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지운 역시 서태천을 만나고 아주 조금씩,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의 재미를 알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자신의 삶에 불쑥 등장한 결혼이라는 개념은 이지운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가끔은 섭섭하고, 어떨 때는 들뜨고, 또 어떤 날에는 심드렁하게 지나간다. 그리고 요즘은… 설렘과 놀라움의 연속이다.
주변에서 알아주는 독신주의자였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지운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의 가정은 가진 것 없이 가난했으나 대신 화목하고 정겨웠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만큼 이지운은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자라났고, 크면 꼭 일찍 결혼해 든든한 사위와 귀여운 자녀들을 조부모에게 보여 드리리라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가족에 대한 환상, 기대가 남들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지운이 열여덟 되던 해 조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떴고, 이지운은 가족을 잃는다는 슬픔을 다시 한번 맛봐야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잃어서 아플 존재는,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혼자 살겠어. 나는 평생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살아온 게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차는 좋은 밭에서 수확해서 맛있는 게 아니다. 서태천이 우려 주어서, 그와 마주 보고 마셔서 맛있는 거다.
내일부터 다시 이 남자에 대한 모든 감정을 부정하더라도, 오늘 밤 이 차의 맛만큼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그게 이지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다시 돌아온 회사. 이지운은 회사라는 감옥에 갇혀 업무라는 형벌을 받으며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공지 쪽지가 왔다.
발신 : 홍보팀
안녕하십니까. 러브 빌리지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셨던 사우분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제주도를 떠난 이후 여러분의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촬영팀이 회사를 찾을 예정입니다. 인터뷰에 적극 호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 뭐야. 후속 인터뷰하는 건가.
곧이어 또 다른 쪽지가 날아왔다.
발신 : 홍보팀
세부 일정 알림- 마케팅팀은 14:00~17:00 사이 촬영이 예정돼 있으니 사우분들은 자리를 비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 곧이잖아.”
지금이 오후 1시이니 몇 시간 후면 촬영팀이 들이닥친단 소리였다. 이지운은 그들이 무엇을 물어볼까도 궁금했고, 또 그때의 기억도 새록새록 돋아났다.
…재미있었는데. BBG랑 별의별 일이 다 있었고. 술도 마시고, 바닷가도 걷고….
그리고 그놈의 웃음. BBG의 미소에 내가 넋이 나간 순간이기도 했지.
하염없이 제주도의 추억을 곱씹고 있으려니, 저 멀리 마케팅 2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뭐지?”
가만히 들어보니 기현진 대리의 목소리였다. 곡조는 록발라드였는데, 허용 범위를 초과한 애절한 분위기가 특징적이었다.
“죽어서도! 널 사랑해! 아아아악!”
샤우팅 창법이 가미된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이지운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설마 저거 나한테 바치는 구애의 세레나데 이딴 거 아니겠지?
설마설마하고 있는 와중 곧 마케팅 1팀이 있는 구역으로 촬영팀이 나타났다.
“오메가 1호님! 안녕하세요.”
“PD님 안녕하세요. 제작진분들도 오랜만에 뵙네요.”
오래간만에 보는 제작진들과 악수를 나누고, 이지운은 마이크를 하나 넘겨받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오메가 1호님.”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 제주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참가자 중 한 명이셨잖아요. 하필이면 최종 선택을 안 하셔서 더욱 여운이 남았던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하하.”
최종 선택을 안 할 수밖에 없었지요. 정확히 말하자면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최종 선택을 안 하실 건가요?”
PD의 질문에 이지운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BBG면 모를까, 다른 알파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음… 글쎄요. 저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요? 허허. 이거 재밌네요.”
“왜요?”
“그때 최종 선택을 하지 않은 게 오메가 1호님하고 불참하신 알파 1호님. 딱 두 분이셨잖아요. 그런데 알파 1호님은 그때로 돌아가면 최종 선택을 꼭 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이지운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알파 1호님하고도 인터뷰하셨어요?”
“네. 가장 먼저 찾아뵙고 인터뷰했어요.”
“어… 그러…셨구나.”
누군가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그랬구나.
그렇다면 그건 과연 누굴 가리키는 걸까. 이지운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
그날 저녁, 씻고 침대에 누운 후 이지운은 이야기 꺼낼 타이밍만 찾았다. 평소라면 천장을 보면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며 잠을 잤겠지만 오늘은 졸음을 견디면서라도 BBG와 대화를 해야 했다.
“안 잡니까.”
침대 헤드에 기대 태블릿으로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던 서태천이 물었다.
“네. 저 안 자요.”
“왜 안 자요.”
“그냥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요.”
“나랑?”
“네.”
서태천은 별일 다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블릿을 덮고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서태천이 자신을 향해 모로 누운 것을 확인한 이지운은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오늘 회사에 러브 빌리지 후속 촬영팀 왔다 갔잖아요.”
“맞습니다. 저한테도 찾아왔더군요.”
“혹시 제작진이 묻지 않던가요? 만약 제주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최종 선택했을 거냐고요.”
“네. 물었습니다.”
이지운은 곁눈질로 서태천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 뭐라고 그러셨어요?”
“선택할 수 있다면 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진짜 그렇게 말했구나. 이지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그 상대가 나인지 오메가 3호님인지 물어볼까? 너무 궁금하다.
이지운은 자꾸만 치솟는 호기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서태천의 입에서 ‘사실 제가 선택하려던 사람은 오메가 1호. 바로 이지운 당신입니다.’라는 말이 듣고 싶기도 했고.
“저, 그….”
그러면 누굴 선택하려 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이었다.
이지운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반짝, 켜졌다.
잠시만. 만약에 이 남자가 널 선택하려 했다고 치자. 그 말을 들으면 어떡하려고?
‘실은 저도 알파 1호님 고르려고 했어요! 와. 우리 마음이 통했네? 연애라도 할까요?’
이렇게 물어볼 거야?
우린 이혼을 향해 하루하루 카운트다운 중인 부부인데, 알파 1호님이 날 선택하려 마음먹었을 리 없잖아.
요 며칠간 내가 헷갈릴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사람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행동했을 뿐일 거야.
그리고 BBG가 고르려던 사람은 오메가 3호님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오메가 3호님과 데이트하던 날, 분위기 좋아 보였잖아.
물어봤다가 네, 오메가 3호님에게 고백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떡해? 그러면 나는 괜한 질문에 상처만 받는 셈이야.
‘이 주임과의 거짓 결혼 생활이 끝나면 오메가 3호님과 결혼할 거예요.’
심지어 이런 말이라도 들으면 어떡해?
이지운의 망상은 끝도 모르고 커져만 갔다.
“더 이상 묻고 싶은 것 있습니까?”
“아, 아니요. 없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이지운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몸을 돌려 누웠다. 서태천에게 등을 보이며 누우니 섭섭한 표정도, 시무룩한 기운도 다 숨길 수 있어서 좋았다.
이지운은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열심히 자는 척은 했지만,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코 그런 마음은 없어! 그러니 이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 품지 말고 쿨하게 지내다가 빠이빠이 하는 게 맞아.
왜냐? 우린 그냥 남이 아니라 한 회사의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이잖아. 만약에라도 사적인 감정을 갖고 얽혔다가 안 좋게 끝나면 회사 다니기 불편해져.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러니까 이대로 입 딱 다물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 감정도 갖지 말고! 관심 끄기!
이지운은 벌써 몇 번이나 실패한 ‘관심 끄기’ 전법을 다시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잠든 서태천의 체온이며 체향이며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에라, 모르겠다. 거실 나가서 머리라도 식히자.
이지운은 어두운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조금 흥분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이지운의 시선이 집 안 이곳저곳을 훑었다.
이곳에서 지낸 지 벌써 한 달하고도 절반 남짓, 어느새 익숙해진 곳이었다. 이지운의 시선이 냉장고로 향했다. 속이 답답하니 시원한 것이라도 마셔서 답답한 속을 풀고 싶었다. 이지운은 냉장고 문을 열고 안쪽을 살폈다.
…약이나 꺼내 마실까?
요즘 들어 이지운은 최 여사가 지어 준 한약에 더더욱 빠져들고 있었다. 서태천은 약의 존재를 아예 까맣게 잊었는지 첫날 이후로 언급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지운은 약을 야채 칸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매일 한 포씩 뜯어 먹는 중이었다.
희한하게도 약은 중독성이 있는 건지 하루라도 빼먹을라치면 자꾸만 생각이 나고 잠을 자다가도 구미가 당겼다.
대체 무슨 성분인지는 몰라도 요새 손발도 따뜻해진 것 같고 기운이 나는 것만 같단 말이지.
다음번에 어머님 만나게 되면 무슨 성분이냐고 살짝 물어볼까?
이지운은 약을 한 봉지 꺼내서 포장을 뜯은 다음, 빨대를 꽂고 쭉 들이켰다.
“크으.”
역시 오늘도 건강한 맛이 났다. 벌써 몸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
이게 어디에 쓰는 약인지 미리 알아봤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지운은 나중에 이 약을 왜 먹었을까, 진심으로 후회하게 된다.