 캠프 참가
2. 단둘만의 여행
3. 스페셜 원데이 부부 상담
이지운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만약 더 이상 숙려 일지도 업데이트하지 않고 특별 활동도 거부한다면 점수는 추락할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평균 점수를 확 깎아 먹게 되고, 부부는 숙려 미흡 판정으로 인해 한 달가량 숙려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그만큼 서태천과 함께 지낼 시간이 연장된다는 소리였기에, 이지운은 그게 나은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2번 선택지. 단둘만의 여행을 고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제주도 러브 빌리지는 여러모로 여행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숙소도 따로 썼거니와 카메라가 따라붙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 나도 한 번쯤 서태천과 오붓한 시간을 가져 보고 싶어. 온전히 단둘이서,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면서.
“하아….”
띵동.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이지운은 고민으로 인해 다 쥐어뜯어 놓은 머리를 곱게 가다듬고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안 자고 있었습니까?”
서태천은 정장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치고,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며 들어왔다. 그 모습이 무슨 향수 광고 같아서 이지운은 숨을 멈췄다.
…나 지금 또 반한 것 같은데?
“아… 네. 잠이 안… 안 와서.”
“피곤했을 텐데 쉬지 그랬어요.”
“어… 그러게요.”
이지운의 심장이 또 눈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서태천은 주방으로 들어가 검은 머그컵에 물을 따라 마시더니, 이지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까 뷔페가 만찬이었던 걸 알지만, 이지운의 특성상 따로 저녁을 차려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아, 아니요.”
“잘 됐군요. 나도 아직인데 같이 뭐나 좀 먹죠.”
그렇게 말하면서 서태천이 냉장고를 열었다. 이지운이 후다닥 달려가 그를 만류했다.
“어어,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내가 만들게요.”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그렇게 따지면 이 주임은 일 안 했습니까? 높은 사람들 앞에서 긴장까지 해야 했으니 배로 힘들었겠죠.”
서태천은 이지운이 레인지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골라만 줘요. 매운 게 좋습니까, 완전 매운 게 좋습니까?”
“네?”
“라면요. 매운 라면에 고춧가루랑 후추 좀 넣어 보려는데 괜찮아요?”
와. 맛에 있어서도 정통하네. 당연히 고추 후추 고 아닌가?
“저 완전 맵게, 대신 계란 두 개 풀어 주세요.”
“좋습니다. 그럼 앉아서 기다려요.”
이지운은 라면을 끓이는 서태천의 등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한번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 괜스레 쑥스럽고, 부끄럽고, 또 욕심이 났다.
“…원하나 봐.”
“뭐라고요, 이 주임?”
“아, 아니요!”
“뭐를 원한다고 한 것 같은데.”
“계, 계란 많이 넣은 라면을 원해요. 두 개 말고 세 개 넣어 주세요! 본부장님!”
“그러죠.”
서태천이 근사하게 미소 지으며 계란을 하나 더 까서 냄비에 투하했다. 이지운은 자꾸만 빨개지려는 얼굴을 단속하며 손등으로 얼굴을 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